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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17 01:14:20
Name yangjy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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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이문열 중편소설 '들소'







유신이라는 폭압과 독재 속에 유지된 70년대.


그 억압성은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낳았습니다.


이 비극적 체험은 이후 문학적 상상력이나 정신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80년대 문학은 광주를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80년대는 진보적인 역사관이 유례없이 목청을 돋운 시기였고


그 80년대를 휩쓴 진보의 열기에서 한발 비켜서 문학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작가가 이문열이죠.


소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개인의 삶을 제재로 취하더라도 역사적 환경과 동떨어져서 묘사될 수는 없고

순수한 문학을 하더라도 작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났느냐 아니면 간접적이고 예술적으로 육화되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한국문학사에서 [참여]라는 말은 지난 1960년대 후반 이래 이 나라의 지성을 아우르는 단어로 집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학의 예술적 완성과 사회적 정의실현을 혼동케 하기도 하고


작가에게 예술가이기 이전에 앞서 혁명가이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문열은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던 그 해에 중편 들소를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전부터 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섬세한 자의식을 가지고


그 자율성과 존재방식에 대한 탐구,확인작업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는 크고 작은 정치적 사회적 사건의 연쇄적 발생에 따라


소설에서의 예술가에 대한 본격적인 형상화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우리 정신사의 흐름은 주로 개인적인 자아보다는 사회적 집단적 자아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억압이 절정에 달한 80년대에 들어서기 직전


이문열은 '들소'를 통해 예술가로서 새로운 생활 형식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1979년에 발표한 들소는 신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현대권력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권력과 예술의 관계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를 '뱀눈'과 세명의 사제자(예술가)를 통해 살펴보고 있는 소설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권력과 사유재산이 생기면서 계급이 나누어지고 생활과 예술이 조화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 대처하는 예술가들의 방식이 세 가지 모습으로 대비되어 나타나죠.


주인공 '그'는 생활과 예술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공간을 찾아 떠나는 선택을 합니다.



==============================================================================================================



들소의 시대적 배경은 원시시대입니다.


집단으로 사냥을 하고 고기 한 조각도 공동소유이며


생활의 중심은 [한 마리만 해도 온 혈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식량원인 동시에


힘과 용기를 시험하기에 가장 알맞은 맹수]
인 들소 사냥으로 압축됩니다.


사냥에 능숙한 사내는 혈족의 영웅이나 전사로 낙점받지만


주인공은 거친 사냥과 전쟁연습에 몰두하는 다른 또래들과는 달리 생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합니다.


주인공은 사냥터에서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사냥감들을 의도적으로 놓아주거나 차마 죽이지 못하는 연약한 성격입니다.


결국 들소 사냥을 통해 각자의 이름이 붙여지는 성인식에서 사냥에 실패하여 낙오된 사람들이 가는 동굴로 보내져서


창과 화살을 다듬고 거기에 혈족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기거나 장식을 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실용적인 목적)


그곳은 단순하고 공식화된 무늬와 변화없는 기법의 반복으로 어떠한 상상력도 발휘할 수 없는 공간이었으나


주인공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그림에 대한 질서와 규율에 순종하지 않고 자율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선생의 질책과 폭력뿐이었고 이에 생활과 예술에 대한 분열을 자각하게 됩니다.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세계를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해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혈족의 지도자 '위대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제자'가 되어 한결 나은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수 있게 되었으나


주인공의 성년식 동기인 '뱀눈'이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며 혈족사회 권력판도는 지각변동을 일으킵니다.


'뱀눈'은 사제자인 주인공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혈족들에게 주입시키는데 협조해 주기를 요청하고


주인공은 그 제안을 별다른 경계 없이 받아들입니다.


'뱀눈'이 이끄는 혈족은 '위대한 어머니'가 추구하던 평화로운 원시집단의 모습을 떠나


사유재산으로 인해 공동의 행복을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얘기꾼' 이라는 인물이 '뱀눈'에 의해 또 한 명의 사제자로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권력에 봉사하는 종속적 가치로서의 예술가의 표상입니다.


