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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03 00:24:12
Name 그레
Subject [일반] 소통의 부재가 불러오는 결과
0.

피지알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는 건 처음입니다. 가입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과 감상 외에 긴 글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역시 미래는 알 수가 없는 거네요.

저는 방송작가 보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흔히 막내작가라고 합니다. 막내작가가 하는 일 중 가장 주가 되는 일은 자료 찾기와 출연자 섭외입니다.

섭외 때문에 인터넷 공간 이곳저곳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래도 이곳에 글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취미 활동이 스타크래프트 경기 시청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커뮤니티 중 적절한 타이밍의 스갤과 더불어 긴 글을 진지하게 읽어줄만한 유일한 커뮤니티 사이트가 피지알입니다. 저는 과거 스타판에서 일어난 이러저러한 사건들 때문에 글 쓸 수 있는 피지알 아이디가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 자신은 제 생각보다 훨씬 게을렀던 모양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차라리 제가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 이름과 방송사 명을 걸고 피지알 쪽에 정식으로 협조 요청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별로 동하질 않았습니다. 소위 프로그램 홍보용으로 쓴 글은 제가 보기에도 제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글이고, 저는 최소 저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저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제 진심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잘 못 쓰는 글이나마 좀 길게 써보고자 합니다. 이런 글을 써도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령 삭제가 되더라도 누군가는 끝까지 읽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소재가 '관계와 행복'입니다. 처음에는 '관계'였구요. 이 소재를 듣고 기획안을 읽으니 솔직히 제 가족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늘 후회하고, 지금도 어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소통'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대화가 많은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대화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죠.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 자체가 적었거든요.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고 저와 동생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그당시에는 느끼지 못했고, 소통에 목말라하는 건 언제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가족'을 얘기했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저는 그당시 가족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의 고민거리는 언제나 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을 뿐... 소통과 대화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였구요. 저는 안일했습니다. 가족이니까 떠나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아도 떠나가지 않겠거니 생각했었죠.  

이따금 아버지,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가 조금 더 서로에게 이야기했더라면,
그때, 우리가 조금 더 서로에게 귀기울였더라면,
그랬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어머니의 외도로 우리 집은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소통, 대화, 관계를 외쳤던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고 몇 주에 한 번 정도 집에 올라옵니다. 동생은 군대에 가 있고 저는 텅 빈 집을 개 한 마리와 함께 홀로 지킵니다. 아니다. 요즘에는 일 때문에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니 우리집 개마저도 외톨이가 되었군요.

저는 지금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아래에서도 더 이야기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도 저는 부모님과 대화하는 게 힘듭니다. 홀로 되어 멀리 떨어져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한다고 생각은 늘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전화할 때 언제나 어색합니다.

-바쁘냐?
-괜찮아요..
-일은 좀 할만하냐?
-그냥 그래요...

내지는 세금 등과 관련된 생존에 꼭 필요한 대화. 이것이 아버지와 저의 평균적인 대화입니다. 친구와의 대화와 비교해보면... 할 말이 없네요.

이것이 소통의 부재가 불러오는 나쁜 결과 중 하나입니다.

2.

그래서 이 프로그램 제작팀에 들어왔을 때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마음대로 되질 않더군요.

섭외도 어렵고 메인작가님, 피디님과의 소통도 어렵습니다. 섭외 역시도 기본적으로 소통인데 마음과 달리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이 섭외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막 쏟아내듯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취조받는 기분을 느낄 것 같습니다. 제 진심은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영업사원이 될 마음은 없었으나 영업사원이 된 기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 못 하는 영업사원도 없죠.

이 프로그램이 저에게 있어서는 두번째 프로그램입니다. 첫번째 프로그램을 할 때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로 인해 저 자신이 조금이나마 성장했을 거라고 믿으며 두번째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나 현실은 도리어 리셋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또 새로웠고 그 리셋된 기분에 허탈해지더군요. 사실 어찌보면 당연한 걸 텐데 첫번째 프로그램을 할 때의 그 압박감을 다시 견뎌야 하고 앞으로도 견뎌내야 한다는 게 무섭습니다. 전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제가 실수하면 프로그램에 치명타가 된다는 압박감 말입니다.

요즘은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언제나 별별 생각을 다하고 고민합니다. 당장 이 프로그램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 대한민국 방송의 미래를 위해 지금이라도 일을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 도망갈까, 요즘 한강 물은 그렇게 안 차갑겠지(농담입니다)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나 자신을 무능력하다 판단내리고 정말로 어찌할까 싶어 이 역시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꼬박꼬박 출근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이 모든 것에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집어던질 뻔한 적도 있었는데, 하지만 산 지 얼마 안 된 노예계약 갤럭시2라서 그만두었습니다...... 당장 메인작가님의 막내 시절이나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비교하면 제 불행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제 불행이나 고통이 사라지진 않는군요. 행복은 상대적인데 불행은 아닌가봅니다.

