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불과 몇 년 동안에 그는 그 이전 어느 통치자들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점령한 정복자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던 한 젊은이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더의 초상
알렉산더에 대하여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인데 그는 알렉산더 시대로부터 3세기 후에 사람입니다. 그가 직접 목격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기록은 그 이전 역사가들의 기록을 토대로 기록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원 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아리아노스도 다른 사람의 기록을 토대로 저술을 남겼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이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소년시절
알렉산더는 소년 시절부터 야망과 명예욕에 대해서 일반 소년들보다 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 필립의 부재중에 페르시아의 대사들을 맞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의 성격, 그들의 왕의 특성, 적들에 접근하는 방법,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군대에 관하여 질문하였는데 그가 질문한 내용을 보면 어릴 때부터 그가 얼마나 실리적인 정신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가 승전을 하고 돌아와도 기뻐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룩하는 공적으로 인해 자신이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세울 기회가 박탈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그는 부귀영화를 상속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공훈을 세워 그의 용맹을 과시하고 영예를 독차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상대를 이해하는 면에서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을 보입니다. 일례로 마케도니아에서 제일이라는 명마 보케팔루스가 필립왕과 10살의 왕자 알렉산더에게 왔을 때 보케팔루스는 알렉산더 앞에서 이유없이 날뛰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흥미 없다는 듯이 말을 가져가라고 했지만 이때 알렉산더는 자기가 그 말을 갖겠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보케팔루스를 유심히 보다가 뭔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보케팔루스의 시선을 쫓아보니 그 말은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 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가 보케팔루스에 다가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고삐를 잡고 태양을 향하게 했고 그림자가 사라지자 보케팔루스는 얌전해집니다. 그 이후 보케팔루스는 알렉산더와 더불어 전장을 누비며 그 명마의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말을 다루는 아들의 모습을 본 필립 왕은 매우 만족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내 아들이여! 너의 왕국은 크고 풍요로우리라.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 작은 왕국이리라"
알렉산더가 아시아를 정복하고 통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케팔루스를 이해한 것처럼 피정복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그들 문화를 그대로 소유하고 유지하도록 한 정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필립은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다가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삼게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그의 도덕관과 정치관 뿐 아니라 의학에 대하여도 가르쳤습니다. 알렉산더가 학문과 독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머리맡에 창과 나란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정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두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역사서, 희곡, 시집을 항상 가지고 다녔지요.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말로 가르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였음을 알게되고 불쾌하게 여기게 되어 직접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구두로 가르친 내용을 책으로 발행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요. 나에게 특별히 가르친 내용을 공개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탁월하겠소?”
이미 그는 10대 소년 시절부터 군사적 공훈을 세워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에 아버지인 필립이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동안 아버지의 간섭 없이 ‘마케도니아’를 다스렸습니다. 그 때 그는 시기를 노려 반역을 일으킨 트라키아 부족인 마이디 족을 격파하였고 그들의 수도를 순식간에 함락하였으며 그 도시의 원주민을 내어 쫓고 다른 주민으로 교체한 후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로 폴리스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 연합군을 상대한 케로니아 전투에서도 그의 천재적인 군사 재능을 발휘합니다.
케로니아 전투
왕 겸 군대 사령관 시절
그의 아버지 필립이 암살당하자 알렉산더는 스무살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 이후 그는 약 13년 동안 왕으로서 영예와 열정를 갈구하는 불굴의 욕망을 가진 정복자가 됩니다. 어찌보면 꿈속을 헤매는 사람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그의 꿈을 실현시킬 결심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그는 과감히 그의 계획을 추진하여 나갑니다.
역사가 아리아누스가 인용한 알렉산더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금잔과 은잔 몇 개였다고 합니다. 필립은 5백 달란트의 빚이 있는데 비해 국고에는 60달란트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나마 알렉산더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보물을 전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부하 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제 왕의 보물창고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왕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미소를 띠며
"나는 보물을 다 내준 것이 아니오. 비장의 보물은 아직 내게 있소이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이상이라는 것이오. 그 이상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으며, 또 내일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알렉산더는 8백 달란트를 빌려 비교적 소수의 군대를 이끌면서도 그의 정복의 역사를 펼쳐 나가게 됩니다. 머나먼 인도까지 정복할 정복자로서는 조금 초라해 보이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세계를 정복한 듯 보입니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 휘하의 페르시아 군대를 정복하는 광경
알렉산더가 처음부터 이끈 군대는 실전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정예 부대였다는 점은 정복에 있어서 유리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복자로서 알렉산더에게는 그 보다 더 상당한 수완이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전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무기와 환경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전과 다른 적절한 전술로써 적군을 무찌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군대가 상당한 기간 동안 별로 내부적 불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주로 알렉산더의 인품 덕이었습니다. 그는 부하들의 사랑을 계속 받을 정도로 부하들을 잘 챙겨 주고 아껴주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한 가지 예로서 알렉산더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행진하고 있을 때 한 부하가 물을 구해 바칩니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그의 부하들을 생각하고 “목마른 병사들을 두고 나 홀로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노라”라며 이내 물 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마시지 않으므로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그는 1만 명에 달하는 병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병사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잤으며 항상 소박한 식단을 즐겼고 추운 곳에서 기꺼이 잠을 잤습니다. 항상 최 일선에서 병사를 이끌었으며 그들과 함께 싸우다 부상을 입는 일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갓 결혼한 병사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서 겨울 동안 아내와 함께 지내도록 마련해 주기 까지 했으니 병사들의 인기를 얻을 만도 했지요.
