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역사속에서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보낸 투수들도 있지만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운한 선수 생활을 보낸 투수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윤학길, 염종석, 주형광, 이상군, 이강철, 한용덕등 수많은 투수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스쳐가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투수이자 정말로 불운한 투수가 있습니다.
정민철. 통산 161승을 기록한 대투수이지만 데뷔했던 해에는 염종석이 그보다 더 빛나는 별로 빛나는 바람에 그는 2인자에 머물러야 했으며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1990년대에는 조계현, 이상훈, 이대진, 정민태가 차례대로 그의 빛보다 더 밝게 타오르면서 정민철의 빛을 가렸습니다.
심지어 팀 내에서는 200승 투수 송진우가 더 밝게 타올랐으며 꾸준함이라는 면모에서도 10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와 세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한 이강철이 정민철보다도 더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게다가 단 한번의 실책으로 인해 퍼펙트게임을 놓친 노히트 노런까지 생각해본다면 정민철의 불운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민철은 침체기에 빠져있던 이글스라는 팀을 자신의 두 어깨로 지탱하여 이글스가 추락하지 않게 만든 선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민철의 은은하고 오랫동안 타오른 선수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정민철. 1972년 3월 28일 대전광역시생. 대전에서 태어난 정민철은 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를 거쳐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들게 됩니다. 정민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빙그레이글스에 입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민철은 1991년부터 프로무대에서 활약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민철이 처음으로 프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1992년.
왜 정민철은 1992년부터 프로무대에서 활약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정민철이 대전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학교 시절에 1년을 유급했기 때문입니다.
정민철은 1992년, 빙그레이글스의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프로무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 그리고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박찬호와 정민철은 꼭 잡아달라고 구단에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
시속 150km에 달하는 강력한 직구를 앞세워 정민철은 상대 타자들을 연신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또한, 불펜과 선발을 오가면서 활동을 했지만 200이닝 가까이 소화하는 내구력을 발휘하면서 빙그레의 마운드의 한 축으로 단숨에 자리잡게 됩니다.
1992 정민철 : 33등판, 22선발, 10완투, 3완봉, 195.2이닝, ERA : 2.48, WHIP : 1.07, 14승(13선발승, 1구원승) 4패 7세이브, 승률 0.778, 피안타율 0.204, 피출루율 0.276, 145삼진
최다 등판 16위, 최다 선발 14위, 최다 완투 5위, 최다 완봉 1위, 최다 이닝 5위, 평균 자책점 2위, WHIP 3위, 다승 6위, 최다 선발승 6위, 세이브 8위, 승률 3위, 피안타율 1위, 피출루율 2위, 탈삼진 2위
이렇게 화려한 성적을 올린 정민철이었지만 하필이면 이 해에 정민철보다도 더 밝게 빛난 고졸신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염종석이었습니다. 염종석이 자신의 두 어깨만으로 소속팀 롯데자이언츠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괴력을 발휘했고 게다가 17승, 평균 자책점부문 타이틀 수상등으로 밝게 타오르는 바람에 정민철의 화려한 성적은 빛이 바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염종석에게 밀리며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해에 빙그레는 다승과 구원부문 타이틀을 동시에 수상한 송진우를 비롯하여 40홈런타자 장종훈, 20 - 20에 수위타자까지 거머쥔 이정훈등을 앞세워 한국시리즈에 직행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가 만난 상대는 롯데자이언츠. 염종석이 그동안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고 오느라 감당해야 했던 무리한 혹사로 인해 주저앉았지만 롯데의 파워 피처 박동희가 염종석을 대신해서 빙그레를 묶어버렸고 결국 1 : 4로 롯데에게 패배하며 빙그레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합니다.
정민철은 2차전과 4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했습니다.
2차전에서 정민철은 5.2이닝동안 단 한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는 퍼펙트 피칭을 선보였고 7회까지는 단 2개의 안타를 허용했지만 8회에 갑자기 2개의 볼넷을 내주면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결국 송진우가 정민철의 뒤를 이어 등판했지만 송진우는 불을 질러버리게 됩니다. - 이 경기의 패전투수는 송진우입니다. -
4차전에서 정민철의 맞상대는 공교롭게도 염종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민철이 2이닝동안 5개의 안타를 얻어맞으며 3실점하는 바람에 정민철의 패배로 승부가 나게 됩니다. - 염종석 역시 혹사로 인해 6회도중 4연속 안타를 얻어맞으며 강판당하게 됩니다. -
정민철은 2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10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2.70, WHIP : 0.80, 7삼진을 기록했지만 4차전의 패전투수로 기록이 됩니다.
