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라면 내가 은수저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 때 전국민의 평균적인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80년 대 후반부터 90년 대 초중반까지 난 갓난아기에 불과했지만 내 기억은 아직 또렷하게 살아있다.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랐다고 생각한다.
집에 커다란 전축이 있었고 LP판들이 많았다.
주말이면 청소기 소리와 함께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선...류의 음악들이 흘러나왔고
70~80년대 김광석 조용필 박강성 녹색지대 김종환 등등등 많은 인기가수들의 음악도 들리곤했다.
아직도 가끔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나이에 안맞게 그런 노래들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듯 하다.
오후에는 가족들과 모여앉아 직접 돈까스를 다지고 튀김을 입혀 맛있는 저녁식사를 진지하게 도모했고
때로는 돗자리와 KFC 버켓을 사들고 남한산성에 놀러가서 물놀이와 산놀이를 즐기곤했다.
유년기 나의 앨범을 보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진을 찍고 함박웃음을 웃는 사진이 많다.
부모님 모두 독서와 음악을 사랑해서 책도 상당히 많았는데 종류불문 닥치는 대로 읽다보니 맨날 책만읽는다고 걱정하던
부모님의 얘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로인해 시력이 어릴 때 부터 많이 떨어졌던 것 같다.
도스가 아닌 윈도우가 장착된 컴퓨터를 동네에서 제일먼저(내생각엔..) 구입했었고, 호호 불어서 팩을 끼워넣는
게임기도 가지고 있었다. 아빠와 붐버맨, 람보, 펭귄이 귀엽게 짬푸하는 게임등등 다양한 게임을 섭렵했고
항상 둘이 게임을 너무 많이해서 엄마한테 혼나곤 했다.
공부도 열심히했고, 손과 발이 새까맣게 될정도로 동네에서 다방구와 숨바꼭질, 술래잡기, 팽이치기, 미니카 굴리기 등등의
놀이들을 하곤 했다.
걱정이 없었고, 아빠는 회사와 가족에게 엄마는 가정에 충실했다. "유복했다" 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은 그렇다.
어릴 때 형과 싸워 질질 짜든가 땡깡부리다가 벌섰던 기억말고는 좋은 기억만 가득했다.
IMF로 동수저보다 못한 짝을 잃은 젓가락 신세가 되었다.
쫓기듯 이사를 했고,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했던 동네,친구,주위 사람들과 인사도 한 마디 못한채 떠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낯선곳에서 난 성적도, 친구도 얻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는 하루가 멀다하고 다퉜고, 엄마 아빠중에 누구를 따라가겠냐는 질문에 그냥 울기만 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겉돌았고, 책, 혹은 컴퓨터게임과 함께 3년을 허송세월했다.
중학교 시절 나를 키운건 8할이 라면과 김치찌개였다. 그 3년간의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 것을 보면
내 성장기에서 3년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99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있다. 대학시절 DJ도 했고 외모도 출중하며 사교성도 좋아서
동네 아줌마들과 자주 재밌게 떠들던 모습이 기억이난다.
어딜가도 꿀리지 않던 나의 엄마가 16년동안 쉬지도 못하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게 썩 쉽지않다.
형은 그 와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인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적응을 해버린 바람에 정신못차리고 노느라 바빴다.
삶에 익숙해지니 다시 원래의 내가 나왔고, 난 친구들을 좋아했기에 그것이 마냥 좋았다.
여전히 집은 어려웠고 그 와중에 엄마는 내가 갖고싶다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사주었다.
철이없었고 철이없었다.
고등학교 때 하나 소원이있었다면 얼른 졸업해서 알바를 구해 내가 내 돈을 버는 것이었다.
3년이 훌쩍 지나갔다.
국어가 좋았고,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아까운 사람들에게 학생들을 구원해주고 싶어 선생님을 꿈꿨다.
그 덕에 사범대에 진학했다.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알바는 대학교 때도 계속 되었다. 뷔페 주방, 약국, 아웃바운드 전화, 술집, 카페, 일용직 등등
내가 번 돈으로 실컷놀고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해서도 바로 알바를 구해 복학 할 때 까지 알바를 했다.
복학해서도 2년간 알바를 했고, 방학 때는 투잡도 뛰었다.
4학년이 될 무렵 모든 알바에서 손을 땠다. 돈이없었고, 교생실습은 나가야했다.
예전에 만들어둔 신용카드에서 정장,구두,넥타이,셔츠 등등의 돈이 나가서 고스란히 나의 빚이되었다.
엄마에겐 교생실습 비용과 급식비. 카드로 긁을 수 없는 그 돈만 죄인처럼 청구할 뿐이었다.
실습이 끝났고 모든 빚이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알바를 구하면서 틈틈히 일용직이나 일일알바를 했다. 야외결혼식, 출장뷔페, 캠핑장관리, 술집대타 등등
오늘도 새벽에 나가서 물탱크청소와 중,고등학교에 바퀴벌레 약을 뿌리는 일을 하고왔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작년 까지만 해도 나에게 돈을 벌라고 닥달하는 엄마가 미웠고, 알바에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걸 멀리한 내가 미웠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은 하지만 짜증났던 적도 많고 힘들고 땀에 절어 집으로 향할 때 화가났던 적도있다.
하지만 이제는 단톡방에 "물탱크청소하러왔다 질문받는다" 등의 헛소리도 잘하고
짧게, 혹은 길게 쌓여가는 나의 이력이 조금씩 자랑스러워 지고있다.
혀 잘놀려서 신발도 잘 팔았고, 커피 드립도 내릴줄 알고 스팀기도 다룰 줄 안다. 바퀴벌레 약을 어디에 뿌려야 효과적인지도 알고있으며
크레페도 잘만든다. 캠핑장에서 숯 달 굴줄도 알고 약국에서 처방전입력도 무지하게 잘한다.
맥주 맛있게 따르는 건 기본이며 접시 치우는것도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타일러 자녀 과외시키는 일도 해봤고, 백화점 해산물코너 뒤에서 어떤일들이 일어나는지도 알고있다.
야외결혼식과 뷔페에는 세팅과 뒷처리에 엄청난 수고가 따른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 알바들을 하며 벌었던 돈은 지금 행방이 묘연하지만 내 기억과 경험들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아르바이트 동료들, 혹은 매니저,사장 님과 아직도 연락을 하며 지내는 경우도 많다.
이제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알바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알바가 조금은 즐겁다. 내가 이대로 나의 길을 걸어서 국어교사가 되든, 혹은 다른일을 하게되든 죽이되든 밥이되든
나의 모든 경험은 살아 숨쉬어 서포트해줄거라 믿는다.
정승같이 벌어서 개같이 쓴적도있고, 아직도 돈에 대한 관념이 조금 미비해서 저축을 잘 하지 못한다.
내가 그럴 때에도 잠 한 숨 덜자고 주말 한 번 덜쉬면서 편의점에서, 피시방에서, 마트에서, 노가다현장에서 주야없이 일하는
또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루 두끼 꼬박 챙겨먹고, 알바도 이제 골라서 하며, 가끔 술도 마시고 게임도하고, 금요일엔 가끔 치맥도 하는
이런 내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정말 삶에 치여 빠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힘들다고 느낄 때 나에게 묻는다
"너만 힘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