고대에는 백성 모두 군주를 위해 봉사를 하고, 군주는 다른 누구보다 막강한 권위를 갖는 시대가 바로 고대였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모습은 정말로 획기적인 군주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리더쉽은 세계 최강 페르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는 그의 통치 초기에도 그의 친구들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때 알렉산더가 병이 들어 위독하였을 때 필립이라는 의사가 강한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약을 막 알렉산더에게 건네주려고 할 때에 짧은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다리우스 왕이 필립을 매수하여 알렉산더를 독살하려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약을 받아들고 그 편지를 필립에게 손 건너 준 다음 필립이 그 편지를 읽는 동안 약을 마십니다. 결국 그 약에는 독이 없었으며 알렉산더는 병을 회복합니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알렉산더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찾아가서 상처를 살펴보고 그들의 용감한 행동을 찬양하고 그들의 업적에 따라 하사금을 수여하였습니다. 포위 공격이 있은 후에 전리품이 있으면 그는 병사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고 어떻게 부채를 졌는지를 따지지도 않았습니다.(묻지도 따지지도 않는...ㅡㅡ) 전사자에 대하여는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전사자의 유가족에게는 모든 세금과 노무를 면제시켜 줍니다.
결혼
알렉산더가 록산느와 결혼한 데 관하여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실로 그것은 연애사건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목적에 도움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왜냐 하면 정복을 당한 국민들은 그가 자기들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택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였으며, 가장 온건한 그가 단순한 정욕에 압도되었지만 그가 그 여자를 합법적이고 영예로운 방법으로 맞아들일 때까지 자제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하여 넘치는 애착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종교
알렉산더는 어머니 올림피아스처럼 종교심이 강하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격을 주장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알렉산더는 종교 의식을 지키는 데 매우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전쟁 전후에 희생의 제사를 지냈고 어떤 전조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점쟁이들에게 물곤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리비아의 태양신의 신탁소에 가서 묻기도 하였고 바벨론에서 벨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도 참여하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일단 초자연적인 영향력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히면 그의 정신은 크게 교란되고 아주 쉽게 놀라며,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불가사의한 경이이며 예언적 의미를 지닌 줄 생각하였고 그의 궁정에는 직업적으로 제사와 사제임무를 수행하고 장래를 예언하는 술객들과 제사장들이 우굴거렸다.”
악화
처음에 그는 자기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참았고 편견 없이 생각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거짓 고발을 해도 쉽게 곧이듣게 되었고 자신의 영예와 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가혹한 처벌을 곧 잘 내리게 됩니다. 필로타스가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게 되자 알렉산더는 그를 처형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메디아에 통지하여 필로타스의 아버지인 파르메니오도 사형시켰습니다. 파르메니오는 알렉산더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던 것이지요.
알렉산더의 행동 중 가장 큰 오점 중의 하나는 술에 취해 자기 친구 클리투스를 죽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관하여 아리아누스은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굴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악 곧 정욕과 술취함의 노예임을 이 사건으로 들어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자기 비행을 인정하게 됩니다.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더가 자기 친구들을 죽인 데 대하여 자신을 원망했다고 말하였습니다. 3일 동안 그는 자리에 누워 식음을 전폐하였다가 마침내 친구들의 권유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알렉산더는 인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나서 바벨론에 있을 때 열병에 걸립니다. 왕의 일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그의 습관에 따라 제사를 계속 드렸지만 그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말을 못하게 됩니다. 병사들이 문병을 오게 되었는데 왕의 일지에 있는 설명을 기초로 아리아누스는 기술합니다.
“군인들이 줄지어 지나갈 때에 이미 그는 말을 못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스로 머리를 들어 인사를 하고 눈으로 신호하였다.”
이틀 뒤에 알렉산더는 32년 8개월을 일기로 숨을 거둡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이르렀을 때 인도의 현인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여, 누구라도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만큼의 땅은 소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간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당신이 쉴 줄 모르는 활동가이고 잔인하며 당신의 고향에서 나와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온 땅을 배회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죽을 것이며 당신을 매장하기에 족할 만큼의 땅만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는 이 현인들의 말을 죽을 때 다시 언급합니다.
“죽어서 나의 육신이 누울 공간은 한 평 남짓인 것을... 나는 이 한 평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며, 수만 리의 길을 달려왔단 말인가?”
알렉산더는 결국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살게 되었지요.
“나는 길고 미천하게 사느니 차라리 짧고 영광스럽게 살겠다.”
알렉산더는 인간이었기에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똑같은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짧은 기간 동안 굉장한 에너지를 발휘하여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국가의 왕으로 시작해서 세련된 정치가로서 능숙한 전략가로서 잔인한 전사로서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스 문명을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전파했던 열정을 가진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