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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06 16:16:29
Name 퐁퐁퐁퐁
Subject [일반] 직접 만든 초콜릿을 모두 떨어뜨린 이야기

  초콜릿은 녹여서 굳히면 끝이야.

  물론 그 ‘녹이고’ ‘굳히는’ 게 만만찮은 일은 아니죠. 그렇게 쉬우면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이 왜 있게요. 하지만 그냥 ‘수제입니다’ 하고 생색내서 선물할 용도라면 꽤 간단해요. 요즘에는 만들기 키트도 정말 잘 나와서, 설명서에서 하라는 대로 녹이고 붙이고 굳히면 꽤 근사한 초콜릿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걸, 그때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중학교 이학년 때였어요. 하루 이틀 뒤면 발렌타인 데이였죠.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겠지만, 그때 전 같은 반 남자애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주 촌스러운 이름의 남자애. 키는 크고, 얼굴에는 사춘기 남자애답게 두드러기가 한두개 나고, 뻐드렁니 두어 개 덕분에 도깨비를 좀 닮았죠. 하지만 운동도 공부도 썩 잘하는데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게다가 좀 놀았으니. 저한테는 언감생심 감히 말 걸어보기 힘든 애였어요. 괜히 그러다 주변 노는 여자애들한테 한 소리 들을까. 걔한테 한 호감 표현이라면 딱 하나. 땅바닥에 떨어진 이름표를 주워다 필통 안에 몰래 넣은 거요. 생각해보니 이것도 ‘걔한테’ 한 건 아니겠네요. 혼자 만족이었으니까요.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발렌타인 데이가 오니 없던 용기가 생겼어요. 친구를 불러서 우리 집 부엌에서 ‘중탕’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손이 참 둔하거든요. 초등학교 실습시간에 팬케이크도 홀랑 다 태워먹은 무서운 재능이 이 순간에도 나타나더군요. 중탕 그릇에 있던 물이 초콜릿 그릇에 다 들어가고, 불을 너무 세게 해서 기름이 분리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사온 가나초콜릿을 다 써서 나가서 사오고, 또 사오고. 어떻게든 보잘것없는 초콜릿 여덟 개를 만들었어요. 주방은 난리가 났는데 때마침 엄마가 딱 들어오더군요. 가스렌지에 늘어붙은 초콜릿과, 더럽기 짝이 없는 딸내미를 보더니 한마디.

  “그거 누구 줄려고?”
  “……있어!”

  평소 같으면 소리 빽 지르고 한숨 팍 내쉬고 걸레를 북북 문질렀을 엄마가, ‘발렌타인 데이’와 ‘초콜릿’을 보고 뭔가 짚이는 게 있던지 아무 말도 안하더군요. 이걸 어디다 넣어야할지 고민하는데, 엄마가 푸른색 통 하나를 주더라고요. 그래도 예쁜 포장지에 넣어서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사실 이정도로 잔소리 안 들은 것도 행운이라 일단 거기에 넣긴 넣었어요. 이런 통에 넣어야 직접 만든 느낌이 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수긍이 가기도 했고요.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서 그걸 꺼내서 가방에 넣을 때는 제법 가슴이 떨렸어요.

  남녀공학 중학교라 그랬는지. 우리 학교가 공부 안하는 학교라 더 그랬는지. 발렌타인 데이에 학교가 아주 난리였어요. 뭐, 저도 초콜릿을 가져왔으니 남 욕할 처지는 못 되었죠. 그런데 남들이 가져온 초콜릿은 좀 다르대요. 커다란 바구니에 뭐가 잔뜩 들어있고 리본으로 칭칭 감은 것. 인형이랑 같이 포장한 것. 그런 것들을 보다보니 뭔가 초라해지더군요. 점심시간에 애써 초콜릿을 꺼내서 운동장에 나왔어요. 멀리서 축구를 하는 걔 얼굴을 봤어요. 아침에 걔가 받은 다른 초콜릿들을 생각했죠. 난 그냥 내 두 손에 들린 이 초콜릿이 없었으면 했어요. 괜히 이런 거 주고 망신만 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말이 참 하고 싶은 거예요.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꼭 전해주고 싶었어요.