그에게서 주목할 사실은 예술이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정신생활의 일면을 담당하고


현실이나 관념을 감성적으로 표상하고 전달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권력자에 의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뱀눈과의 결탁을 수용하지 않는 '큰목소리'라는 사제자가 있는데 그는 뱀눈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큰목소리'는 예술이 특정 조직의 이익에 봉사해서는 안되고 모든 혈족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예술의 발생 단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공리적,효용론적 예술관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큰목소리'의 시각 역시 예술을 정치적 이용물로(좋게 쓰인다 하더라도) 여기기는 마찬가지라고 보고 호감을 갖지 못합니다.


평론가들은 이 부분이 작가 이문열의 세계관을 보수주의와 연루시켜 버린다고 보고 있습니다.


들소의 주인공은 '뱀눈'에게서도 떠나가지만 혈족 전체를 위해 싸우는 '큰목소리'의 저항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진정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현존 질서에 대한 승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큰목소리'가 뱀눈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시간이 지난 후 뒤늦게 '큰목소리'의 치열한 저항정신을 이해한 주인공은


혈족들을 다시 일깨워 보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뱀눈'체제에 길들여진 뒤였습니다.
(최근 몇년 전부터 자주 거론되는 '국개론'이나 '한나라당 콘크리트 지지층'과 비슷하려나요?)


이장면은 이문열이 전제권력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권력앞에 쉽게 야합하는 민중의 속성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전제권력에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에서 진보세력에게 지적당하는 부분입니다.
(전제권력이 잘못한것이 훨씬 크고 많은데 왜 비슷하게, 아니 오히려 민중쪽을 더 강한 강도로 비판하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큰목소리'의 마지막 절규 - 뱀눈의 패거리가 아무리 강하게 보일지라도 당신들의 동의 위에 서 있지 않는 한


그들의 검(劍)은 반 토막에 불과하며 나머지 반 토막은 언제나 당신들 손에 있다 - 는 말에서 보여지듯


권력은 민중의 동의에 의해서만 성립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


결코 민중에 대한 불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만.. 이후 이문열의 행보를 보면 설득력이 없군요...-_-

최소한 '들소' 라는 소설만 놓고 본다면 인간 이문열에 대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내용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꾼'처럼 권력에 아부하는 예술


'큰목소리'처럼 전제권력에 대항하고 전 공동체의 질서에 봉사하며 효용성을 긍정하는 예술


주인공은 그 두가지 모두를 떠나 '그림 자체'로서 예술적 자의식을 통해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외된 생활을 선택합니다. '그림을 위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죠.


들소에 등장하는 이처럼 다양한 예술가들의 형상들은


80년대 시대적 분위기에 좌우되어 문학에 획일적인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으며


'참여'를 강요하지 말라는 항의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문열의 후기 작품들을 보면 그가 선택한 길은 '들소'의 주인공이 아닌 '얘기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 정치나 예술 문제와는 별개로 제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주인공의 꿈과 사랑 이야기였는데요,


일단 위에도 적었듯

주인공이 어렸을때 다른 아이들은 사냥연습을 하는데 주인공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소녀 '초원의 꽃'(사람 이름)은 사냥연습하는 소년들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주인공이 조개 껍데기 같은 것에 그림을 새겨서 선물도 하고 어쩔때는 좀 친해지는거 같기도 했는데

결국 초원의 꽃은 다른 남자아이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여자들한테 별로 인기가 없는가 합니다 .. 요새식으로 좀 덕후? 킄.. 그런 이미지랄까요.

하지만 주인공을 좋아하는 '산나리'라는 여자애도 있었는데

주인공은 '산나리'가 짜증납니다.  맨날 그림 그려달라고 졸라대요.

그런데 남자의 욕망은 어쩔수 없어서인지 쌓인 성욕을 참기 어려울때면 '산나리'와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주인공 또래중에 '뱀눈' 이라고 힘은 별로 안센데 머리를 잘 굴려서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뱀눈'은 혈족의 최고 지위자에 오릅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숲에서 '뱀눈'이랑 '초원의 꽃'이랑 동침중인것을 옅보게 되어서 눈이 뒤집혀 뱀눈을 죽이려다가

'산나리'가 말립니다.

