눈을 뜨니 벌써 중천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머리는 아주 당연하게도 깨질듯이 아팠다
전날은 이브 날이었다
할 것이 없는 동생 3명을 불러 1차는 오리고기를 먹고 2차는 양주를 마시고 3차는 막걸이를 마셨다
막걸이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고 카톡을 보낸 기억은 나는데..
4차는 어디 갔었나?
잠시만 먼가 하지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같은데;;;;
정신없이 핸드폰을 켜서 확인해보았다
요주의 인물들에게 전화하진 않았고...
일단 안심했다
카톡 한번 볼까?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난 사고를 쳤다
전여친한테 연락해버린 것이다;;;;;;;;;;;;;;;
분명히 숨김으로 해놨었는데 그걸 굳이 풀어서 카톡을 보내다니;;;;;;;;
역시 인간은 위대하고 술마신 인간은 더 위대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카톡창을 바지런지 올렸다
제발.. 제발..
평범한 안부카톡이군...
아직까진 아주 나쁜 건 아니야 그냥 조금 술에 취했을 뿐이고 단지 조금 외로웠을 뿐이지
잠깐 이런.. 제발 그걸 보내면 안돼!! 보내지 말라고!!
어제의 난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십년지기에게 제안하듯 보자고 했고
우린 다음주에 보기로 되어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시간과 장소까지 아주 정확하게 잡혀있었다;;;;;
난 술김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ㅜㅜ
2012년 가을 한 여자얘를 만났다
어리고 이쁘고 똑똑한 그래서 나름 인기가 많은 여자얘였다
우린 서로에게 맹렬하게 빠져들었다
그해 겨울 그녀는 국내최고의 대기업에 덜컥 붙더니 우아하게 자랑하고 신입사원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멀어졌다
친구들 말대로 정분이 났을까 아님 빡센 연수생활에 찌든걸까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녀는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멀어져갔고 난 그에 정비례하여 불안하고 지쳐갔다
6주간의 긴 연수생활이 끝나고 복귀한 그 주 일요일 결국 불안함과 지침을 이져내지 못했고 우리 사이에는 금이 생겼다
놀란 마음에 금을 테이프로 붙이고 싶었으나 붙일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뛰어난 회피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을 보며 대화로 풀고 싶었으나 그녀는 지나치게 바빴다
신입사원으로 각종 회사 회식이 있었고 각종 친구들 모임에 하다못해 교회모임까지 온갖 약속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격언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보통 여자답게 금을 좋아했고;;; 무서울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2월말에 간신히 아주 잠깐 보았으나 그녀는 한결같았다
여전히 뚱했고 여전히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 뿐이었다
3월까지 노력해보았으나 달라지지 않는 그녀에 난 절망했다
결국 4월초 마지막으로 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속으로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더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연은 생각보다 질겼다
연락을 끊은지 2주가 지났을까
별안간 그녀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그 후 대략 1주일간격으로 꾸준히 연락이 왔다
난 카톡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대단히 사무적으로 보냈다
밥먹었지?
엉 먹었어
여기 밥 맛있네 나중에 함 오자
밥맛있어 보이네
그녀는 아마 심심이와 대화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_-;;;;;
당시 난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우린 7월에 내 대규모 프로젝트가 끝나면 보기로 합의했다
7월초에 그녀는 어김없이 보자고 했고 난 회사MT를 다녀와서 연락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규모프로젝트가 끝났지만 여전히 난 바빴다
공부도 해야했고 해야 할 업무도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야했고 밀린 만화책이나 각종 예능을 보아야했으며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쉬워야할 때도 있었다
아마 2월달에 그녀도 나처럼 바빴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더이상 연락이 오질 않았다
각자 생일에 한번씩 안부카톡을 주고 받긴 했으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12월쯤 다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얼굴 한번 보자고
평소와 같이 그녀에게 말했다
난 업무차 지방에 잠깐 내려와있다고
서울 올라가면 연락하겠다고
2주후 서울에 올라왔으나 온갖 송별회가 날 맞이하였고 약속을 하루하루 미루었다
3월 이후 12월까지 난 정신없이 바빴다
얼마 없는 여유 시간에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는
그녀와의 경험은 지나치게 아픈 기억이었고
우리의 미래는 유쾌하지도 않은 주제에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해결해야지 싶다가도
언젠가, 지금 당장은 절대 아닌 미래의 어느 순간 생각해봐야지;;;;; 하며 계속 미루어왔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것은 1월초로 대략 10일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 10일은 한가하다못해 지루한 나날이었고 생각할 시간은 넘치게 많았다
무엇이 정답일까
어떤 말을 할까
개드립을 칠까
아님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지독하게 심각한 얘기를 꺼낼까
사실 그녀를 한번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밀린 얘기도 많았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왜 왜 그랬냐고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김영철에게 했듯이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대체 왜 헤어진 거냐고
시간이 흘러흘러 어느 덧 약속날이 되었다
점심에 세수를 하며 그녀에게 할 말을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았다