1993년, 정민철은 홈 경기에만 선발로 등판했지만 그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1993 정민철 : 18등판, 17선발, 10완투, 1완봉, 148.1이닝, ERA : 2.24, WHIP : 1.06, 13승(13선발승) 3패 1세이브, 승률 0.813, 피안타율 0.216, 피출루율 0.277, 110삼진
최다 이닝 21위, 최다 완투 4위, 최다 완봉 16위, 평균 자책점 5위, WHIP 9위, 다승 6위, 최다 선발승 3위, 승률 1위, 피안타율 9위, 피출루율 7위, 탈삼진 9위
이게 바로 홈 경기에만 등판한 정민철의 성적입니다.
이 수순만 밟는다면 정민철은 이글스의 황태자로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겠지만.......
1994년부터 정민철의 야구인생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고난을 겪게 됩니다.
1994년, 정민철은 최고의 피칭을 선보이지만 그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4 정민철 : 28등판, 27선발, 9완투, 4완봉, 218이닝, ERA : 2.15, WHIP : 0.97, 14승(13선발승, 1구원승) 10패, 승률 0.583, 피안타율 0.200, 피출루율 0.258, 196삼진
최다 등판 27위, 최다 선발 2위, 최다 완투 3위, 최다 완봉 2위, 최다 이닝 1위, 평균 자책점 1위, WHIP 3위, 다승 6위, 최다 선발승 8위, 최다 구원승 29위, 다패 7위, 승률 12위, 피안타율 2위, 피출루율 3위, 탈삼진 1위
평균 자책점부문 타이틀 수상, 그리고 WHIP 3위, 피안타율 2위, 탈삼진 1위 - 2위인 이상훈과는 무려 48개 차이 - 에 빛나는 투구를 했지만 그가 거둔 승리는 고작 14번이었습니다.
(이 해에 정민철보다 피안타율, 피출루율, WHIP이 더 낮은 투수는 마무리투수인 김용수와 정명원이었습니다.)
정민철의 활약에 힘입어 이글스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숙적 해태타이거즈를 2 : 0으로 격파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정민철은 선발투수로 등판했지만 정규리그에서 너무나도 무리를 하는 바람에 5이닝동안 4삼진, 평균 자책점 5.40, WHIP : 2.00이라는 부진한 기록을 남깁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태평양과 격돌했고 0 : 3으로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합니다.
정민철은 1경기에 구원등판, 3경기에 선발로 등판합니다. 그리고 모두 패전을 기록합니다.
특히 3차전의 경우에는 "무려" 2실점을 하는 바람에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정민철은 6이닝 동안 평균 자책점 4.50, WHIP : 1.17, 4삼진을 기록했습니다.
1995년에도 정민철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218이닝을 던지며 무리한 탓인지 손목 부상을 당하며 평균 자책점은 3점대로 "치솟았고" 피출루율도 3할로 "치솟는" 부진에 빠지고 맙니다.
1995 정민철 : 22등판, 22선발, 162.2이닝, ERA : 3.21, WHIP : 1.18, 13승(13선발승) 7패, 피안타율 0.247, 피출루율 0.302, 127삼진
1996년, 이 해에도 정민철은 팔이 빠져나간다고 표현을 해도 별 과장이 없어보일 정도로 던지고 또 던졌으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1996 정민철 : 32등판, 29선발, 9완투, 4완봉, 219.2이닝, ERA : 3.03, WHIP : 1.01, 13승(13선발승) 12패 1세이브, 승률 0.520, 피안타율 0.217, 피출루율 0.268, 203삼진
최다 등판 30위, 최다 선발 2위, 최다 완투 3위, 최다 완봉 1위, 최다 이닝 1위, 평균 자책점 10위, WHIP 7위, 다승 8위, 최다 선발승 5위, 다패 2위, 세이브 30위, 승률 12위, 피안타율 10위, 피출루율 5위, 탈삼진 2위
이 해에 정민철은 규정 승수인 10승을 채운 투수들 중 승률 꼴찌를 기록했으며 패배도 가장 많이 기록했습니다. - 다패 1위인 이상목은 9승입니다. -
왜 정민철의 구원투수들은 정민철이 남긴 주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놓고 경기를 시작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정민철의 평균 자책점을 3점으로 올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수는 1996년에 최고의 수호신으로 활약한 구대성이었습니다.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현대유니콘스와 격돌합니다.
