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적한 교외,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 세탁업자 조씨는 수년 전만 하더라도 주말마다 가족들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할 만큼 형편이 좋지는 못 했다.
막다른 처지에 다다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바다 저 편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는, 종종 과로에 현기증이 날 때면 되려 일을 하다가 죽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보다 비참한 일이야 얼마든지 봐 왔으니까. 그렇게 1년, 2년 처음 미국 땅을 밟으며 한껏 부푼 꿈도 기대도 다 버리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린 그는, 어느 날 우연히도 멀고 먼 미국 땅 버지니아 주 센터빌의 한 거리에 유년시절의 동창이 가게를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취하여 비틀대며 집을 들어서던 중 현관 앞에 쓰러져 새로 산 슬리퍼를 관찰했다.
-전에 쓰던 건, 내다 버렸나. 제법 값나가는 물건인 모양이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가 소파에 기대어 보니, 지난 주 아내와 한참을 다투다 마지못해 구입한 소파의 푹신함이 그를 흡족하게 했다. ‘그다지 선심 쓴 일은 없는데...?’ 새로운 발견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보릿고개를 넘으며 오로지 아끼는 게 제일이라 배워온 그는 집안의 모든 통장을 도맡아 관리 해 왔고, 그의 아내는 작은 물건 하나 살 때도 그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다. 그런데도 집안에는 온통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 일이년 전만 하더라도 꿈도 못 꾸었던. 그도 모르는 새에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주말 저녁이면 빠짐없이 가족들과 외출을 했다.
스테이크와 적포도주, 실은 여전히 소주 한 잔에 순대 국 한 사발이 그리운 그였지만 나름대로 유쾌한 사치였다. 딸과 아들이 프린스턴과 버지니아 공대, 소위 명문대학교에 입학 했다는 사실 또한 그를 흡족하게 했다. 비록 시기를 못 맞춰 넓어진 집은 좀 더 한산해 졌으며, 셋, 혹은 둘이서 주말 외식을 즐겨야할 일이 잦아졌으나 과거를 거닐 때도 두통을 수반할지언정 소파는 더 포근했다. 더할 나위 없는 삶이다, 미국 만세.
그러던 어느 날 정오, 평소처럼 터놓고 지내는 직원에게 점포를 맡겨두고 집에 들러 주방에서 들려오는 지글 지글 고기 볶는 소리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음미하며 시장함을 잊어볼까 TV를 켠 그는, 이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어젯저녁까지 저녁상을 마주 두고 시시한 TV 프로 이야기나 늘어놓던 아들의 모습이 뉴스 화면의 한 편을 차지한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든 그는 수신음이 길어지자 가난이나 죽음 따위보다 곱절은 두려운 일이 세상에 아직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아직 주방에서 점심을 차리는 일이 덜 끝난 아내와 마주한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두 다리로 힘겹게 거동하며, 결국 아내의 부축을 받아 아들의 책상 앞에 당도하고는 서랍 속에서 자물쇠가 채워진 한 권의 노트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