주인공은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워가지만 부족에서는 당연히 인정을 못받고 매우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점차 세월이 흘러 '뱀눈' 이 그 부족의 지도자가 되고 '초원의 꽃'도 뱀눈과 결혼합니다.

'뱀눈'은 주인공의 그림실력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해 월급을 많이 주고 주인공을 고용합니다.

서비스로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초원의 꽃'을 하루밤 대여(?)해 줍니다 ㅡ,.ㅡ

또 어찌어찌 세월이 흘러가서

'뱀눈'이 다른 부족하고 전쟁을 했는데 패해서 항복을 하고 그 대가로 '초원의 꽃'을 상대방 지도자에게 바칩니다.

주인공은 '초원의 꽃'이 떠나는날 그녀의 화장을 해줍니다.

'초원이 꽃'이 전혀 슬픈 표정이 아니고 오히려 즐거워하는것 같아서 주인공은 화를 냅니다.

그대는 다른나라로 팔려가는데 아무렇치도 않소? 발정난 암캐처럼 아무나 남편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거요?

'초원의 꽃'이 이야기합니다...

바보야 사람사는거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봤자 다 똑같애 각자 자기 소를 쫒는거야

'뱀눈'은 권력이라는 소 '뱀눈'의 부하들은 '뱀눈'이 나눠주는 부귀영화 같은식으로

내가 쫓는 소는 '풍요와 안락' 이야 지금 내가 가게 될 부족의 지도자는 나한테 그걸 줄수 있어...

그렇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초원의 꽃'은 갑자기 애정어린 눈으로 주인공을 보며 말합니다...

그리고...

너처럼 어떤 소를 쫓는지 알 수 없는 애도 있지...너의 소는 분명 '뱀눈'이 주는 월급은 아닐거야...

너, 니가 나 좋아하는거 내가 모르는줄 알지?

나도 니가 조개에 그림같은거 그려서 목걸이 만들어 주고 그럴때 감동했었거든?

니가 쫓는소.. 멋있어..  나도 먹고 사는게 이렇게 힘든게 아니면 너랑 같이 그소를 쫓고 싶어 ㅠㅠ

하지만 너의 소는 현실에서는 절대 잡을수 없다는걸 알자나 ㅠㅠ 가엾은 너...

============================================================================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 제가 들소를 읽으면서 가장 전율적으로 감동했던 부분입니다...

사회적응 못하고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던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여자가

사실은 주인공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의 꿈을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했지만...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저를 감동시켰던 것이

주인공이 '아 그래 이제 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자' 하고 마음먹고 그림 그릴 도구를 챙겨서 어디론가 떠나는데

주인공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산나리' 가 따라와서 어디가? 하고 물어봐서 주인공이 '소 잡으러 간다' 했더니

'산나리'는 그 '소 잡으러 간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텐데도

모든것을 다 알고 있다는듯이

그래! 너는 할수 있어! 그리고 니가 잡은 그 소는 내 소나 마찬가지아 난 너의 여자니까!

라고 말하는것이 아닙니까...

'초원의 꽃'이 현실적으로 불가 하다고, 아름답지만 결국 세상사는덴 쓸모없는거라고 했던 그 꿈

그저 아름다움을 인정받았다는것으로만도 감동의 눈물을 훌렸던 그 꿈에 대해

'산나리'는 무한한 믿음과 성원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죠...

사실 계급의 발생이나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 뭐 기타등등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한 소설인데