절대로 아쉬움이 남지 않게
혹여나 실수하지 않게
일정을 복기해보았다
음식점 예약부터 동선까지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하다못해 머리까지 잘 되었다;;;;;;
그리고 별안간 깨달음이 왔다
곧바로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미안한데 오늘 만나지 말자고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오빤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너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만나봤자 무의미하다고
카톡을 보내자마자 헤어진 이후에도 굳건하던 각종 SNS를 끊고 1년간 공유하던 멜론의 비번도 바꾸었다
그녀는 곧바로 설득을 했다
혼자 생각하니 자꾸 오해가 생기는 것같다고
만나서 대화하다보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차근차근 해결해보자고
정말 근사한 말이었다
어찌나 멋진지 액자에 걸어 가훈으로 심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나의 가치관에 정확하게 부합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2월달에 내가 그녀에게 미친듯이 반복한 말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확히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은 2월중순부터 하루에 2%씩 사라진 것 같다
2월중순에 만날 수 있었다면 모든 걸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2월말에 만나서 해결했다면 대부분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4월초에 만났을 때 해결할 의지를 보였다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걸 밑천 삼아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4월중순에 마침내 모든게 사라졌고
4월말에 만났을 때는 이미 폐허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의 연락은 단지 헤어짐을 굳이 확인하기 싫다는 표현이었을 뿐
왜 작년 2~3월에 그녀는 그토록 날 피해야 했는지
만나면 그토록 화사하게 웃던 그녀가 갑자기 왜 먼산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햇는지
그녀의 이유를 모른체 무수한 가설만을 남기고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녀도 아마 나의 이유를 모를 것이다
사실 작년초에 난 굉장히 불안하였다
2013년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해였고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3월달부터 미친듯이 바빠질 예정이었고 그 날은 하루하루 어김없이 다가왔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굉장한 부담이 되었다
계속 끌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1월달부터 계속 고민하였다
넌 고민하다 분명히 4월쯤 헤어질 꺼라고
고민을 지켜본 내 십년지기 첫사랑은 확신어린 어조로 예언을 하였다
소름이 끼치게 정확한 예언이었다
난 반박하고 싶었지만 첫사랑은 나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난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같다
4월달에 바쁠 때 헤어져서 힘드느니 어차피 한가한 지금 헤어지는게 훨씬 낫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달라진 태도는 고민하던 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었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였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다는게 이런 상황일까?
물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마음이 아팠고 또 아팠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정신차리라고 욕을 할 만큼 마음이 아팠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무릅꿇고 빌고 싶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녀와 함께 간 장소를 때때로 지날 때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무 일도 못했다
하지만 그 때 헤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일과 사랑을 병행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녀와의 이별을 택했을 확률이 높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세상에 여자는 많은데
지금 정말 중요한 때인데
하며 말이다
난 좋은 타이밍에, 누구보다 슬퍼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로 헤어지길 바랬고
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완벽한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난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4월이후에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와 헤어진 나의 이유다
우리는 서로의 이유를 알지못하였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말한다해도 상대방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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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상대가 바쁘고 힘들때 나도 너무 힘들고 지쳐서 헤어지고 싶었지만 지금 헤어지는 건 정말
상대에게 못할 짓이라 생각해서 그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헤어지지 말자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내가 바쁠 때 헤어지면 나에게 힘들테니 한가할 때 헤어지자는 발상은 정말 상상도 해본 적 없군요..
결국 내가 힘든게 싫으니 상대가 바쁘고 힘들 때 헤어지자는 것인데 정말 사랑하긴 하신건가요?
힘드셨던 건 악어의 눈물 같구요.
다시 연락하셨던 건 술기운에 연락했다가 맨정신 돌아오고 시간이 지나다보니 사실 딱히 그렇게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다시 귀찮아지신 것 아니신가요. 아무튼 만나지 않기로 하신 건 잘하신 결정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