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7일)아침 7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강남터미널로 가서
안동가는 버스를 타고 안동시 수상구에 있는 안동병원으로 갔습니다.
지하 1층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내려가자 9개의 호실 중 마지막 9호실에 할아버지 이름이 적혀있었고,
상주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있더군요.
나머지 8개 호실은 비어있었고, 그 넓은 장례식장 중에 유일하게 할어버지만 누워 계셨습니다.
저는 오후 2시에 도착해서 할아버지 염은 보지 못했습니다.
친형은 이미와서 부의함을 지키고 있었고, 이제 그 자리를 제게 물려주며 유유히 빠져나가더군요.
29년을 살면서 다른 사람 장례식장을 가본적도 제 친치의 장례를 치뤄본 적도 없는,
장례와 상가집에 대해 초보인 제게 이번 할아버지상은 인생의 공부를 하는 역할도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집안에서 40년만에 직접 치루는 장례이기에 가족친지 모두들 초보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셨기에 치뤄 볼 경험이 없었던 것이죠.
맏아들이신 큰아버지께서도 장례지도사의 지도를 받아 절차를 밟아나가셨고, 중간중간 졔를 지낼 때
수저의 위치도 장례지도사의 지도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저녁 6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옵니다.
서울에서 경주에서 양평에서 안양에서 버스를 대절해 내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음식준비와 자리확보, 끝없는 조문객들의 향으로 인해 어느새 뿌옇게 변해버린 빈소..
경주에서 안동까지의 거리가 3시간은 달려야하는 거리지만,
저도 안면이 있는 아버지 친구분들을 만날 때면 너무나 고맙더군요.
밀려들어오는 조문객들과 대접해야하는 저희들 사이에서 문제없다는 듯이 착착 준비하시는 도우미아주머니들 덕분에
음식준비와 조문객 자리확보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10시즈음 넘어가자 그제야 조금은 숨통을 트겠더군요.
참, 중요한 것이 신발정리 문젠데,
저는 입구에신발이 깔리는대로 조카녀석들과 신발장으로 집어넣었는데, 원래는 그렇게 하지 말라더군요.
그냥 가만히 놔두어야 자기가 벗어놓은 위치를 기억해 오히려 찾기가 편하다고 합니다.
그게 상가집이라며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더군요.
또 신발장에 스스로 집어넣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12시가 지나고.. 새벽이 되자 더이상 조문객들의 방문은 1시간에 1명정도로 줄어들었고,
다음날 아침 발인을 위해 미리 잠을 조금은 자두어야 했기에 다들 구석구석에 위치하여 양복 자켓을 이불삼아 누웠습니다.
저도 밤을 샐 생각이었으나, 사촌도 조카도 모두 자고 인터넷도 불가능했기에 소파에 앉아 2시간정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6시즈음에 모두 기상하여 다시 제를 한 번 지내고, 발인을 할 준비를 하며,
장지에 미리 연락을 해 포크레인 등 상렬행차 등등을 점검하며 바삐 움직였습니다.
저는 손주였기에 흰 장갑을 끼고 한줄짜리 오나장을 어깨에 끼고 발인하며 할아버지 관을 들었습니다.
그 때가 되자, 어디선가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밀려오더군요.
갑자기 엄마가 통곡을 하시며 아버지도 친지분들도 모두 우시더군요.
그렇게 관을 영구차에 집에넣고 장지로 출발했습니다.
할아버지 생가 바로 뒷산에 장지를 준비했습니다.
장지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이미 정해두셨던 곳이며, 저도 20년전부터 이 곳이 장지라는 걸 알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20년전부터 자신의 영정사진과 장지를 준비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영구차를 타시고 집을 들르십니다.
종손인 사촌형이 영정을 들고, 둘째인 저희 형이 혼백을 들고 저는 주변을 따라다녔습니다.
영구차에서 내려 영정과 혼백을 들고 생가를 한 번 돌았습니다.
큰아버지도 작은 아버지도 삼촌도 막내이모도 다들 우시더군요..
그렇게 다시 영구차를 타고 조금 떨어진 장지 입구로 가 관이 차를 떠나기 전 다시 그 앞에서 절을 하고 관을상여로 옮기고
이미 구해놓은 향도들이 상여를 짋어지고 장지로 출발하였습니다.
가는 중간중간 향도장의 지시에 따라 상여를 내려놓고 쉴 때마다 돈봉투를 쥐어주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원래 그렇게들 하는 것이라 돈봉투도 아침에 미리 다 준비해두었고,
향도들은 돈봉투를 받으며 또 힘내서 산을 오르고..
그렇게 3번 정도를 쉬며 장지까지 올랐습니다.
