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에서 수시 파이널 시즌이 시작했다는 말은, 정규반이 끝났다는 말을 뜻하며, 뜻하지 않게 단기간의 무급주말휴가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뜻해야 하나, 지도교수가 대체 알 수 없는 작업을 지시했고, 외부에서 하던 일들이 마구 쏟아져나왔으며, 몸까지 안좋은 이 상황에서 무급주말휴가따위는 무의미하다.
하루종일 집에서 이상한 문서들을 작업했다. 내용은 대외비. 시간은 그렇게 저녁. 하루종일 먹은 거라곤 점심때 먹은 편의점 추석특집 도시락(무려 우유가 사은품)밖에 없다. 하지만 살은 왜 안빠질까. 이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급 후줄근해졌다. 일 끝나고 카오스나 한판 하기로 한 자취방 친구녀석들은 데이트다 나이트다 나가버리고. 에라. 샤워나 하자.
많은 자취생들의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는, 빨래를 제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서울 소재 자취생들의 32%는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을 때까지 빨래를 하지 않고 버틴 기억이 한 번 이상 있다. 나도 그렇다. 덕분에 입을 옷이 없다. 샤워나 하는 김에 옷이나 빨기로 결정한다. 푸슈수. 인근 시세에 비해 턱없이 싼, 그리고 턱없이 시설이 안좋은 다락방의 세탁기가 10분만에 죽어버린다. 짜증을 내며 콘센트를 윗칸에 꽂는다. 아래칸에 비해 사망 확률이 상당히 낮아진다는 건, 이 다락방의 도시전설이다. 허나 오늘은 윗칸에 꽂아도 죽어버린다. 아오. 일단 샤워부터 하자. 하고 샤워를 한다. 그러다 급 짜증이 나서 다시 세탁기를 돌린다. 세 번째 세탁기를 돌리다가, 생각해보니 세탁바구니 말고도 방 구석에 던져두었던 셔츠 몇 벌이 떠오른다.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린 채로 방에 들어가 셔츠 몇 별과 등등을 들고 와, 세탁기를 열고 집어넣는다.
그렇게 담배 한대를 피우는 동안, 세탁기는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이번엔 확실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샤워를 대강 마무리하고 나온다. 어, 그런데 타월이 없네. 아놔 아까 옷가지 집어넣을 때 짜증나서 막 집어넣었구나. 대충 옆방 사는 친구놈의 타월을 빌려 물기를 닦는다. 날이 건조하니, 잠시 서있는 것만으로 몸이 마른다. 자이제 하던일을 계속해야지. 아니 배가 고프니 밥부터 먹고 와야겠는데 한벌 남은 내 옷가지가 어디에 있을까. 내 팬티. 아오.
흘러간 나의 사랑처럼 그것은 축축하고 깊고 어두운 세탁기 속에서 흐늘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온갖 욕을 다하다가, 잠옷 대용으로 입던, 하와이얀 셔츠에만 어울릴 수 있는 화사한 비치웨어 반바지 한 벌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본받아 오늘은 팬티를 입지 않기로 한다, 하고 자못 진지하게 중얼거리다가 짜증이 더 났다. 노팬티든 말든 티셔츠도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예비군복과 정장셔츠와 춘추잠바 몇 벌만이 뎅그러니 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저중 뭘 입어도, 화사한 반바지와 어울릴 수는 없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다. 대충 입고 재빨리 나가서 컵라면 사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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