  상자를 꼭 쥐고 일어났어요. 심장이 막 뛰어요. 멍충이처럼 손도 발발 떨리고요. 애써 꼭 쥐고 한 걸음 앞으로 가려는데, 돌에 걸려 몸이 앞으로 확 넘어졌어요. 통에 담겼던 초콜릿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져 버렸어요. 하필 거기는 운동장이었던 터라. 초콜릿에 모래까지 잔뜩 묻었어요.

  차라리 초콜릿이 없었으면, 아까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물이 나왔어요. 모래를 잘 털어봤지만, 아까보다 더 초라해 보였어요. 무릎은 까지고, 손은 흙투성이에다, 못생기고 더러운 수제 초콜릿. 이런 꼴 안 보여준 게 다행이었죠. 피가 나는 무릎을 어떻게든 문지르고 교실로 올라갔어요. 교실 문 앞에서 눈물 다 닦고요. 친구가 그거 왜 안주냐고 그러는데, 이걸 어떻게 줘. 하고 말았어요. 그애의 책상 위에는 근사한 초콜릿 바구니가 하나 있더군요.

  집으로 돌아가 드디어 혼자가 되었을 때. 난 조심스럽게 초콜릿 통을 열어봤어요. 모래 알이 몇 개 붙은 초콜릿을 다시 잘 털어낸 뒤 그냥 내가 먹어버렸어요. 탄 맛이 나는 게, 맛이 참 없더라고요. 약을 삼키듯 초콜릿을 모두 삼키고는, 설거지를 하고, 통을 개수대 위에 올려놨어요. 아무 일도 없는 척, 그러고 싶었는데. 펑펑 울었어요. 촌스럽게.

  하지만 끝은 아니었어요. 학년이 끝날 때 쯤, 마지막으로 짝을 바꾸는 날이었어요. 두근거리며 뽑은 제비가 그 애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기뻐서, 고개도 못 돌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 애가 이번엔 저랑 짝이라고 하면서 막 웃더라고요. 조심스레 말을 얌전히 걸어보려고 하는데, 걔랑 친한 여자애 한 명이 말을 끼어들었어요.

  “짝 바꿔주면 안 돼?”

  이번에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여자애가 큰소리로 소리쳤어요. 얘 막 울려고 해. 둘이 친한 것도, 가까운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마저 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야, 하고 자리에서 확 일어났어요. 그때 그 애랑 눈이 딱 마주쳤어요. 눈이 동그래진게, 깜짝 놀란 얼굴이었어요. 그대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뭐라고 말한다면 참 좋았을텐데. 전 가방을 들고 확 가버렸어요. 더 이상 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실은, 짝을 바꿔달라는 말을 그 애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았던 거지만요.

  결국 멀리 떨어져 앉은 제게, 며칠 뒤 그 애가 다가와 말을 걸었어요. 꼬리표를 받았는데, 몇 점 받았냐고 굳이 물어보더군요. 내가 널 드디어 시험에서 이겼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냥 대꾸도 안 했어요. 초콜릿 만드는 것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더 서툴렀거든요.

  얼마 전에 방 청소를 하다가, 낡은 필통에서 뭔가를 뚝 떨어뜨렸어요. 남몰래 넣어둔 그 애의 명찰이더라고요. 딱히 보관해둘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었는지. 그때가 벌써 십 몇년 전이니 돌려줄 수도 없고.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공연히 원망만 했던 그때가 미안하기도 해서, 글을 적어 봤어요. 널 정말 좋아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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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06 16:26
수정 아이콘
글이 달달해서 너무 좋네요... 그 초콜릿 혹시 제 껍니까?
바위처럼
15/07/06 16:27
수정 아이콘
글이 참 초콜렛을 닮았네요. 카카오 70%정도의..
단약선인
15/07/06 16:2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중2때 생각이 나네요. 좋아하던 여자애가 왜 내 짝을 좋아해서 나한테 와서 그걸 표현하는지... T.T
언뜻 유재석
15/07/06 16:30
수정 아이콘
지금도 그 때 초콜릿 이야기를 하며 아직도 서로 놀리고 그래요. 망할 서방놈...

이런 결말이 아니라서 참 다행(?) 입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가슴 떨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너의 시험점수 듣고 웃지 말았어야 하는데.. 미안해 은지야...
Nasty breaking B
15/07/06 16:3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쓰시네요.
15/07/06 16:32
수정 아이콘
모래알이 붙은 초콜릿이 아니라 초콜릿 가루가 붙은 모래조차 받아볼 일이 없었던 쪽이라 읽으면서 씁쓸하네요.

