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먼저 관련글 댓글화 규정에 어긋날지에 대한 이야기를 운영진 중 한 분에게 쪽지로 물어봤습니다. 가급적 댓글화를 해 주셨으면 한다는 답장을 받았구요. 다만 관련 글이 적어진 상태라면 새로 글을 적어도 괜찮으며, 따라서 기준은 모호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보에 대한 이야기도 좋습니다만, 제 자보는 다분히 원론적인 이야기고, 더구나 하필 제가 자보를 쓸 때는 뭔가 끓어오르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 글 쓰다 보면 아시잖습니까 - 뭐랄까, 좀 맥이 빠진 듯한 글이 되어버렸죠. 어쨌든 자보를 썼습니다. 썼는데.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보에 대한 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게 제가 가급적 댓글화를 해 주셨으면 한다는 쪽지를 받고서도 굳이 새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자보 전문은 글 마지막에 첨부하겠습니다.
저는 포항공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화학과 대학원 재학중이죠. 곧 있으면 3학기가 끝납니다. 11월 한 달을 철저하게 멘탈이 박살난 상태로 - 대부분은 그 중독법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준 격이라고 해야 하나, 용기있는 한 분이 자보를 써서 붙이셨더군요. 그 용기, 참으로 놀랍고 또 존경스러웠죠.
저 역시 같은 학번이고, 저 또한 같은 학생이기에, 저도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자보를 어떻게 쓸까, 어디에 붙일까, 여기 붙일 만한 데가 있나. 근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드는 거에요. 여기는...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
초대 김호길 총장님의 의견이었던 걸로 압니다. 면밀하게 관련 규정을 찾아본 결과, 포항공대 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교내에서 정치활동을 할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근신, 정학, 퇴학 등의 징계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카이스트가 부럽더군요. 저들은 저렇게 자보도 쓰고 반박자보도 올라오고 하는데 나는 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걸까. 그토록 내가 목소리를 내는 게 겁이 났던 걸까.
징계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징계를 받은 학생은 다음 학기 또는 그 이상 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상당히 괴로운 조항이 끼어 있기 때문이죠. 학비... 의외로 비싸더군요. 기숙사비까지 포함해서 한 학기에 450만원 가까이 냅니다. 장학금 명목으로 교수님께 돈을 받아 - 물론 받을 때마다 주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하고 자동으로 기도하게 됩니다만 - 생활비에 보태고 남는 돈 저금하고 서울에도 가끔 갔다오고 했던 그 모든 걸 날리는 게 솔직히 겁났습니다. 부모님 얼굴 보기 참 괴로울 것 같았습니다. 두 분 모두 민주당을 지지하고 계시는 분이지만 저에게는 가급적 정치 활동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어렸을 때 많이 날리시던 분이라...
그래서 제가 선택한 건 우회루트였습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졸업생 명의로 내자. 그래서 연대에 다니는, 그리고 앞서 자보를 썼던 제 학우 한 명에게 부탁해서 게시했습니다. 물론 내용은 제가 이메일로 먼저 보냈구요.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가 직접 게시한 자보가 아닙니다. 제 손으로 붙인 자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붙인 자보입니다. 그건 제 자보일까요? 진정으로 제가 쓴 자보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제 이름이 들어가고 제 명의로 쓴 자보이지만 꼼수를 써서 붙인 건 아닐까요?
서울 올라가서 직접 제가 붙일 수 있었으면 베스트였겠죠. 하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올라가는 데 돈을 내고자 하루에 한 끼, 아니 요즘은 이틀에 한 끼로 버텨 가면서(그래서 학교 근처 인재개발원 같은 곳을 애용합니다. 한 번에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돈을 모아도 남는 게 별로 없는데, 한 번 왔다갔다할 때마다 물경 10만원이 족히 들어가는(교통카드 충전해야죠, 왕복에 무궁화호 같은 걸 타도 6만원은 깨지죠, 밥은 또 공짜인가요...) 그런 상황이라, 제가 직접 게시하기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대리로 게시를 했습니다. 그건 제 자보인 걸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 자보를 붙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어쨌든 자보는 붙었습니다. 친구 말로는 학관 정면에, 백양로 한복판에 붙였다고 하더군요. 명당이 따로 없습니다만, 저는 솔직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당당하게 징계를 받고 포항공대 재학생의 명의로 포항공대 내에 붙이고 징계를 받는 게 옳았을까요? 분명히 저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이고, 따라서 '내용상으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행동은... 잘 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열에 같이 참여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이 제 입장이라면, 또 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선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비판도, 그게 저에게 용감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되더라도, 달게 받고자 합니다.
저는 정당했을까요?
PS. 이하, 자보 전문입니다.