제 개인적 감상은 이처럼 두 여자 등장인물과의 사랑관계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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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7 01:20
수정 아이콘
이런 댓글은 원래 첫플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소설이 끝난 시점 뒤에 주인공과 산나리는 들소 사냥이 불가능한 커플이니까 산나리가 채집하는 딸기로 연명하다가 머지 않아 굶어죽었겠군요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예술가가 아무리 예술을 위한 예술이네 뭐네 해도 다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재화를 사용하는 이상 너무 고고한 척 하면 곤란하다는 얘기였습니다)
yangjyess
13/12/17 01:37
수정 아이콘
네 바로 그 부분을 소설 속에서 '큰 목소리' 가 지적합니다 ''나의 목소리가 노래 부르기 위한 노래에만 바쳐질 수 없듯이 너의 선과 색도 그림 그리기 위한 그림에만 바쳐질 수는 없어. 이 모두는 동료인 인간들을 향한 거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서 멀어져가면 이미 아무런 가치가 없어. 아니 그 이상 - 그것은 배반이야. 우리가 창 자루를 잡거나 숲을 달리며 땀 흘리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에게 매일의 고기와 낟알을 보내오는 것은 분명 그런 의무와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 너의 선과 색은 절대로 너만의 것일 수가 없어..." 라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들소 주인공의 그림 그리는 삶은 고고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궁상떨고 있어서... 마지막에 산나리를 두고 떠나면서 역시 산나리와 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예상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구요... 예술가의 길을 택하려면 어느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은 각오해야 한다.. 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듯? 하네요...흐
Go2Universe
13/12/17 01:50
수정 아이콘
고고한척하니까 훌륭한거 만들어내는 거라 봅니다.
곤란한게 아니라 필요한거죠. 그 고고함은요.
13/12/17 01:54
수정 아이콘
저야 뭐 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이니 주인공에 대해서 상세한 비평은 불가능합니다.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의 고고함이 필요한 것도 잘 이해하고 있고요. 하지만 본인도 인간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도는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즉 일정한 선이 있지 않겠냐는 정도의 이야기였습니다.
13/12/17 03:39
수정 아이콘
뭐, 헌데 그렇지 않으면 굳이 예술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고고한 척이 아니면 예술일 이유가 없다는 게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을 때, 소설의 방점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있다면 그건 굳이 소설일 이유가 없어지죠. 물론 방점이 후자에 있으면서도 위대한 소설들은 있습니다만(카프카라던지 카프카라던지...), 그건 솔직히 굳이 소설로 안 써도 위대할만한 사유가 기반이 있으니 그런 거고...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소설들은 아무래도 전자에 방점을 찍어야 스스로가 소설인 이유를 증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도리어 지나치게 후자에 방점을 맞추는 때 문제가 나타나지 않나 싶습니다. 당장 국내 문단을 봐도 그렇구요. 문단에 이야기꾼이 많지 않고, 사장(김훈)과 형식(이인화)의 미감을 따질 줄 아는 이들도 몇 없죠. 주제가 내포하는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골몰하는 건 좋은데 그것만 있다면 왜 굳이 소설이어야 하냔 의문에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주제의식이 제대로 잘 쓰여진 인문학적 저술로 옮겨 쓴다고 해도 그만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라면 아무래도 아니올시다구요.
13/12/17 04:04
수정 아이콘
그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사실 저는 예술을 보거나 듣는 능력이 0 에 수렴하는 인간인지라, 철학책을 보면 오오오! 를 연발하면서도 문학이나 미술 작품등을 볼 때에는 그야말로 멍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후자쪽에 집중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영원한초보
13/12/17 01:44
수정 아이콘
이거 읽어봐야 겠네요. 지금 이문열은 저 작품 어떻게 비평할지 궁금하네요
Go2Universe
13/12/17 01:50
수정 아이콘
만나뵌적 있는데 이것과는 좀 다른 소설이지만 제가 가장 아끼는 그의 소설인 '금시조'이야기를 하니
머쓱해하며 말을 돌리시더군요.
뭐 그렇다구요.

들소 만큼이나 전 금시조를 추천합니다.
이 소설 역시 예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12/17 02:57
수정 아이콘
해방 이후 소설가 중 이문열이 가장 위대한 재능인 까닭은 [황제를 위하여]에서 나타나듯, 너무나도 정치적인 한국의 근현대사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이를 모두의 희극으로서 승화시키는 예술적인 역량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카테고리에 놓일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이나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등과 비교해도 충분히 자기만의 영역에서 빛을 발하죠(물론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무리입니다. 루시디는 존재가 불가해한 괴물이니까요...ㅠㅠ). 특히 연의와 소설의 톤을 혼용한 전후반부 구성의 경우 후자와 같이 서사, 주제와 호응하여 진한 형식적 쾌감을 전해올뿐더러, 실록의 한문투를 옮겨놓은 듯한 문체의 외피를 둘러 이를 한층 심화합니다. 그야말로 이 땅의 역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주제의식을, 이 땅의 역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서사에 담아, 이 땅의 역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내는데...... 내 모국어에 감사하게 되는 기쁨을 던져주죠. 이런 작가 또 없습니다.

