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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29 21:19:58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낙동강 - 6. 다부동으로
낙동강으로 후퇴할 당시 대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수도이자 미 8군 사령부로 있던 곳이니까요. 더 이상의 후퇴는 정말 나라를 포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여기까지 온 피난민들에게 정부가 항구도시인 부산으로 간다는 것의 의미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맥아더는 8군 사령부는 땅에 있어야 된다고 하며 철수를 막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줬으면 줬지 대구에서 떠나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에 뭐 전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는 그냥 조선시대 왕들이 "다 과인의 잘못이오" 어쩌고 수준으로 이해합시다. -_-a
문제는 대구가 낙동강과 너무 가까웠다는 것이죠. 명확히 나와 있는 건 없지만 여기서 좀 무리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군은 처음에 대구 방어를 위해 25사단과 1 기병사단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적 6사단의 우회기동 때문에 25사단을 빼야 했죠. 1 기병사단은 왜관-현풍까지 35km 방면을 맡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국군이 맡기로 한 Y선까지 40km나 되는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긴 지역을 맡아줄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워커 중장은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단을 왜관 북쪽에 배치해 줄 것"을 주문합니다. 정일권의 선택은 1사단이었고 워커는 그에 만족합니다.
이 때 잘 싸운 걸로 유명한 6사단이 있었는데 왜 1사단이 맡게 되었느냐는 건 딱히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역시 타이밍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미군이 국군의 전과를 무시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따지고보면 제일 무시당한 게 6사단의 전과입니다. 물론 중부 전선을 거의 혼자 맡듯이 한만큼 아예 인정을 못 받은 건 아니었지만 6사단에서 한 게 전황 자체를 바꿀 정도였다는 게 밝혀진 게 소련이 붕괴한 이후였죠.
거기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기 전 6사단은 적의 맹공에 위험에 처해 있었고 이걸 구원해 준 것이 1사단이었습니다. 타이밍이 참 좋았죠. 뭐 그렇다고 1사단이 못 싸운 것도 아니었고, 제일 좋은 부대로 인정 받아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된 것이 그저 좋다고만 할 수도 없기도 합니다. (...); 여기에 미군과의 합동작전 때 6사단이 아무 말 없이 후퇴해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본 기억이 있는데 이게 어느 쯤인지 찾을 수가 없네요. 이게 맞다면 미군이 6사단을 배제할 만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수도사단도 잘 싸우긴 했지만 미군이 설마 김석원을 인정하겠어요. -_-;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할 때 백선엽 사단장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합니다. (이 때 김종오 대령 역시 준장으로 승진했죠) 1사단은 한강에서 경상도로 후퇴할 때는 뒷처리나 맡는 정도였지만 그 이후에는 6사단을 구원하고 미군과의 합동작전을 성공하면서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맨 처음 싸웠던 북한군 1사단이 대전으로의 진격 대신 중부 전선으로의 진격을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 등 1사단이 적에게 끼친 피해 역시 결코 적지 않았죠.
덕분에 1사단은 42km에 이르는 넓은 전선을 맡게 됩니다. 국군 중에는 유일하게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만큼 마냥 불리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길었죠. 독박이라고 해야 될까요 -_-a 그래도 이 때 곳곳에서 병력을 받으면서 7천명으로 그나마 제대로 된 사단 편제를 갖추게 됩니다. 이 때 임진강에서 헤어져 계속 소식이 끊겼던 12연대 병력 800여명이 합류한 것도 참 가슴이 찡해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의 소속 부대로 돌아온 것이니까요.
+) 참고로 미군이 맡은 지역은 가장 넓었던 게 35km이고 국군의 경우 26km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될 당시 1사단은 11, 12, 15연대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원래는 13연대가 있어야 했는데 5사단에서 1사단으로 배속된 15연대가 병력이 더 많아서 15연대로 바뀌었다고 하죠. 연대장은 각기 김동빈 대령, 김점곤 중령, 최영희 대령이었습니다. 여기에 17포병대대와 공병대대가 포함됐죠. 각 연대의 병력은 약 2300명 정도였습니다.
1사단의 좌측에는 미 1 기병사단이 있었습니다. 우측에는 국군 6사단이 있었죠. 대구 방어를 위해 투입된 아군은 3개 사단, 북한군은 여기에 5사단을 투입합니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최소한 대구라도 점령해야 된다는 계산이었죠.
