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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4/02 04:59:37
Name Vivims
Subject [일반] PC방 아르바이트 첫 날,


  오늘은 PC방 아르바이트 첫 날이다. 새벽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갑자기 손님들이 시끄러워졌다. 과거에는 흡연석이었던, 지금은 흡연 부스가 조금 더 가까울 뿐인 자리에서 한 아저씨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누군가에게 훈계를 하고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가보니, 한 청년이 앉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운 모양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 청년은 이 피시방 한정 요주의 인물이었다. 유난히 화가 많이 난 아저씨가 연신 내게 “블랙리스트 인수인계 안 받았냐.”고 쏘아붙였고,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라고 웃는 낯으로 굽실거렸다. 사실 그런 인수인계는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경험이 몇 번 더 지나가면, 나는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 테고 그때는 나도 꽤 능숙한 PC방 아르바이트가 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운터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PC방이 참 휑하다. 나는 모니터로 듬성듬성 이름이 새겨진, 고작 여덟 명의 손님이 이곳에서 어떤 역사를 써나갔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나에게 한 소리 했던 아저씨는 이곳에서만 400만원 어치 돈을 썼고, 그 아저씨가 “나이도 새파란 놈이!”라며 훈계했던 그 청년은 사실 88년생으로 새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150만원이나 썼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얼추 150만원 어치의 시간동안 서로를 견제했을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들을 나만의 리스트에 집어넣었다. 보다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손님으로.


  내가 졸음을 쫓기 위해 불닭볶음면 하나, 자판기 커피 세 잔, 코코아 한 잔, 담배 5개를 태우는 와중에도 손님들 각각은 나름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내가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바로 앞자리 손님은 용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는 사냥터의 몹이 다시 생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프로토스의 한 방 병력이 이제 막 출발한 참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는 계속해서 내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날렸다. “내 자기소개서 첨삭 아직 안 됐어?”


  공채 첫 도전에서 모 대기업의 최종면접까지 갔던 이 친구 녀석은 차라리 서류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이 나았겠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보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구직 여정은 임원들 얼굴을 확인하는 영광스런 자리를 마지막으로 끝나버렸고, 후유증은 꽤 길었다. “취업에 도전하자마자 최종면접까지 가다니!”라고 부러워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냥 주변의 또래들과 같은 처지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이 녀석의 자기소개서를 읽어보고 있다. 아침 여덟시가 되면 나는 주간 아르바이트에게 자리를 넘기고, 학교를 가야한다. 학교에서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부끄럽게도 기초 과목을 재수강해야 하고, 그것이 끝나면 밥을 먹고 잠시 눈 붙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들 가상의 시간을 사는 동안 나 혼자 냉정하게 현실에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나는, 딱히 잘 살아낸 것이 아닌 모양이다.


