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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3/17 02:53:34
Name
Joon
Subject
[일반]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에 대한 작은 기억
고등학생 시절 국아무개란 친구가 있었다.
친구라고 말하기엔 둘 사이에 거의 추억이 없으므로 좀 부끄럽지만
2년 정도 같은 반이었던 것 같다.
항상 단정한 스포츠 머리에
약간 우둔해보일 정도로 생글거리는 인상에
약간은 통통하면서 다부진 체격을 가진
왠지 집안에서 장남을 담당하고 있을 것 같은
공부 잘하는 친구였다.
그는 반장을 했었는데
까부는 성격도 아니고 부모님 입김이 깃들어 보이는 면도 없었다.
나름 내가 보기엔 너무 평범해서 이색적인 반장이었다.
지루한 수업이었는지 교실의 에너지는 다 소진되어버린듯한 공기가 감돈 어느 날
선생님이 국아무개에게 교과서의 한 부분을 읽도록 지시하였다.
국아무개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일어났고
교실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며 약간의 침묵을 두었다.
그리고는 교과서를 양손으로 펼친채 눈 높이에 맞추어 직각으로 치켜들었다.
교실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가 똑똑히 전달되도록
목소리에 힘을 실었고 교실에 귀가 잘 안들리는 노인이라도 있는 양
끊어야 할 부분을 탁탁 끊어가며 힘차게 책을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는 동안 책을 든 손은 구부러지거나 쳐지지 않았고
시선도 책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책을 다 읽고 자리에 앉았고
머쓱한 웃음으로 뒤를 돌아다 봤다.
교실에 있던 우리 모두는 그의 행위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너무 쪽팔린
자칫하면 어른들이 시키면 시킨대로 따르는,
범생이들이나 할것 같은 행위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서 새어나온 웃음은
국아무개가 보여준 의외의 행동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그의 행동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그는 선생의 지시에 따라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교실에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아무런 가식 또는 권위 없이 다가가려는
너희들과 친구가 되고싶다는 마음을 꺼내 보여준
용기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루는 스타토론에 열중하는 우리들에게
"스타가 그렇게 재밌냐? 나도 같이 피씨방 가자"
(스타를 전혀 못하는 것은 약간 이상한 놈 취급 받을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 그의 앞에서
일련의 경계심이 사라지던 기분 좋은 느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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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글이라 경어체가 아닌 점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지금은 이 친구의 소식은 전혀 모릅니다만
멋진 모습으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갑내기에게서 비범함을 느끼고 그의 생각과 행동에
반기를 들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프로게이가 되어갔....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세요)
갑자기 그 친구에 대한 나만의 추억이 떠올라 끄적여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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