오르니 포크레인이 이미 자리를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더군요.
이제 관만 넣으면 끝나겠구나..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거기서 또 다른 문생각들의 방문과 대접이 시작되더군요.
어떻게 운반되었는지 모를 약 100인분의 식사와 술, 안주들, 테이블, 의자 등등이 이미 셋팅되어 있었고,
아니나다를까 조문객들이 산을 올라 오시더군요.
이제 지관의 명에 따라 관을 땅에 묻는 행사를 치루면서 장남부터 순서에 맞춰 치토를 하며 차례를 밟아 나갔습니다.
그 뒤 봉분을 만드는 작업을 아까 그 향도들이 하는데, 정말 새롭더군요.
이 땅에 모든 산소가 그렇게 만들어지나..싶을 정도로 아주 정성들여 층층이 쌓고 층마다 꾹꾹 밟아 다지더군요.
두 층을 쌓고 다지기 위해 밟을 때 향도들은 장단에 맞추어 리듬을 타며 밟고,
큰 막대기에 꼬인 줄을 연결해 놓으면 그 줄 사이사이에 상주들이 돈 봉투를 끼워넣는 형식의 행사.
저도 그 장단에 끼어들어 돈 봉투를 끼우고 같이 리듬을 타고 밟아 드렸습니다.
그렇게 7층의 잔디층을 쌓고 그 위로 봉분을 둥그렇게 만들어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어찌나 정성을 들이는지 4시간동안 작업을 하시더군요.
그 사이 조문객들을 대접하며 점심을 먹고, 마지막 제를 치루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공식적인 장례 절차는 이제 끝난 셈이지요.
어른들은 상석문제와 묘비 등등을 의논하셨지만, 더이상 손주들이 할 일은 없었습니다.
내일은 삼우제가 되어 더욱 더 공식적으로 이번 장례가 끝납니다.
그리하여 내일 또 안동을 가야합니다.
12월 6일.
할아버지 생신이자 이제는 제삿날.
향년 96세.
누구는 천수를 누리다 가셨고 호상이라 칭하기도 하지만, 아비잃은 자식들은 마냥 슬프기만 합니다.
태어나신 날에 돌아가는 것은 누가봐도 호상이라지만 더이상 할아버지는 안계시다는 사실에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잃어버린 죄인이 된 마음으로 장례를 치룬 것이라 이번 행사에서 어떠한 불편함이라도
모두 자신을 위해 감수해야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누가봐도 오래 살다 가셨습니다.
지병으로 앓다가 끝내 가신 것이 아니라 주무시다가 호흡곤란으로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병원에 급히 데려갔지만 의사는 이미 포기를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몸의 기능이 급속도로 저하되어 그야말로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은 그야말로 평안했습니다.
한 번더 보고 싶었지만, 끝내 8월 이후 할아버지 모습을 직접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이미 할아버지는 67세였습니다.
이미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늙으신 분이었고, 정을 쌓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제가 수능치고 생신 때 뵌 할아버지가 제게 귓속말로
"서울대 갈 수 있나..? 몇 점이고...? 내가 이미 경로당에 서울대간다고 다 말해놨는데 우야노..?"
라고 웃으면서 얘기하셨는데..
아무튼 이제 할아버지는 가셨고, 영원히 죽지않을 무덤만 남았습니다.
이제 몇 년간을 그 무덤을 가꾸는 일로 아버지는 바쁘실 것 같습니다.
처음 치뤄보는 장례상. 초상.
힘들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고, 이렇게나 많은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것이구나..싶었습니다.
지금 왼팔은 근육이 이상한지 힘을 줄때마다 힘줄이 아프고 양다리는 알이 배겨 일어날 때마다 찌릿하고,
양 무릎은 더이상 바닥에 댈 수 없을 정도로(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안닿으려고 합니다) 아리고,
손바닥은 부어버렸으며 어깨는 마냥 무겁기만 하네요.
그래도 할아버지를 위해 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한 고통으로 남겨둘랍니다.
여러 피지알러분들의 덕택으로 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린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가능한한 매일 들어오는 커뮤니티고 유일하게 인터넷상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린 곳입니다.
제게 소중한 피지알에 제게 소중한 분의 소식을 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해 올립니다.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행복하시기 바라며,
솔로분들은 꼭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않게 기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지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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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ta님 근무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일하고 있고, 같은 경상북도 고향을 가진 저로선 부고 소식을 들을때부터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오늘 글을 보니 10여년전 조부모님을 보내드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고향의 부모님께 전화라도 한통 드려야겠습니다.
마음과 몸 추스리시고 기운내십시오. 다시 좋은 글로 만나뵙길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