그러나 이문열이 그 위대한 재능만큼이나 안타까운 까닭은, 그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러한 재능에 걸맞는 작품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에 있지요. 물론 황제를 위하여만으로도 국문학도 입장이라면 더없는 축복입니다만...
뜨와에므와
13/12/17 03:03
수정 아이콘
밀레니엄때 어떤 소설집에 낸 소설 보고

아...이 사람은 문학적으로 이제 맛이 갔구나...생각했네요.

뭐 그 전에도 우상의 눈물 열화카피 같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때문에 별로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과대평가 갑류라고 생각...
13/12/17 03:05
수정 아이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우상의 눈물이 열화카피라니, 문학적인 '열화'의 잣대가 무엇인지 묻고 싶어지는 댓글이로군요. 이야기꾼으로서의 탁월한 재능 하나만으로도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게 이문열입니다.
뜨와에므와
13/12/17 03:07
수정 아이콘
정신은 빼고 소재만 살려서 글빨세운 느낌이었거든요.
13/12/17 03:12
수정 아이콘
'소재만 살려서 글빨 세우는' 걸 논외로 하고 소설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말이지요. 그 '정신'만을 세우려고 한다면 살만 루시디는 마르케즈의 아류일 것이며(아마 마르케즈 당사자조차 [한밤의 아이들]을 보고 그리 말할 순 없을텐데 말입니다.), 카프카 이후 수많은 소설가들이 쓰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붙일 말이 없어질 겁니다. 주제가 함의하는 윤리적 물음을 극단적인 사장과 형식적 쾌감에 기대어 표현하는 레이먼드 카버나 이언 매큐언의 앞에서, 그러한 자극적 소재에 대한 물음이 학적 사유에선 이미 예저녁에 다룰만큼 다뤄서 국물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니 입 다물라고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저 신경쓰여요
13/12/17 03:06
수정 아이콘
참 대단한 이야기꾼인데, 이야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이고... 여러 모로 아쉽습니다. 진짜 대단한데, 좋아할 수는 없는...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 속의 얘기꾼이 돼버렸어요
저 신경쓰여요
13/12/17 03:12
수정 아이콘
참,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이문열도 대단한데, 이런 소개글을 쓸 수 있는 yangjyess님도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잘 읽히고 사고의 흐름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쓰신 분의 감상이 잘 드러나는 소개글도 인터넷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것 같거든요. 결코 현학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이요. 글 잘 봤어요.
사랑한순간의Fire
13/12/17 07:36
수정 아이콘
대단한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장자리
13/12/17 08:52
수정 아이콘
이문열... 문장도 아름답고 얘기도 재미있는데....
기승전 패배주의가 참 거시기했던 기억이...
사랑한순간의Fire
13/12/17 09:36
수정 아이콘
기승전 패배주의야 뭐... 한국 문단에서 워낙 자주 보이니까요. 그게 현실이기도 하고...
happyend
13/12/17 09:35
수정 아이콘
대학교 2학년때인가쯤에 이소설 읽고 혼자 멍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13/12/17 10:04
수정 아이콘
참 글 잘 쓰는 분인데 요즘 보면 그 정치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과소평가되는게 아닌가 싶네요.
서정주 같은 극단적인 기회주의자도 아니고, 그저 우익 보수주의자일 뿐인데, 지나치게 비하되는 인상도 있구요.
13/12/17 10:21
수정 아이콘
저도 들소를 참 감명깊게 읽었는데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또 계셨네요 크크
언제 들소에 대해 글을 써봐야 겠습니다
애패는 엄마
13/12/17 18:50
수정 아이콘
그 비난이 진영 논리가 전혀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발언과 행태에서는 그저 우익 보수주의자라고 말하긴 굉장히 어렵죠. 쿠테타 재판에 대한 발언이나 홍위병 발언 사건때 진실을 호도한 측면이나 과한 적개심같은 건 역사상 손꼽히는 소설가가 될지어도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굉장히 회의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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