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낮에 아이들이 해준 일이 너무 고마워서, 글을 하나 짧게 썼습니다.
PGR의 글쓰기 버튼이 얼마나 무거운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몇 시간 뒤에 지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피지알러 귀는 당나귀 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반말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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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녀석이 문을 막고 있길래, 또 장난질이구나 싶어서 힘주어 밀치고 들어갔다.
교탁에 교재를 놓고 섰는데, 조그만 케익에 초가 꽂혀있다. 놀랄 틈도 안 주고 '시, 시, 시작'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노래를 부른다.
마냥 철부지인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런 일 처음이다'라는 말도 혀끝으로 애써 목 안에 집어넣었다. 일곱 해 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된 학원에서 담임반 아이들이 불러준 노래 이후로 처음이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갑작스러움이 반은 차지했지 싶은 그 날 이후로는.
얘들아.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너희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일까.
나는 너희들의 고달픈 하루에 무게를 더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입시에 쇠사슬 묶인 너희들을 매질하는 간수다. 나는 한 줌도 안 되는 얄팍한 지식으로 큰소리치는 기계다. 나는 자본의 지배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 너희들을 편입시키려는 앞잡이다. 나는 내 한 삶도 정리가 안 되면서 때로 너희의 인생에 개입하려는, 대책 없는 강사다.
그런 내게 은혜와 하늘을 말하고, 사랑과 보답을 불러주는 너희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줘야 할까. 한낮의 그 교실에서 시작된 부끄러움이 해가 지고 어둠으로 가득한 지금 내 방에까지 따라와서 놓아주질 않는다.
그저 떠오르는 몇 명의 이름 뒤에 숨어 반벙어리처럼 얼버무린다.
윤동주처럼 늘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으려 애써야겠지.
이육사처럼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다듬어야겠지.
정호승처럼 낮은 곳에 있는 아이의 슬픔을 볼 수 있어야겠지.
김남주처럼 가파른 비판도 때로는 필요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안도현처럼 따뜻하게 따뜻하게 너희를 대해야겠지.
다음은 집에 와서 네이트온에 접했을 때 고마운 쪽지를 보내준 오랜 제자에게 보낸 쪽지.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여기에도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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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 XXX(2010-05-15 22:02:00)
받는사람 : 나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스으이 사랑
아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서로 자라는 일이라지만, 아마도 그때의 나는 내가 더 많이 자랐지 싶구나.
이 길에서 11년이 흘렀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보다 서른 배쯤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기억하는 이름이 있고, 기억하는 얼굴이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 하루의 짧은 순간이라도, 오늘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어느 한 길섶에서라도 내 얼굴을 떠올린다면 부디 부끄럽지 않은 일로 떠올리기를 바라지만 자신은 없구나.
내가 가르친 건 무엇이었을까.
좋은 점수를 얻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지식? 눈 앞에 닥친 시험에 뭔가 해야만 한다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위안이 된 자기만족? 힘든 학창시절에 잠깐 웃고 즐긴 짧은 시간?
십대 후반의, 그 인생에서 첫번째는 아니더라도 서너번째는 될만한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알찬 시간이었기를 바라지만, 과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허욕이겠지. 내년 오늘, 어쩌면 그 몇 해 뒤 어느 오늘 쯤엔 다만 몇 명에게는 그런 시간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고 한 달을 보내고 한 해를 살아가다 보면 오리라 믿을 뿐이지.
다시 한 번. 고맙다 제자야. 교생실습을 무사히 마치고 교사가 된다면, 내 후회를 되풀이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지럽게 썼다. 좋은 주말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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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다녀왔는데
남자 아이들이라 거칠고 무뚝뚝하고 해서
한달이란 기간동안 별로 친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나서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해주는데
두번의 인사를 해주더군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인사를 받는데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저의 오산이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의 위력은 정말 강했습니다.
인사를 받는 순간 너무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고
언젠가 교단에 서서 이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