그리고 이 5개 사단 중 최소 3개, 최대 4개 사단이 1사단 정면에 투입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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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숫자놀음을 그냥 미리 해 두겠습니다. 나중에 얼마가 여기 쳐들어왔다 이렇게 말 하긴 좀 그러니까요. 이 전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11연대 2300여명 + 10연대 2개 대대 1500여명 + 5연대 2대대 600여명 + 미 27연대 2300여명 전차 20대 vs 13사단 1만 3천여명, 1사단 5천여명
12연대 2천여명 + 10연대 1개 대대 500여명 vs 15사단 5천여명
15연대 2천여명 vs 3사단 6천여명
이들이 모두 한번에 동원된 건 아닙니다. 국군의 경우 증원된 10연대나 5연대는 20일 이후 다부동의 위험이 일단락된 후 왔고 미군이 더 빨리 왔죠. 북한군도 1사단은 처음에 6사단을 공격하다가 13사단에 병력을 증원해 준 것이었구요.
대략 한 개 연대에 적 한 개 사단이 왔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전선의 경우 피아의 차가 그리 크지 않거나 오히려 아군이 많았는데 말이죠. 여기에 병력을 한 번에 만 명씩 증원해서 수로 밀어붙이면 되지 않겠나 싶은데 그건 안 되죠. 한 개 사단 규모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괜히 병력을 잔뜩 줘 봤자 이들을 이끌 장교가 부족한 이상 개죽음만 시킬 뿐이었습니다. 부족한 병력을 채워주는 수준이었던 거죠. 근데 그게 좀... 많군요. 다부동 전투 후에는 신병을 계속 받아 1만명 정도에 이르긴 합니다.
1사단은 그 때 국군 중에선 가장 많은 병력(정원의 70% 정도 -_-a)을 받고 신병을 지원받을 때도 최우선이었으며, 국군 중에서는 UN 공군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따로 놀긴 했지만 미군과 정식으로 합동 작전을 하기도 했구요.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던만큼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거죠. 그 대가로 1사단은 아군 중 가장 넓은 지역과 가장 많은 적을 맡게 됩니다.
전투의 시작은 8월 4일, 적이 낙동강을 건너면서부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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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3개로 나눌 수 있는 다부동 전투의 전선들이 다 섞여 있는데다 군대 경험이 없는 분들은 읽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맨 처음에 1사단의 방어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볼 수 있네요.
대구 공격을 위해 투입된 북한군은 1, 3, 10, 13, 15 5개 사단이었습니다. 이들 중 1사단은 처음에는 6사단을 공격하다가 병력을 나눠 국군 1사단을 공격했고, 3사단은 미 1 기병사단을 공격하다가 다부동 전투가 절정에 이를 때 투입됩니다.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죠. 공산군의 교리는 이렇게 돌파구를 만들면 그 곳에 투입할 수 있는 모든 걸 투입해 최대한 깊숙히 뚫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동해안과 영산의 낙동강 돌출부에서도 나타나죠. 이렇게 소련군 교리를 따라하는 게 북한군의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했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이렇게 북한군이 투입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투입됐고, 아군에 의해 돌파구를 뚫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곧 돌파에 성공한 곳으로 병력을 돌리니 이게 영천 전투였습니다. 지금 볼 것은 다부동 전투네요.
미 공군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냥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비교는 해 볼 만 합니다. 적과 국군 1사단은 화력으로 비교하면 10:1 수준이었습니다. 다부동 공격에는 105 전차사단이 끼어 있었고 (이렇게 보면 1:4 내지 1:5입니다) 각종 대포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1사단에 포병대가 소속되긴 했지만 이 차이를 막을 수 없었고, 믿을 건 UN 공군 뿐이었죠.
덤으로 한창 장마철인데도 30년만의 가뭄으로 낙동강 곳곳에서 그냥 강을 건널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강을 방어선으로 하는 의미가 없어질 지경이었죠.
1사단은 남쪽부터 북쪽까지 각기 15, 11, 12연대를 배치합니다. 이러면서 낙동강 방면에서의 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했지만 북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상대하긴 힘들었죠. 동쪽의 6사단과는 4km의 간격이 나와 버립니다.
결국 8월 4일부터 시작된 도하에 북쪽에 배치된 12연대를 후퇴하게 합니다. 12연대는 예비대로 돌려졌고, 적의 공격은 중앙을 맡은 11연대에게로 쏟아졌죠. 다행히 예비대를 둔 효과는 바로 나왔습니다. 11연대의 방어선 한 쪽이 뚫리자마자 12연대를 투입했고 바로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죠.