  아까 역정을 내던 아저씨가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문득 묻고 싶어졌다. 나는 새파란 녀석입니까. 그래도 내가, 아니 우리가 젊은 줄은 알겠는데, 새파랗고 푸른 나이입니까. 라고, 그렇게 마음으로만 묻고, 아저씨의 신세 한탄이나 듣다가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덧 PC방에 남은 사람이 여섯 명으로 줄었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이지만, PC방 운영 프로그램에 새파랗게 표시된 이름은 비회원이거나, 후불 손님이다. 이곳에 얼마나 머무를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 손님(93)처럼 게임 한 번 안 하고 누가 자신을 필요로 하나 보는 사람들. 나와 내 친구처럼, 얼마나 더 제 자리일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새파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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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영
15/04/02 05:19
수정 아이콘
가게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둘다 귀한손님이네요..
15/04/02 05:22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섬세하게 대해 드려야죠. 크크.
마스터충달
15/04/02 05:32
수정 아이콘
새파란 사람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 처럼 새파랄 때 기회를 놓지면 노랗게 익어보지도 못하고 시커멓게 썩어갈 뿐입니다...
15/04/02 05:39
수정 아이콘
헛... 왜 썩어간다고 말씀하시나요.
마스터충달
15/04/02 05:46
수정 아이콘
속이 시커멓게 썩어가서요 ㅠ,ㅠ
내장미남
15/04/02 09:31
수정 아이콘
결혼하셔서 그런건가요?크크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마스터충달
15/04/02 13:12
수정 아이콘
취직을 못해서요;;; 결혼하기엔 아직 새파란걸로;;;
무료통화
15/04/02 08:53
수정 아이콘
제가 좋아하는 글 스타일이네요! 저도 요새 제가 썩어갈까 걱정이 많았는데 공감이 많이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15/04/02 10:02
수정 아이콘
사실 즉흥적으로 카운터에서 끼적인 글이라 올려놓고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듬어서 올릴 걸 싶기도 하고... 그래도 좋아하신다니 감사합니다.
15/04/02 09:33
수정 아이콘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비슷한 마음을 품을 때가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15/04/02 10:0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문득문득 드는 감정인가봅니다.
부대찌개
15/04/02 09:52
수정 아이콘
뭔가 일본소설같은 문체네요 잘 읽었습니다
15/04/02 10:05
수정 아이콘
엇, 그렇게 느껴지신다니 신기함 반 충격 반이네요. 살면서 읽은 일본소설이라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설국 뿐인데... 정말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재입대
15/04/02 09:55
수정 아이콘
저 궁금한게 하나 생겼는데 그동안 피씨방에서 내가 쓴돈인지 얼마인가 물어보면 대답해 주나요?
갑자기 얼마를 꼴았는지 궁금해져서 ㅠㅠ
15/04/02 10:07
수정 아이콘
저도 손님의 입장에서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알려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권리인데요, 뭐.
네가있던풍경
15/04/02 10:17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좋아요:)
15/04/02 10:2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제 기분이 다 좋네요 :)
펠릭스 피에
15/04/02 10:18
수정 아이콘
와 글이 참 좋네요..
글쓰기와 관련된 학과신가요?
추천하려고 로그인했습니다.
15/04/02 10:28
수정 아이콘
아뇨, 그냥 글쓰기 좋아하는 타과 학생입니다.
글쓰기 관련 학과에서 이런 글은 내밀지도 못 하겠죠 흐흐;
아무튼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네요 :)
알수없다
15/04/02 10:25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문득 야간 pc방 알바할때가 생각나네요. 흡연석 비흡연석 흡연부스가다 있던곳이었는데 처음 오신손님이 게임하시다가 묻더군요.
제 앞에있는 사람 담배피는데요?
연신 죄송하다고만 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된 기억이 있네요.
15/04/02 10:30
수정 아이콘
4월 1일자로 단속이 심해졌고, 적발시 손님 뿐만 아니라 업주도 과태료를 물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사장님께서).
알바생 입장에서는 예전보다 손님에게 좀더 당당히 담배 치우라고 말할만한 명분이 생긴 거죠.
사실 예전에는 경우에 따라 적당히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게 피시방 입장에서도 이득이었지만요.
손발땀
15/04/02 17:39
수정 아이콘
적발시 영업자가 손님에게 주의를 줬는데도, 손님이 흡연을 하면, 손님만 벌금내고 업자는 아무런 불이익이 없습니다.

요즘에는 전자 담배를 몰래 피는게 문제죠..

그리고 미성년 흡연자들이 흡연부스를 안 쓰고, 화장실, 복도, 계단 이런 곳에 흡연하는 것이 큰 문제죠..

여튼 같은 PC방 알바생끼리 힘냅시다!!
기러기
15/04/02 18:58
수정 아이콘
피시방에서 왤케 욕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특히 요새 청소년들 욕 빼면 말을 못 하더군요. 시끄럽게 굴기는 또 엄청 시끄럽게 굴고. 아주 민폐덩어리입니다. 가끔은 피시방이 사회의 쓰레기통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5/04/02 19:09
수정 아이콘
짧지만 몰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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