1차전의 선발투수는 양 팀의 에이스인 정민철과 정민태.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정민철은 9개의 삼진을 기록했지만 홈런 1개를 포함 5이닝동안 6자책점을 기록하며 무너지고 맙니다. 평균 자책점 10.80, WHIP : 1.40.
정민철이 1차전에서 무너지고 구대성이 2차전에서 무너지는 바람에 한화는 현대에게 0 : 2로 패배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합니다.
1997년, 정민철은 작년에 200이닝을 넘게 던지는 무리를 했지만 이 해에도 200이닝을 넘게 던지는 무리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2점대 자책점을 찍으며 역시 정민철이라는 평가를 받게 합니다.
하지만 그의 불운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운의 절정은 바로 1997년 5월 23일, 대전구장에서 벌어진 vs OB베어즈전.
이 날의 정민철은 완벽했습니다. OB의 타자들은 차례대로 타석에 들어섰다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습니다. 누구도 1루를 밟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7이닝째.......
정민철은 심정수를 상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깔끔한 삼진. 그러나 여기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날의 포수 강인권이 갑자기 그 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낫아웃 상황이 벌어졌고 심정수는 1루로 살아나가게 됩니다.
퍼펙트 게임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아까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정민철이 남은 2이닝을 또다시 퍼펙트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9번째 노히트 노런이자 2번째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 이 날, 정민철은 삼진을 8개 잡아냈습니다.
포수의 실책으로 퍼펙트가 깨졌으니 웬만해서는 포수를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민철은 이 경기가 끝나고 이런 말을 합니다.
"강인권이 있어서 내가 이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한 편, 이 해의 정민철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1997 정민철 : 31등판, 30선발, 10완투, 4완봉, 208.2이닝, ERA : 2.46, WHIP : 1.04, 14승(14선발승) 11패, 승률 0.560, 피안타율 0.227, 피출루율 0.272, 160삼진
최다 선발 2위, 최다 완투 1위, 최다 완봉 1위, 최다 이닝 2위, 평균 자책점 4위, WHIP 6위, 다승 3위, 최다 선발승 2위, 다패 6위, 승률 13위, 피안타율 13위, 피출루율 5위, 탈삼진 1위
(WHIP에서 정민철보다 앞선 5명의 투수는 모두 구원투수입니다. 선발투수로만 한정해 보면 정민철이 1이닝당 가장 적은 주자를 출루하게 했습니다.)
1997년을 주름잡는 투수였지만 그가 쌓은 승수는 고작 14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8년, 계속해서 무리한 투구를 한 결과, 정민철은 주저앉고 맙니다. 그리고 10승은 기록했지만 삼진수가 100개에서 3개가 모자라며 7년 연속 세자릿 수 탈삼진 기록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1998 정민철 : 23등판, 23선발, 148.1이닝, ERA : 3.16, WHIP : 1.13, 10승(10선발승) 7패, 피안타율 0.240, 피출루율 0.286, 97삼진
(또다시 평균 자책점이 3점대로 치솟아버린 정민철입니다......)
1999년, 정민철은 다시 재기에 성공합니다. 오랜만에 타선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정민철은 무려 18번의 승리를 기록하며 드디어 한국 프로야구계의 1인자로 자리매김하는듯 했습니다.
