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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06 13:00
그 여제가 아마도 본인 아들 눈알을 뽑은... 장본인이죠?
샤를마뉴와 비잔틴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합니다. 오히려 서로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세력권이라 서로 무관심에 가까웠다고... 그것도 그렇고,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제위를 받을 때 탐탁치 않아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서유럽에서 적수가 없는 실질적으로 황제와 다를 바 없는데, 교황에게 제위를 받는 형식을 취할 이유가 없었죠. 오히려 대관식에 안달난 건 교황 쪽이었어요. 교황의 의도는 '독립' 이라기 보다, 롬바르디아의 위협에서 보호받을 명분이 필요했던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죠.
15/07/06 13:08
누군가 그러더군요. 비교적 약체인 서방의 제국군과 롬바르디아란 늑대를 쫓기 위해서 카롤루스라는 사자를 끌어들인 셈이라고 말이죠.
15/07/06 14:32
맞아요. 샤를마뉴보다 교황이 오히려 대관식에 집착했다고 합니다.
롬바르디아로부터의 보호도 중요했지만, 동로마로부터의 간섭도 배제하려고 했던 것도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15/07/06 13:07
동로마 입장에서도 카롤루스의 프랑크와 싸우기에는 뭐하지만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교황 정도는 교체 가능했습니다.
단지 당시 여제 이리네가 졸 인기가 없었을 뿐이죠. 그리고 사실 카롤루스는 동서로마 통합이라는 제스쳐 속에서 이리네에게 청혼까지 합니다. 이리네는 이걸 받아 들일 생각까지 하죠. 이런 속창아리 없는 짓에 빡쳐서 동로마 귀족들이 이리네를 폐위하고 미카일 1세가 대신 제위에 오릅니다. 미카일 역시도 강한 프랑크와 싸우기보다는 일단 손잡는게 낫다고 생각해서 결국 제국 황제로 용인하죠.(로마제국은 아니지만) 말씀하신 내용은 어떻게 보면 로마사에서 사실은 아닌게 이런 행태는 11세기 노르만 족에 제국이 남부이탈리아를 잃기 전까지도 꾸준합니다. 경쟁과 협력 속에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형태로 꾸준히 영향을 주고 받죠. 단절은 사실상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제국이 십자군에게 짖밟히고 나서 완전히 동방 민심이 서방에게서 떠난 후에나 있던 일이고 종주권에 대한 경쟁, 분할, 협력 등은 꾸준히 일어 났습니다. 심지어 신성로마제국과는 결혼 동맹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카롤루스 시절에 서방에 대한 완전한 종주권 상실은 너무 논하기 이르다고 봅니다. 특히나 이탈리아에 라벤나 총독부가 존재했던 시절에 말이죠.
15/07/06 15:52
라벤나 총독부는 이미 그 이전인 751년에 롬바르드인의 공격에 의해 문 닫은 것 아닌지요? 소위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한테 넘겨준 것이 라벤나고요. 남부 이탈리아에 비잔티움 세력이 잔존하기는 했으나 노르만인이 나타날 때까지 교황과의 긴장 관계에 있었지, (물론 교황이 위협을 느끼기에는 충분했겠지만) 실제로 교황을 교체할 정도로 힘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세력은 751년 이후로는 더 이상 엑사르케이트 라벤나라고 부를 수는 없는 세력이죠.
15/07/06 16:04
롬바르드 족에게 라벤나가 함락 되었어도 그냥 관용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어서 그냥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실 님 말이 맞는 거죠. 찾아보니 그 이후는 랑고바르디아 테마로 백년을 가다가 Catepanate of Italy 라고 쓰더군요. 그리고 제가 잘못 썼지만 (미카일 1세가 아니라) 니케포로스 1세 정도 시절이면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죠. 실제로 교황이나 카롤루스도 그렇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구요. 또한 로마 바로 아래 몬테카시노나 나폴리 까지 제국령이었는데 정말 별 거리차이도 없죠. 문제는 그 니케포로스 1세 부터 바로 제국 북방에 불가르족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는 완전히 여력을 상실해 버렸죠. 실제 그 니케포로스 1세도 불가르족 칸 크룸에게 죽어서 두개골이 술잔이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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