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글은 제가 자주 칭송하는(....) 강희제에 대한 글입니다. 강희제의 업적이나 인간성을 칭찬하는 말을 제가 자주 올렸는데,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희제는 황제고, 이는 중국 전역에서 가장 찬양 받는 존재입니다. 현대의 연예인, 국회의원, 대통령 급 되는 인물들도 관련된 곳에서 언급을 한다면 미화가 굉장히 들어갈 것이 뻔한데 중국 사서의 기록에서 중국 황제에 대해 칭송하는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대안이 있긴 합니다.
청나라의 많은 황제들은 여타 예수회 선교사들을 궁중에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 역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황제의 작은 일등에 대해서도 기록에 남겨 상당히 색다른 면모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 역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전무한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머나먼 전설속의 초강대국 중국의 신비스러운 현인 황제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현 유럽의 군주들에 대한 비판 등을 하는 의도도 있었기에, 그런 목적 때문이라도 어느정도 과장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를 따져보자면 있어 전통적인 중국의 역사서술에서 제국의 주인인 황제에 대한 기록보다는 프로파간다적 목적이 적었을 것입니다.
강희제에 대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시각은 꽤 볼만한데 게중에 몇몇만 한번 보면……
리파와 제르비용의 기록으로 사냥을 하는 강희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강희제가 직접 몇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풀 속에 숨어 매의 눈으로 사냥감을 노리는 부분 입니다.
평소에 사냥 덕후에 무예를 좋아하던 강희제가 수행원을 이끌고 정력적으로 미친듯이 움직이는 부분에 대한 부베의 기록 입니다. 부베는 황제가 말들이 지쳐서 나가 떨어질 정도로 사냥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사냥이 끝나면 전혀 쉬지 않고 모든 업무를 처리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뒤알드는 이러한 강희제의 태도에 대해 "거대한 제국의 모든 일을 혼자서 모두 처리하는듯 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냥에 나섰을때에 대한 제르비용의 기록인데, 제르비용은 중국의 지배자인 황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직접 요리를 하며' 사슴의 간을 정리하고 자신들 선교사들에게 대접해주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아심 부베는 강희제에 대한 외모를 묘사하면서, 강희제가 몸매가 좋고 키는 위너에 상당한 미남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르비스트는 언젠가 강희제에게 어떤 새의 벨기에 말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후 강희제가 시간이 지난 후 그 새의 이름을 벨기에어로 무엇인지 물어보자 본래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베르비스트는 순간적으로 헷갈려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강희제가 벨기에 말로 그 새의 이름을 알려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수학자인 라이프니치는 강희제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강희제를 만난 예수회 인물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강희제가 놀라운 지식욕을 보이고, 특히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할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두 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곳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 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작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 마포로 만든 홑 마고자)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 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 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강희제 평전 中)
부베는 강희제가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존재 중에 하나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검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수신제가 中)
부베는 제위 초기의 강희제가 나이가 아주 어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노련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페드리니는 강희제가 서양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함께 피아노 앞에 마주 앉아 작곡을 하고 연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이 오직 순전히 강희제를 칭송하기 위해서만은 물론 아닙니다. 이런 강희제의 철인과 같은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비판을 퍼붓거나 혹은 정반대로 찬양을 하는 용도로 쓴 면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베의 경우 강희제가 유럽의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것을 말한 뒤, 루이 14세에게 "이것은 프랑스의 과학력에 대한 반증" 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거나, 저렇게 강력한 국가의 현명한 황제를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교회의 보호자로서 루이 14세의 최대의 업적" 이라는 식으로 루이 14세를 높이는 용도로 강희제를 사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관적으로 강희제를 칭찬하고 있다는 부분은, 강희제가 실제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면모가 있었으니 그러한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아도 괜찮을 듯 합니다.
康熙帝의 淸 帝國 구상과 滿洲族의 정체성 :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 송미영
부베와 라이프니츠 - 안종수
강희제 평전 - 왕리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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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제가 - 등예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