학창시절에 이런 달달한 경험 한번 못해보다니ㅜㅜ
최종병기캐리어
15/07/06 16:36
수정 아이콘
어린시절의 풋풋한 향기가 나는 글이네요... 그때는 다 그렇죠 뭐...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 말도 못하고, 별 것 아닌 일에 상처받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의미부여하고 설레던...

저도 중학교때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삐삐가 유행했었는데, 지금처럼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할 수가 없으니 친구들의 삐삐번호랑 집전화번호를 조그만한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었죠. 어느날인게 제가 그 수첩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체육수업을 나갔다가 수업을 땡땡이 치고 교실에 들어왔어요. 근데 제 그 수첩에 한 여학생이 자기 번호를 적고 있는걸 봤죠. 전 아무 생각없이 '니가 번호를 왜 적냐'며 한마디했고, 그 친구는 당황해하면서 횡설수설하더니 결국엔 울어버렸어요... 전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데 말이죠.

6~7년쯤 지나서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절 좋아했었다고 하더라구요. 키도 크고(전 전교 1번일정도로 작았었거든요) 얼굴도 예쁘장하고 공부도 잘하던 친구였는데 여전히 예쁘더라구요. 내가 미쳤지. 그런애를 몰라보다니...
블루라온
15/07/06 16:59
수정 아이콘
그래서 여자들한테는 무조건 잘해줘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 어떻게 포텐이 터질지 몰라요...
삼색이
15/07/06 16:55
수정 아이콘
달달하네요
마스터충달
15/07/06 16:58
수정 아이콘
달달한데 해롭지 않은 글이라니!!
8월의고양이
15/07/06 16:59
수정 아이콘
저도 초딩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었죠. 우리 둘이서 얘기할때 다른 친구들은 다 눈치채고 키득거리면서 웃던데 왜 걔는 그리도 눈치가 없는건지... 좋아한다 좋아했다 그 말한마디 못해본게 후회가 됩니다ㅠ
tannenbaum
15/07/06 17:02
수정 아이콘
아... 달달하다.
남녀공학에는 이런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있는거군요.
지금만나러갑니다
15/07/06 17:04
수정 아이콘
하하
수정비
15/07/06 17:26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때 좋아했던 애랑 5분 짝이었던 게 문득 떠오르네요.
2학기 되어서 짝을 바꾼다고 복도에 두 줄로 서있는데... 옆에 남몰래 좋아하던애가 서 있어서 그때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그런데 자리 배정 받아서 앉고 5분쯤 지났을까.
선생님이 걔가 앉아 있는 줄에 분단장할만한 애가 없다며 다른 줄에서 남자애 하나를 데려와 걔랑 자리를 바꾸라고 ㅠㅠ;;;

제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더 짜증나는 건 바뀐 제 짝이 저를 학기 내내 괴롭혀서 그 학기는 참 괴로웠고.
자리를 옮겨간 좋아하던 애는 바뀐 짝이랑 알콩달콩 잘 지내더니... 학년 올라가선 사귄다는 얘기가 들리던;;;;;;
王天君
15/07/06 17:35
수정 아이콘
이게 달달한가요? 애잔하고 서러운데ㅠ 어쩌지 못하는 못난 마음을 꺼내놓으려니 창피하기 그지 없었다는 이야기는 지나간 일이라도 웃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차라리 주기라도 했으면 창피하고 끝났을 텐데. 혼자 초콜릿을 먹어치우는 그 심정에 괜히 제가 다 속상하네요.
저 신경쓰여요
15/07/06 18:51
수정 아이콘
원래 남초 사이트는 커플이 잘 안 되면 행복하고 달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흐흐;;
15/07/06 19:15
수정 아이콘
아주 천천히.. 아주 달달하게.. 읽으면서 마음이 참 뜨끈해지고 당시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저절로 그려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칼라미티
15/07/06 19:48
수정 아이콘
아련하네요.
사악군
15/07/06 20:47
수정 아이콘
여친에게 수제초콜릿 만들어줬던게 생각나네요.. 전 초콜렛이 그런 기름반 설탕반 미량의 카카오가루로 이루어진건지 정말 몰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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