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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6/23 21:08:12
Name 럭키잭
Subject [일반] [단편소설] 천국을 향하여 - 외다리 십자군
천국을 향하여(2) - 벌거숭이 기사
※옴니버스 단편이므로 전편인 '열쇠'와는 내용상 연관이 없습니다.


1)출애굽기 - 出(나서다) 애굽(에집트). 헤브라이민족이 에집트를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땅을 찾아 떠나는 구절.
2)여호수아 - 모세를 따라 나선 헤브라이의 장군.
3)골고다 언덕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오른 언덕.

다시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창세기, 1)출애굽기, 모세와 2)여호수아를 되새기며 내 지난날의 의미를 찾는다. 떨어져나간 다리는 이제 다시 나지 않지만, 서른 가구 남짓의 작은 영지는 서서히 지난 시절의 모습을 찾고 있다. 무너진 헛간을 세워올리고, 잡초 무더기 밀밭에 불을 놓으니 지금은 그저 한산한 이 땅도 다시 가을을 맞아 밀과 수수를 거두는 일손들로 분주해질 것이다.

한 바탕 눈보라가 지나면 살얼음 웅덩이 아래 싹이 트고, 새싹은 자라 잎을 틔우며 시원 상쾌한 바람이 밀밭을 흔들 때면 그 너머 금결의 장관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를 찾는 듯 하나, 이제 세 뼘 남짓의 나무도막으로 대신하는 이 오른 다리처럼 세
월을 보내도 다시 오지 앉는 것이 있다.

지중해를 넘고 사막을 가로질러 오직 모래뿐인 성지에 육신을 묻은 내 형제, 친우들.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이 병기 쥔 자의 숙명이라지만, 붉은 십자 깃발아래 사막의 모래로 사그라간 그들은 신이 창조한 이 하늘 아래 무엇을 남겼나. 세상이 그들을 영웅이라 추앙한들, 오로지 아비 여읜 아이와 아내, 시간에 희석되는 그리움의 여운만이 그들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3)골고다 언덕은 가 보셨나요.

행여 성치 못한 몸뚱이가 녹이라도 슬까, 그저 자고 먹는 일이 무료할 때면 쉬엄 쉬엄 오솔길 따라 느티나무 언덕을 오른다.
후덥지근한 정오의 바람, 쏘아 붙이는 햇살을 피해 그늘이 드리운 느티나무 한 편에 기대면 '성에 다녀오는 동안 집안 잘 보고 있으라'
는 어미의 엄명을 어기고 끼리끼리 들판을 뛰놀던 아이들이 모여들어 이것 저것 물어댄다.

- 모래밖에 없더구나, 그래서 다리 한쪽 놔두고 왔지.

까르르.

매번 같은 농담이라 이제 지루할 법도 한데 무엇이 그리도 재미날까.
동병상련이라던가, 젊은이들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머지않아 아비 잃은 아이들은 자연스레 저희들끼리 어울렸다.
누구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 꺼리는 판에, 성전 영웅이라니 그저 자랑스러운지 제 아비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차마 ‘네 아비는 개처럼 죽었지.’란 말이 떨어지지 않아, 오늘도 그저 빙긋이 웃으며 자두나 두어 개씩 쥐어준다.

- 하나 더 달라고, 그래. 너는 키가 제일 작으니까. 손을 내어 보거라.
아무도 네 손 떼어가지 않아, 도리질 치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어 찬히 더듬어본다.

-손 크기가 제법 자랐군, 아직은 멀었다.

아이의 아비들, 이미 얼굴이며 이름마저 희미해가는 그들이지만 이 아이의 아비만은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개울가 건너 대장장이, 그 덜 떨어진 도제 말인가. 서툰 망치질 보다야 말재간이 제법인 친구였지.

그는 시칠리아 근해의 거센 파도에 휘말려 성지에 다다르지 못 하였다.
그의 처진 눈매를 쏙 빼 닯은 이 아이는 제 또래보다 키가 두 뼘은 작지만 이야기를 어찌나 신명나게 하는지, 건포도 한 줌 쥐어주고서 유래
모를 재담들을 듣다보면 한 나절 날이 저무는 줄 모른다. 아직은 일손이 많이 모자란 편이라 이 고사리 손도 머지않아 망치를 쥐게 될는지
모르겠다.

-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줄 테냐, 재미있으면 두 개 더 주지.

아이는 일부러 헛기침을 해 대며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열 살이 채 되지 않을 나이에 영주를 앞에 두고 흥정을 벌이는 모양새가 제법 능청스럽다.

“오줌 똥 싸고 방귀나 뀌는 녀석!” / “밤이 무서워 꽁무니 빼는 겁쟁이 놈.”

바람은 아주 성질이 고약하지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에서 패한 바람은 목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말하기를

“너 이 자식, 감히 이 몸에게 망신을 주었겠다. 이 빌어먹을 놈 저 멀리 날려 죽여 줄 테다!”