적의 공격은 8월 9일까지 이어집니다. 이 때 북한군은 야간을 이용해 수중교를 만들어 전차를 도하했는데 미리 준비한 대전차특공대로 9대를 파괴합니다. 날이 밝으면서 UN 공군이 나타나 나머지 전차들을 깨뜨려줬죠.
로켓포라는 말이 어색하면 그냥 저팔계가 쓰는 바주카포 생각합시다
이 때 큰 활약을 했던 것이 바로 3.5인치 로켓포. 백선엽은 이것을 받은 장면을 보면 무슨 최종무기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 미군은 이것을 주며 절대 북한군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죠. 그 위력은 두말할 필요 없었습니다.
"60년 전 제가 낙동강전선 다부동전투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면 젊은이들은 도저히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직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사흘 밤낮 육박전을 벌여 살아남았을 당시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올해 84세가 되시는 참전용사 이기형씨는 이 때 12연대의 일등상사였습니다. 그는 역습 당시 소대장이 전사하면서 임시로 소대장을 맡게 되었고, 10일까지 13번이나 되는 육박전을 치렀다고 합니다.
"적의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길 만큼 땅을 파야 했는데 시체를 앞에 두고 싸워야 했습니다. 여름이어서 하룻밤만 지나면 송장 썩는 냄새가 지독했지만 생사가 오가는 상황이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지요."
12연대가 투입된 곳은 15연대 지역의 369고지, 10일에 12연대는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고, 2000명이나 되는 적을 살상하며 탈환에 성공합니다. 반면 12연대의 피해는 130명 정도로 가벼웠죠. 이 전투에서 그는 후두부에 파편이 다섯 개나 박혀 후방으로 후송됩니다. 이후에는 9사단의 창설멤버로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온갖 훈장을 받았죠. 지금도 파편을 빼지 못 했는지 머리 반쪽을 삭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이름 없는 이 고지는 제가 전투를 치른 곳이라는 생각보다 젊었을 때 산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뒷부분은 어르신들이 늘 그렇듯 요즘 젊은이들은 6.25를 잊고 산다는 부분입니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지겹긴 합니다만... 그 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분들의 마음이 어떤지 이해 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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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도하는 11연대가 맡던 해평동에 집중됩니다. 북한군 13사단은 몰래 도하에 성공한 후 중대 하나가 맡고 있던 71고지를 기습해 점령했고, 아군은 인접 중대와 함께 예비대인 12연대에서 대대 하나를 빼서 막아내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5일에 다시 시작된 공격에 후퇴하게 됩니다. 다시 12연대가 투입돼 탈환했죠. 이 지역이 도하에는 안성맞춤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이 무렵 있었던 대전차공격의 성공에 종군기자들이 찾아왔다가 지뢰를 밟아 모두 순직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북한군 전차의 공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때에 미군도 아닌 국군이 적 전차를 깨뜨렸다는 건 확실히 기사거리가 될 만 했으니까요. 거기다 아무래도 아군 걸 밟은 것 같아서 좀 -_-;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이것이 다부동으로 물러난 후로 돼 있는데 육군의 공식 전사에서는 물러나기 전 11연대 지역에서 있었던 일로 적고 있습니다.
10일, 12연대가 역습에 나설 때 11연대 역시 반격에 나섭니다. 이 때 UN 공군 덕에 전차 4대를 추가로 깨뜨릴 수 있었고 낙동강까지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북한군의 도하는 계속됐고, 위의 369고지를 비롯해 곳곳의 고지가 다시 뺏겼죠.
그 동안 남쪽을 맡은 15연대는 비교적 적은 공격을 받습니다. 여기서도 도하해 온 북한군에 고지를 뺏기긴 했지만 12연대의 증원과 함께 뺏고 뺏기는 전투가 계속됐죠.
이 때도 이미 다부동 전투의 지옥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전선 곳곳에 시체가 쌓여 치우지도 못 한 채 지독한 냄새와도 싸워야 했고, 고지의 주인은 매일마다 바뀌어 갔죠. 그래도 이후의 지옥에 비하면 상황이 나았습니다. 일찌감치 12연대가 있던 지역을 포기했던만큼 주 전장은 11연대가 맡은 해평동 쪽과 15연대가 맡은 369고지 정도였습니다. 아직까지 공격해온 적은 13, 15사단 "정도"였죠.
8월 12일, 유재흥 2군단장은 1사단에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동해안 전선이 위험해지면서 자신이 맡은 1, 6사단 역시 철수하게 한 것이죠. 이에 대한 얘기는 밑에서 다시 하기로 하겠습니다.