...여튼 소통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길게 글을 씁니다. 말이 안 되니까 글이라도 열심히 써보자고, 이렇게 길게 글을 써봅니다.

K본부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고 '대한민국 중년 남성 분들의 관계와 행복'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본격 솔루션 프로그램까지는 아닙니다만(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게, 최대한 경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필요한 경우 전문가 조언도 가능합니다. 중년의 아버지와의 소통 부재 내지는 불협화음으로 힘들어하시는 분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생각 있으시거나 이런 분을 소개시켜주고 싶다 하시는 분은 bklove369@naver.com으로 메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사회 경험 없는 철부지입니다만 저희 메인작가님과 피디님은 오랜 경력이 있으신 분들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저 역시도 제가 힘든만큼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려고 노력할 겁니다.

아니, 메일 보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 언제나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너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언제나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소통의 부재가 언제나 제 케이스와 같은 결과를 불러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침묵의 평화가 죽을 때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침묵의 평화보다는 소통의 행복이 더 좋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못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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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이리
12/06/03 00:30
수정 아이콘
적합한 분을 잘 찾으시길 바랍니다.
고래밥
12/06/03 01:52
수정 아이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참 적절한 사람이다 싶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부모님 간의 잦은 다툼. 계속되는 실패 실패..

전화통화는 한 달에 한 번.
어디냐? 공부해요. 그래 열심히 해라. 네.

저 같은 분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좋은 걸로 방송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우리 가족이 방송에 어떻게 비춰질 지. 너무나 두렵네요. 적절한 분을 찾길 바랍니다.
12/06/03 02:17
수정 아이콘
대학생때 기숙사 살때.. 엄마한테 연락하는 경우는 늘 돈이 떨어졌을때였죠 ㅜ
아야여오요우유으
12/06/03 02:48
수정 아이콘
저도 참 주제에 딱 맞는 상황인 것 같네요. 긴말할 것 없이 저는 30년 살면서 아버지한테 먼저 통화를 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대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 했는데 가끔 집에 가 있을 때가 가장 불편하네요 지금도
견우야
12/06/03 04:46
수정 아이콘
저도 고백해야 겠군요..

전화통화는 한 달에 한 번.

-바쁘냐?
-괜찮아요..
-일은 좀 할만하냐?
-그냥 그래요...

해결방법은....??..... 그리고 죄송함...
12/06/03 07:35
수정 아이콘
실상 이런 곳에 자발적으로 출연 신청하는 경우는 극단까지 간 끝에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비도 의외로 겁나 비싸고 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출연 신청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저희 제작진이 찾는 출연자는 이런 경우도 아니고 문제가 터지기 전 단계를 찾으려고 하니 애매한 경우죠. 침묵의 평화를 택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고 솔직히 설득하기도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백날 설득해도 결국 개인의 의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이 자극적인 프로그램이 아니고 (평일 밤 11시 40분에 하는 다큐 프로그램이 뭐 자극적이겠습니까..)기존의 솔루션 프로그램과도 다르다고 선의를 가지고 백날 말해도 결국 방송에 드러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소통할 의지를 가지신 분이 우연찮게라도 우리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게 되길 바라며 이런 글을 올리는 거죠...

해결방법은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시는 거면... 제가 말하기는 그렇고 그런 치유 프로그램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도움으로 프로그램 기획하는 중입니다.. 정작 저는 전문가 취재 때 따라가지 못한지라... 이 글 올리면서도 팁 같은 걸 제공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뺑덕어멈
12/06/03 08:48
수정 아이콘
소통이 안되는 집에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자발적으로 TV출연하는건 참 어려워보이네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없는데 가족 구성원은 소통의 부족함을 느끼는 가족을 찾는 거 같은데...
출연의 키포인트가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집안 주도권을 가지는 가장(아버지)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인데
남자(특히 아버지 세대)란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아왔고,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가장이 아닌 다른 구성원이 이런 프로그램에 나가자고 이야기를 하기가 참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우리집은 실패했다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거든요.(실제로는 예방적 목적이겠지만요)
설사 이야기를 해도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내기가 참 어려울 듯하네요.
저도 가족 특히 아버지와 소통의 부재를 느꼈고 해결하기 위해서 상담을 받을려고 했으나 이야기 꺼내기가 어려웠거든요.
저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르는 저런 이유 때문에요.
제가 잘하고 제가 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왔네요.
생각해보면 이런 마인드가 결국 아버지를 닮게 되는게 아닌가 하지만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pgr에 계신 가장분들 중 가족과 소통에서 좀 더 나아지고 싶으시다면 문의해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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