들어가면서
날씨가 참 추운 요즘입니다. 기말고사를 앞둔 학우들도 계실 것이고 한 학기를 다 끝마치고 일 년을 마무리하는 학우들도 계실 겁니다. 그래, 그간 다들 안녕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운 바람에 건강들 하신지, 학업에 스트레스를 많이들 받고 계실 텐데 다들 안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근 며칠간 참으로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국에서 수많은 학우들께서 대자보를 써붙이고 또 다같이 공감하는 놀라운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간 얼마나 속으로 화를 참아왔던 나날들이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간 얼마나 사회에 분노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간 두려움에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 불이익을 받을지 몰라서, 누군가는 가족들의 눈이 무서워서, 또 누군가는 토론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 두려움에 말을 못 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안녕하지 못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간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또 지우고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선동으로 여기지나 않을까,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종북주의자로 몰아가고 비난하지나 않을까 해서 얼마나 많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인 일로 올해 초에 모욕을 당한 후에야 제 목소리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롱받는다면 차라리 할 말은 다 하자는 마인드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슬픈 세상입니까? 이렇게 모욕을 받아야만 목소리를 내는, 그나마도 누군가가 용기를 발휘해서 낸 목소리를 손쉽게 짓밟아 버리는 세상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세상입니까? 얼마나 자기 검열을 하고 또 해야 하는 세상입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자기가 받을 불이익을, 심적인 부담을,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 현안을 보고 자기 의견조차 제대로 못 내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걸까요?
파업에 관련하여
어려서부터 열차를 타는 것을 좋아해 왔고, 철도와 관련된 자료에 매우 관심이 많아 여러 관련 자료 및 위성 사진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결과를 공유하는 데 몰두했고, 또 어딘가로 멀리 이동할 때는 반드시 열차를 타 왔던 사람으로써, 이번 코레일의 파업은 저에게는 또 다른 걱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당장 12월 26일 되면 포항으로 내려갑니다. 학기도 끝나고 간만에 눈요기 여행이나 할까 하여 서울역에서 오전 7시 45분에 출발해서 오후 3시쯤 되어야 제천역으로 돌아오는 O-train 열차표를 구입했고, 거기서 내리자마자 바로 포항으로 내려가도록 그렇게 동선을 짰습니다. 그런데 파업 소식이 들려왔고, 자칫 잘못하면 저는 서울에 발이 묶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드리건대, 때때로 파업이 빨리 끝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번 파업을 지지하는 이유는, 저는 이번 코레일의 파업은 정부에서 민영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시민들의 발을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업에 참여하고 계시는 여러 직원분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역대 최장기간의 파업이 될 것은 자명하며, 정당한 파업을 불법으로 취급하고, 또 완전히 불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정부와 회사 측의 모습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또 다른 자보를 통해 설명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목소리를 내는 이유
우리는 왜 목소리를 내는 걸까요? 읽은 지 워낙 오래 된 소설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납니다만 대략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먼 훗날의 역사는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 역사책에 쓰여질 한 획을 긋고자 우리는 목소리를 내는 것일 겁니다. 그 역사책을 읽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지금보다 좀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하고자 우리는 그렇게 한 획을 긋고자 많은 시도를 하는 것일 겁니다. 어쩌면 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간략하게 서술된 한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잉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으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을 감내해 가면서 말입니다.
졸업한 지 조금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연세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6월 10일경에는 항상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피를 흘리는 현수막이 중앙도서관에 크게 걸리고는 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가 과연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목소리를 냈던 걸까요? 이한열 열사라고 학점이나 살림 같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까요? 이한열 열사가 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목소리를 냈던 것은, 그 역시 그 시대를 살아갈 때 그 시대에 안녕하지 못했던 한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지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결코 특별히 사회의 주목을 받고자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이 학업을 어려워하고, 똑같이 취업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오늘은 어디서 밥을 먹을까, 누구와 함께 밥을 먹을까, 기말고사 기간이 언제더라, 내일까지 조별모임이 있는데, 모레까지 실험 레포트 제출해야 하는데 등등 수많은 고민을 오늘도 감내하고 이겨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나누고자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힘들고 어려운 학업 생활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 크게는 여러 가지 일로 어려운 현안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한때는 그렇게 여겼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내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침묵하자니,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드리건대 도저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니 세상은 제가 원했던 방향인 소통과 화합이 공존하는 세상이 아니라 불통과 분열만이 남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비록 제 한 목소리는 작을지 모르나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면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러 학우 여러분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와는 또 다른 이유로 목소리를 내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거기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우리, 같이 앞으로 나아갈까요
꼭 제 생각에 동의하셔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마다 여러 생각이 있고, 또 그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어느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어느 생각이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자보를 보고 계시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보를 통해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꼭 저와 같은 방향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꼭 저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외부의 압력 때문에 표출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 하나하나를, 물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사회에, 세상에 표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자보를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바라는 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때로는 인터넷을 통해, 때로는 오프라인에서 비난하고 싸우고 조롱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의견과 반대된다고 무조건 꼴통이다 종북이다 하고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 또 자신의 의견과 반대한다고 무조건 귀를 막는 불통의 모습을 보이는 사회를 저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고 또 서로가 왜 그런 주장을 펼치는지를 받아들이는, 그런 포용력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아니, 아주 조금이나마 기여해 보고자 저는 이렇게 자보를 쓰게 되었습니다.
두서없는 자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께 이 자보를 바치고자 합니다.
Geo&III 그리고 화학과 08학번, 은빛
(아, 오해하실 것 같아서 덧붙이는데, 이 이름, 실명이에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