8월 4일부터 12일까지의 전투는 3차례로 나눌 수 있는 다부동 전투의 1차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북한군을 사살한 것만 6천이 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너무 과장된 게 아닌가 싶네요. 이건 다부동 전투에서의 사살 수보다 많고, 이 정도 피해라면 북한군이 한 타임 쉬거나 아예 공세를 포기하는 수준까지 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뭐 그래도 적 2개 사단이 증원온 걸 보면 피해가 적진 않았을 것 같긴 합니다만. 거기다 대구가 중요했던만큼 적의 증원도 이 곳에 최대한으로 쏟아집니다. 김일성이 직접 와서 요구했던 8월 15일까지의 대구 점령은 겨우 3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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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백선엽 사단장이 도착한 곳은 다부동이었습니다. 이 다부동 전투에서 특기할 점 중 하나는 한미 연합 작전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미군끼리의 공백은 문제가 아니다. 원활한 의사 소통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Y선에 올라 있는 국군과 국군 사이에도 중대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미군과 한국군이 만나는 협조점에서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왜관 303고지 지역이 북한군이 노리는 최대 약점이다. 그러나 X와 Y선의 꼭지를 잘 이으면 장장 180㎞의 낙동강 방어선이 분명하게 연결된다. 말하자면 한국과 미국의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작업이었다.
한·미 연합작전이라는 말이 요즘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 다부동 전투에 앞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면서 펼친 지연전에서도 드물게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펼친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산발적이면서 분산적인, 경우에 따라 즉흥적으로 펼친 작전이었다. 그러나 다부동 전투를 앞두고 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로 부대를 교환하는 작업의 의미는 중대했다. 한국과 미국이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연합작전의 시작이었다."
현재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미 연합 작전, 하지만 이걸 빠는 쪽이든 까는 쪽이든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미군만 있으면 모든 게 다 잘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연합 작전에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아주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고, 다부동 전투에서 그게 아주 잘 나타납니다. 아무튼 여기서 1개 소대씩을 바꾸면서 연합 작전을 시작하게 됐죠.
다부동多富洞, 말 그대로 부자 마을이 돼라고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백선엽은 직접 가 보니 딱히 부자 동네는 아니라는 감상을 남겼죠 (...) 이 근처의 산성들이 남아 있는데 이걸 쌓은 때가 무려 박혁거세 때라는 전설도 남아 있구요. 그리고 신라가 있을 때, 그 어떤 공격도 막아냈던 곳이라고 하죠.
뭐... 사실 신라가 이 곳까지 뚫렸으면 나라가 망한 거나 다름 없는 거였겠습니다만 -_-a 이건 당시의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http://www.army.mil.kr/history/낙동강방어선작전/주요전투/다부동/지형.html
백선엽은 직접 지역을 정찰한 후 최후의 방어선을 설정합니다. 서쪽의 328고지부터 수암산, 유학산 신주막에 이르는 방어선이었죠. 대구에서 겨우 20km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최후의 방어선이었죠. 백선엽은 이제까지 참모들의 말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직접 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군단장 유재흥이 정한 철수 시간이 도착한 건 8월 11일 18:00, 이 때 나온 철수 시간은 8월 12일 20:00였습니다. 26시간 동안 무사히 철수한 다음 최후 방어선을 점령해야 했죠.
문제는 철수 부대는 곧바로 지정된 곳으로 가는 게 아닌 길을 돌아 다부동으로 간 후 다시 방어선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후퇴시 적이 눈치채는 것과 지형이 험한 것이 거론됩니다만, 시간이 너무 없었죠.
11부연대장 김점곤 중령은 이에 대해 돌아가지 말고 그대로 후퇴할 것을 건의했지만 백선엽은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결국 1사단은 후퇴를 시작한 12일 밤부터 최후 방어선을 점령하는 13일 밤까지 방어선을 무방비로 두게 되었죠. 정찰 병력도 역시 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됐구요.
이후 1사단이 다시 최후방어선으로 향했을 때, 이미 수암산과 유학산에 적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큽니다. 감제 고지였으니까요. 위로 공격하는 것과 아래를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것의 차이였죠. 이 중요한 고지를 전투 한 번 없이 뺏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름 많은 얘기들이 나옵니다. 뭐 그래도 다부동 전투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대 놓고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나오는 건 2군단장 유재흥의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시간을 주지 않았냐는 거죠. 철수 준비 명령 없이 바로 나온 철수 명령이었고, 1사단이 여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유재흥의 입장이 어떤지는 회고록을 봐야겠지만, 이걸 글을 쓰다가 알아버렸네요 orz; 여기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추측을 해보겠습니다.
