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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03 02:44:31
Name 거간 충달
Subject [일반]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오늘 여자친구에게 '프로메테우스' 개봉얘기를 하며 같이 보고 싶다고 하니 SF는 별로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ㅜ.ㅜ) 에일리언의 프리퀄 격인 영화라는 설명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에이리언 얘기가 나오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3편의 감독 데이빗 핀처로 대화는 주제를 갈아탔습니다. 그녀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너무 좋다더군요.

저에게도 '벤자민 버튼...'은 제 인생 역대 영화에 넣을만큼 좋았습니다. 오히려 '소셜네트워크'의 치밀하다 못해 결벽적인 편집보다 촘촘하지만 다소 여유가 있고 때로는 환상을 넘나드는' 벤자민 버튼...'의 연출이 훨씬 편안한고 아늑한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판타지를 좋아하는 개인적 성향이 반영된 것일겁니다. 거꾸로 가는 한 남자의 일생이 거꾸로 가는 시계와 벌새, 벼락맞는 남자 같은 덕력 넘치는 소재들로 포장된... 저에겐 너무나  판타스틱한 판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부가적인 향신료일 뿐이고 진짜 이야기는 역시 거꾸로 흐르는 한 남자의 일생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벤자민이 데이시를 만나는 순간부터 가슴 한구석이 불편합니다. 거꾸로 시간이 흐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저 여자는 할머니가 되어 아기가 되는 남자를 바라봐야 한다는 비극이 정해져 버리게 되죠. 그래서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슬픕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직 사랑이 시작하기도 전에 정해버리니까요. 모든 인간이 진 빚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매서움은 사랑으로 가려지지 못하니까요. 영화를 보며 다 보고 나면 감독을 원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이런 기분으로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그대를 사랑합니다'였습니다. 만화로 결말을 다 알고 보는데, 오히려 더 슬프고 먹먹해서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더군요. 다가올 비극을 아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참 노련한 이야기꾼이더군요. 낙엽쌓인 길을 걷던 데이시와 어린 벤자민의 모습이 나올때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비극이 아니란 것을 저도 수긍했습니다. 전 그들이 손잡고 걷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더라도 영원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데이시는 벤자민에게 그것을 받았고 그리고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벤자민이 거짓말 같은 남자의 일생이었다면, 거짓말로 이루어진 남자의 일생도 있습니다. '빅피쉬'의 에드워드 불룸은 허풍쟁이에 거짓말 쟁이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일생은 서커스와 거인과 마녀가 있는 동화속 세상이었죠. 아들과의 화해를 통해 에드워드는 죽음이 아니라 동화속으로 돌아갑니다. 그 속에서 그는 영원히 거인과 모험을 하고 있겠죠. 벤자민 버튼과 위의 작품을 보고 바로 이 허풍쟁이가 떠올랐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여린 사람입니다. 굳이 이렇게 허풍떨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뭐 원래 허풍쟁이들이 대부분 여린편입니다.

자기전에 위의 단편을 보니 울컥하게 되더군요.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소중히 하지 않고 흥청망청 보냅니다. 때로는 우리가 소중히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잊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시계추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가게 할 수도 없습니다. 슬픕니다.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시계추를 멈출 순 없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간이 거꾸로 흘러도 변치않는 무엇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계추'의 그녀는 시간을 부여잡은 남자를 가만히 말릴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에게 영원을 받았으니까요.

좋은 작품들이 주는 감동, 대자연이 주는 위대함, 일요일 오후 햇살이 주는 따스함 같은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저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추신. 여자친구가 좋아하더군요 ^^;

추신2. 저는 이런이유로 플라톤 혹은 신플라톤 주의의 절대주의적 관점을 옹호합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인격신이건 아니건 신의 존재가 있고 반드시 규명되리라 생각합니다. 관념속에서 펼쳐진 무한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근현대 철학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무한대 뿐 아니라 사랑과 같은 영원적 존재(? 이게 존재인가, 아닌가 토론해도 될듯;;)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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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03 03:22
수정 아이콘
3분짜리 단편인데 참 짠하네요 :) 제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한 것에 대해서 별로 두렵다는 감정은 없지만, 그래도 저런 영상들을 보면 뭔가 울컥하는 게 있긴 합니다.
몽키.D.루피
12/06/03 04:40
수정 아이콘
플라톤의 신은 충달님의 풍부한 감성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쿨럭;;
전 오히려 신이나 사랑을 타자로 묘사하는 것이 더 와닿더라구요. 알고 싶지만 절대 알 수가 없고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고,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고, 결국 에로스(육체적 관계)에 도달했지만 자기 속으로 포섭해버리는 순간 타자로서의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 그래서 타자를 자기 속에 묶어두지 않고 타자인 채로 두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모순에 빠지게 되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 사랑, 신, 죽음 등을 묘사하는 것들이 더 와닿는 이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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