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종북 강요하는 사회 – 내게 빨밍아웃을 허하라
"저는 북한 싫어합니다. 북한 체제를 부정하지만.."
언젠가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와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서두에 위와 같은 식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여지없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보수 정치세력과 수구 언론을 의식한 이 멘트에서 나는 원인 모를 씁쓸함과 슬픔을 느꼈다. 마치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누군가와 시사 정치 문제를 소재삼아 이야기를 나눌 때, "나도 북한정권 싫어하지만..", "나도 통진당이 맘에 안 들지만.."이라는 식의 멘트를 입버릇처럼 먼저 전제로 꺼내는 현실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겐 왜 나도 모르게 이런 말버릇이 생긴 것일까? 내가 가진 두려움은 간단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한 현실 속, 그러니까 실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종북 프레임에 의한 낙인과 입막음에 대한 두려움. 보수적으로 편향된 커뮤니티, 정치적으로 우경화된 조직 사회일수록 (천안함 사건, 통진당 사태를 비롯한) 대북관련 주요 현안들의 불합리한 부분과 부조리한 측면을 지적하면 안보의식이 부족한, 뭣 모르는 '꼬꼬마 종북 꿈나무'로 취급당하기 쉽다. 그리고 한번 이러한 굴레가 씌워져 버리면 그 이후의 내 모든 정치적 발언은 그 상대방에게 혹은 그 커뮤니티 내에서 '정당한 힘'을 발휘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결국 이런 종북 프레임이라는 전가의 보도에 의해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아무리 국정원 사태에 관해 박근혜 정부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철도 파업과 관련한 정부의 일방적인 대응을 꼬집어도 상대방에게는 뭣모르는 소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부족한 안보의식을 지적당하며 "감성적 선동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쓴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기실 이것은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다시금 만연한 '레드 콤플렉스'의 망령에 휘청거리는 2013년 우리 사회와 이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말로 종북을 강요하는 것은 누구인가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와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라이벌 문재인 후보에게 NLL 논란과 함께 새누리당으로부터 덧씌워졌던 것이 바로 종북주의자 논란이며, 국정원 선거 개입과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시국 미사를 주도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수구언론으로부터 씌워진 것 또한 바로 이 종북단체 낙인이다. 이뿐만인가? 각 대학에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행렬에 자행된 일베의 테러 방식 또한 종북 색깔 덧씌우기였으며 민주노총과 연계하여 철도 파업을 진행중인 코레일 노조에게 앞으로 씌워질 굴레도 바로 이 종북주의일 것이다. 참으로 쉽고 간편한 논리다. 정권에 위협이 되는,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잠재우는 전가의 보도가 되어버린 '종북 프레임'. 참으로 간편하다. 참으로 간편하고, 참으로 후지다. 1973년, 83년도 아닌 2013년의 대한민국에 되살아난 레드 콤플렉스의 망령이라니.
만약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세력이 불순한 종북세력이라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어떠한가?
국정원 사태를 규탄하고,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릴레이를 응원하며, 철도 파업을 지지하는 나는 종북 세력의 획책과 선동에 휘말린, 철없는 꼬꼬마 빨갱이인가? 이러한 나는 대한민국에서 진정으로 위험한 불순분자이자 종북주의자인가? 정말 그런가?
오히려 이 시대, 이 사회에게 정말로 종북을 강요하는 것은 누구이며,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누구인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후져도 이렇게 후질 수가 없다
오늘 일어난, 공권력 투입을 통한 경찰들의 민주노총본부 진입 사태를 씁쓸히 지켜보면서 김어준 총수가 쓴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라는 글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몰상식과 비상식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까지도 종북몰이로 묻어버리는 사회.
국민 통합과 국론 분열 방지라는 미명하에 모든 논의와 소통까지도 원천 봉쇄하는 사회.
천박해도 이렇게 천박할 수가 없으며, 후져도 이렇게 후질 수가 있을까.
내게 빨밍아웃을 허하라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종북주의가 이런 종류의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종북주의자 하겠다.
그들이 진정 추구하는 사회가, 몰상식과 비상식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까지도 불순행위로 간주하는 이런 천박한 사회라면,
난 기꺼이 종북주의자의 낙인을 새기고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에 맞서겠다.
더불어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처럼 사회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생성되고 퍼져나가는 이러한 움직임, 이러한 목소리마저도 그들이 얘기하는 불순세력의 선동, 이른바 '빨밍아웃'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빨밍아웃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빨밍아웃을 허하라.
국가 안보와 국민 통합이라는 미명과 위선적 가면 속에 숨겨진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기꺼이, 빨밍아웃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