일단 유재흥은 개전 초 축차 투입 축차 손실의 피해자였습니다. 의정부에서부터 한강 방어선까지 그는 가장 힘든 부분을 맡았고,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죠. 거기다 이제 막 군단장이 된 걸 생각하면 신중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안정적인 걸 원했다는 것이죠. 그에 반해 경험이 짧기에, 혹은 능력이 안 되기에 그 이상을 볼 수 없었다는 측면이 있죠.
사단장 백선엽의 문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았고, 정찰 역시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을 겁니다. 병력이 아무리 부족해도 정찰은 필수니까요.
그 때 1사단의 병력이 부족하긴 했습니다. 1개 연대가 1개 사단의 적을 상대하는 데 따로 병력을 뺄 정신이나 있었을 지 모르겠네요. 거기다 소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봤자 의정부에서, 바로 옆의 동해안 지구에서 겪은 실패를 그대로 겪는 것에 불과했죠. 북한군은 너무 빨리 왔습니다. 이 지역에 침투한 간첩들의 영향이 클 겁니다. 이것까지 생각할 순 없긴 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것 때문에 너무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죠.
육군의 공식 전사에서는 이것을 어쩔 수 없다고 봤는지 크게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반면 육군 대학에서는 장교에게 이것을 교육시켜야 해서 그런지 이 때의 문제점을 아주 강하게 지적하고 있죠. 백선엽의 회고록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뺀 채 철수 과정에서 자다가 철수를 못 할 뻔한 남성인 중위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선엽이 직접 가서 깨워서 같이 탈출했는데 캐나다로 이민 간 후에도 이것을 잊지 않고 연락을 한다는 것이죠.
+) 이 때 남성인 중위는 미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제일 힘들만 합니다.
이걸 분석한다면, 그 정도로 다들 지칠대로 지쳐서 적의 침투를 예상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겠죠. 거기다 여기서 한 번 더 봐야 될 부분이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더운 날에 그는 낮에는 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오한과 싸워야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것으로 인해 중요한 요충지를 적에게 뺏겨 버렸습니다. 전투에 있어 불리해졌고, 가만히 있어도 적이 고지 위에서 쏘는 포탄에 하릴 없이 죽어가는 상태가 돼 버린 거죠.
다부동 전투는 방어전이 아닙니다. 그 방어선을 뺏겨 버렸으니까요. 그대로 남하해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과 끝 없이 싸우면서도 기회가 되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야 했습니다. 누가 공격하고 누가 방어하는지 알 수 없는 전투가 계속 펼쳐졌습니다. 끝 없이 나온 아군 전사자 역시 이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미군의 증원이 있었고 막바지에는 국군의 증원도 있었지만 그 동안 1사단은 세 배가 넘는 적과 홀로 싸워야 했고, 최소 절반 이상은 그런 상황에서 고지의 적을 향해 공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다 그렇게 전선을 축소했지만 옆의 6사단과는 여전히 간격이 생깁니다. 가산 부근이었죠. 북한군은 이 쪽을 통해 1사단의 배후를 노렸고, 대구 시내에 직접 포탄을 발사합니다. 방어 전면을 21km로 줄였지만 적은 너무 많았고, 위험한 부분 역시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에 대한 1사단 지휘부의 결정은 간단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것이었죠. 백선엽 자신이 이 곳을 잃으면 할복할 거라느니, 1사단 장병 전원이 한날 한시에 죽기로 결의했다느니 하는 말이 많습니다. 백선엽 자신은 이 때 자신의 말을 이렇게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귀관들은 모든 힘을 바쳐 마지막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1사단은 임진강을 건넜고, 한강을 건넜으며, 낙동강을 건넜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자기를 믿으라는 것 뿐이었죠.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 조금이라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자기를 믿고 죽으라는 것 뿐이었죠. 이 곳이 뚫리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뚫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었죠. 장병 하나 하나의 목숨은 이 곳을 지키는 것보다 가볍다는 것, 그러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아니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선 사단장으로 전쟁을 맞았다. 나는 늘 내가 거느린 수많은 장병에게 손을 들어 싸움터를 가리켰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내가 지시하는 전쟁터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갔다."
이렇게 다부동 전투는 시작됩니다.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혈전의 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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