1999 정민철 : 32등판, 29선발, 2완투, 1완봉, 201.2이닝, ERA : 3.75, WHIP : 1.17, 18승(17선발승, 1구원승) 8패 1세이브, 승률 0.692, 피안타율 0.239, 피출루율 0.302, 151삼진
최다 선발 4위, 최다 완투 6위, 최다 완봉 2위, 최다 이닝 2위, 평균 자책점 6위, WHIP 5위, 다승 2위, 최다 선발승 2위, 다패 20위, 세이브 29위, 승률 7위, 피안타율 10위, 피출루율 8위, 탈삼진 5위
그러나 이 해에도 그는 1인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현대유니콘스의 에이스 정민태가 230.2이닝을 던지면서 평균 자책점 2.54, 20승을 찍어버린 것입니다. - 그리고 아시다시피 1999년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고투저해입니다. 이 해의 리그 평균 자책점은 무려 4.98입니다. -
각설하고 한화이글스는 오랜만에 제대로 작동한 다이너마이트 타선, 그리고 정민철 - 송진우 - 이상목의 선발 삼각편대와 철벽 마무리 구대성을 앞세워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두산과 격돌했고 혈투끝에 4 : 0으로 두산을 제압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정민철은 2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지만 도합 8이닝동안 홈런 3방을 포함, 6실점, 5자책점, 평균 자책점 5.63, WHIP : 1.75를 기록했습니다.
1992년 이후, 처음 밟아본 한국시리즈에서 한화는 롯데와 격돌했고 롯데를 4 : 1로 물리치면서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게 됩니다.
정민철은 1차전과 4차전에 나서서 모두 승리를 기록했고 도합 13이닝동안 평균 자책점 2.77, WHIP : 1.46, 9삼진을 기록했습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찍은 정민철. 이 시즌이 끝나고 정민철은 일본으로 진출합니다.
그러나...... 일본에 있었던 2년은 그저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습니다.
2002년, 정민철은 소속팀 한화에 돌아왔지만 더 이상 예전의 정민철이 아니었습니다.
8년간 겪었던 무리한 혹사는 이미 그에게서 강속구를 빼앗아버린 상태였습니다. - 아니 1997년부터 팔꿈치 건초염으로 인해 그의 강속구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습니다. -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조금 힘들었습니다.
2002 정민철 : 26등판, 24선발, 138이닝, ERA : 5.35, WHIP : 1.33, 7승(6선발승, 1구원승) 13패, 피안타율 0.270, 피출루율 0.325, 116삼진
2003년, 어느정도 재기에 성공했지만 정민철의 재기는 또다시 일본에서 돌아와 17승을 올리며 다승과 승률부문 1위에 오른 정민태에 의해 빛이 바래고 맙니다.
2003 정민철 : 26등판, 26선발, 139.2이닝, ERA : 4.00, WHIP : 1.31, 11승(11선발승) 10패, 피안타율 0.249, 피출루율 0.315, 73삼진
2004년, 정민철은 최악의 추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2004 정민철 : 13등판, 13선발, 54이닝, ERA : 7.67, WHIP : 1.74, 0승 6패, 피안타율 0.328, 피출루율 0.380, 22삼진
그러나 2005년에는 어느정도 재기에 성공합니다.
2005 정민철 : 25등판, 25선발, 115.2이닝, ERA : 4.82, WHIP : 1.30, 9승(9선발승) 3패, 피안타율 0.275, 피출루율 0.318, 56삼진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SK와 경기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3 : 2로 SK를 물리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두산과 만났지만 0 : 3으로 패합니다.
정민철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단, 한 경기에서도 등판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에는 또다시 13번의 패전을 기록합니다.
2006 정민철 : 25등판, 24선발, 130.2이닝, ERA : 3.93, WHIP : 1.41, 7승(7선발승) 13패, 피안타율 0.284, 피출루율 0.343, 62삼진
한화는 데뷔하자마자 투수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괴물 류현진과 16승을 올리며 재기에 성공한 문동환을 앞세운 선발진과 돌아온 구대성으로 대표되는 계투진을 앞세워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기아를 2 : 1로 물리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정민철은 등판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현대를 만났고 3 : 1로 현대를 물리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정민철은 2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1이닝동안 1자책점을 기록하며 승리를 기록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한화는 삼성과 만났고 치열한 승부를 벌였지만 1 : 4로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합니다.
정민철은 2경기에 선발로 등판, 도합 8.2이닝동안 평균 자책점 3.12, WHIP : 1.73을 기록합니다.
2007년, 정민철은 다시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팀 선배 송진우, 타이거즈의 이강철에 이어서 3번째로 150승을 기록한 투수가 됩니다.