평소 바람의 성격이 고약한 것을 알고 있던지라,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리란 생각에, 나그네는 꾀를 내어 이렇게 답했습니다.

“위대한 바람님, 무엇하러 이 천한 것의 옷을 벗기려 하시는지 모르나, 본래 저처럼 천한 태생은 아무데서나 옷을 벗고 드러눕습니다. 헌데 바람님은 고작 이런 천한 놈이 옷 벗어던지고 물가에 뛰어들었다 하여, 내기에서 졌다고 성내시니 이 일이 알려지면 천하에 웃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듣던 바람은, 나그네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여 되물었습니다.

“좋아. 그럼 이 몸이 어느 놈의 옷을 벗겨야 내기에 이긴 것이 되겠느냐?”

“그야 당연히 이 나라의 왕이시지요.”

“그 놈이 이 나라에서 제일 잘난 인간이더냐?”

“그럼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니 함부로 옷을 벗지도 않으시죠.”

나그네와 바람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던 해님은 바람보다 왕의 옷을 먼저 벗기려는 생각에 바로 궁성으로 달려가 햇볕을 쨍쨍 내리쪼였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란 놈이 얼마나 고약한 인간인지, 온 나라의 가축과 백성들이 모두 가뭄과 무더위에 뒤져 나자빠지는 중에도 치렁치렁 덧 걸친 천 쪼가리 한 겹을 벗지 않아서, 이를 엿보던 바람이 태풍과 눈보라를 일으켜 보았지만 온 나라 가축과 백성이 다 떠내려가는 판에도 이 미친 왕놈은 궁궐 첨탑에 올라 담요를 몇 겹은 더 끼워 걸치고서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길을 지나던 동방상인이 혀를 차며 말하기를,
“두 분은 힘이 세지만 머리를 사용할 줄 모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은 성을 내며
“그렇담 너는 저 고약한 놈의 옷을 냉큼 벗겨낼 재간이 있다는 말이더냐?”

“그럼요, 어렵지 않지요.”

해님과 바람의 다툼에서 시작한 내기는 어느새 해님과 바람, 동방상인간의 내기가 되어버려 해님과 바람은 동방상인이 일주일의 시간 내에 왕의 옷을 벗겨내면 천금을 하사하겠노라 약속했답니다.

헌데, 당장 달려가 왕의 옷을 쥐어뜯어도 모자랄 동방상인이 궁궐로 달려가기는커녕 한가로이 낚시에 열중키에 바람이 물었습니다.
“일주일 내로 왕의 옷을 벗기지 못한다면 너 이놈 죽은 목숨이다. 그리해도 좋더냐?”

“그럼요, 하루면 족합니다.”
약속한 시일의 엿새가 지나고, 그제서야 궁궐에 당도한 동방상인은 왕을 대면하자마자 대뜸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옷을 바치겠노라 아뢰었습니다. 이미 해와 바람의 내기에 시달린 터라 온전한 옷가지가 남아나지 않던 왕은 기쁜 마음으로 옷을 걸쳤으나, 이 옷은 신기하게도 입어도 입은 것 같지가 않으며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 조차 않았습니다.

“이 옷은 착한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옷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허허허” 그저 헛웃음만 짓던 왕이 그대로 신하에게 물으니, “짐이 오늘 나들이를 나갈까 하는데, 지금 걸친 옷은 어떠한가?”

그러자 신하가 답했습니다. “험, 험, 아아주 늠름하십니다.”


- 그래서, 왕은 정말로 벌거벗은 차림으로 나들이를 나섰는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리석게도 동방상인의 말을 굳게 믿은 왕은, “내 옷이 보이지 않는 자는 필시 악당이 분명하니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고 나들이 내내 모든 사람이 왕의 옷차림을 칭찬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느새 해가 저울어, 이내 치친 몇몇 아이는 풀밭 위에 곤히 잠들어있다. 나는 오늘도 흥미로운 재담거리를 들려준 작은 아이의 노고를 치하할 겸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건 칭찬이 아니라 아첨이란다.

아직은 의족에 익숙하지 못한 탓일지. 언덕을 오르기보다 내려가는 길이 훨씬 버거워 결국은 머리 두셋은 더 작은 아이들의 부축을 받아 비탈길로 내려선다. 부하들을 사막에 두고 온 외다리의 성전 영웅. 왜일까, 무더위가 한창인 이때에 벌거벗은 기분이 드는 것은.

          
'이교도를 죽이는 것은 천국을 향하는 길이다!' 십자군을 선교하는 은자 피터(Peter the Hermit)


유태인 학살을 자행하는 십자군 선발대


전투경험이 전무한 십자군 선발대는 결국 전멸하고(농민이 주축), 그들을 이끈 '은둔자 피터'만이 겨우 살아 돌아왔다.  


당신 뜻대로 하늘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마태복음 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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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호라이즌
09/06/24 05:18
수정 아이콘
글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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