2007 정민철 : 26등판, 26선발, 1완투, 1완봉, 155.1이닝, ERA : 2.90, WHIP : 1.20, 12승(12선발승) 5패, 승률 0.706, 피안타율 0.268, 피출루율 0.311, 66삼진
최다 선발 11위, 최다 완투 5위, 최다 완봉 2위, 최다 이닝 12위, 평균 자책점 3위, WHIP 11위, 다승 5위, 최다 선발승 5위, 승률 4위, 피출루율 14위, 탈삼진 25위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상대 팀 삼성을 2 : 1로 물리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정민철은 1번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평균 자책점 3.00, WHIP : 0.33을 기록했지만 투구이닝이 3이닝에 불과해 승리를 기록하지 못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는 두산과 경기를 벌였지만 0 : 3으로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합니다.
정민철은 2차전의 선발투수로 등판했지만 2.1이닝동안 이종욱과 김현수에게 맞은 홈런을 포함 3자책점, WHIP : 2.14를 기록하며 패전투수로 기록됩니다.
2008년, 정민철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008 정민철 : 25등판, 25선발, 127.1이닝, ERA : 5.23, WHIP : 1.45, 6승(6선발승) 10패, 피안타율 0.294, 피출루율 0.351, 56삼진
그리고 2009년. 정민철은 다시 한 번 선발투수로 활약했지만 여러번의 패를 기록했고 결국 은퇴를 하게 됩니다.
2009 정민철 : 8등판, 8선발, 31이닝, ERA : 9.87, WHIP : 2.32, 0승 6패, 피안타율 0.400, 피출루율 0.462, 21삼진
2009년 9월 12일. 정민철의 은퇴식이 있던 날. 이 날, 대전구장에서는 관객들에게 전원 무료입장을 시행했습니다.
이 날의 상대는 히어로즈. 그러나 한화의 선발투수 김혁민이 3이닝동안 홈런 2방 포함, 6자책점을 기록하면서 히어로즈가 먼저 9점을 얻는 바람에 대투수가 은퇴하는 길에 소금을 뿌리는가 싶었지만 한화는 악착같이 추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9회말, 이도형이 히어로즈의 조용준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때리면서 11 : 9로 승리, 정민철의 은퇴식을 승리로 장식해 주었습니다. - 가장 이글스다운 승리인 10점 잃으면 20점 내서 이긴다로 -
비록 영구결번은 정민철의 전성기때의 등번호인 55번이 아니라 2005년부터 정민철이 달았던 23번이 되었지만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인 정민철은 이글스의 역사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정민철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통산 393등판(29위), 370선발(2위), 2394.2이닝(2위), 60완투(11위), 20완봉(2위), 1030실점(3위), 935자책점(3위), ERA : 3.51, WHIP : 1.19(17위), 161승(2위), 157선발승(2위), 4구원승, 128패(4위), 10세이브, 승률 0.557, 피안타율 0.245, 피출루율 0.301(10위), 1661삼진(4위), 655피볼넷(9위)
그리고 이제 포스트시즌과 올스타전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포스트시즌
15등판, 14선발, 66.1이닝, 33실점, 32자책점, ERA : 4.34, WHIP : 1.37, 3승 6패, 51삼진, 20피볼넷
올스타전
5등판, 2선발, 9.1이닝, 6실점, 5자책점, ERA : 4.82, WHIP : 1.29, 1패, 7삼진, 3피볼넷
그리고 정민철에 관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존재합니다.
정민철은 1972년생입니다. 2009년, 타 팀에서는 최고참으로 대접받을 나이였지만 송진우, 구대성, 최상덕등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장들이 많은 한화에서는 정민철이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 류현진, 유원상, 안영명, 양훈, 김혁민등은 너무 어려서 노장들이 심부름을 시키기 조금 곤란한 입장 - 2009년에도 형님들의 커피 심부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하나 했으니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한국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박경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받아본 공 중에서는 정민철의 직구가 최고의 공이었다."
정민철. 비록 그가 전성기를 보낸 때에는 그의 소속팀이었던 이글스가 침체기에 빠져있던 시기라 최고의 피칭을 하고도 패전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민철이 없었다면 과연 이글스는 침체기에서 벗어나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을까요?
침체기에 빠져있던 독수리를 홀로 자신의 두 어깨로 이끌어나가던 정민철.
이글스를 팀 명 그대로 독수리에 비유해 본다면 정민철은 다른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독수리의 살아 움직이는 심장으로 비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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