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어를 배울때 알파벳부터 배우는 것과 달리, 한글을 배울 때 자모낱자부터 배우지는 않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썼던 일기를 보면 ㄹ을 거꾸로 써놓고는 했더군요.) 자모낱자를 읽는 법을 제대로 배웠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라 불렀습니다만)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자모낱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라는 녀석들을 읽는 법이 참 고약합니다. 읽는 법이 다 자기 멋대로인 것 같은 거예요. 괜히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험에서 쟤네들 읽는 방법 물어보는게 아닙니다. (물론 모음이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ㄱ, ㄷ, ㅅ 을 제외한 나머지 자음을 읽는 법은 규칙적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그런걸 가르쳐주시지 않았더랬죠. 후새드. 선생님은 무조건 외우라고 하셨죠.) 그 규칙은 이렇습니다. 어떤 자음을 @라 했을때, 그 자음을 읽을 때는
[@+ㅣ/ㅇ+ㅡ+@] 로 읽는 거지요. 예를 들어 보자면 ㄴ 은 ㄴ ㅣ ㅇ ㅡ ㄴ, 즉
[니은]이 되고, ㅍ 은 ㅍ ㅣ ㅇ ㅡ ㅍ, 즉
[피읖]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ㄱ, ㄷ, ㅅ은 위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나쁜 녀석들이지요. ㄱ은 기윽이 아니라
[기역]이라 읽고, ㄷ은 디읃이 아니라
[디귿], ㅅ은 시읏이 아니라
[시옷]이라고 읽습니다. 도대체 왜?
학자들은 ㄱ을 기역, ㄷ을 디귿, ㅅ을 시옷이라고 읽게 된 것이 중종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교육서 훈몽자회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훈몽자회는 1527년(중종 22년)에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로 3360자의 한자에 훈민정음으로 뜻과 음을 달아 놓은 책인데, 1913년까지 10여가지의 판본으로 출판되면서 꾸준히 사랑받았었습니다. 현재는 한자 학습서보다는 중세 한글 및 한국어 연구서로 높게 평가 받고 있는 책이지요.(요즘으로 치면 영어 교과서에 써있는 한글, 한국어가 후대에 전해져 2000년대 한글 및 한국어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으로 높게 평가받게 되는 것이려나요.)
최세진 선생은 이 책의 언문자모에 자모낱자의 이름을 수록해놨는데, 훈민정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모낱자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른 건 어떻게 대충 한자로 표기가 되겠는데, 윽, 읃, 읏과 비슷한 발음 혹은 뜻을 가진 한자를 찾을 수 없었던 거죠.
최세진 선생은 이를 어찌할까 많은 고민을 했을겁니다. 그러다 결국 다른 자음은 모두 @+ㅣ/ㅇ+ㅡ+@ 로 표기하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ㄱ은 기윽이 아닌 기역(其
[役]), ㄷ은 디읃이 아닌 디귿(池
[末], 끝 말자를 뜻으로 읽은 것이겠지요), ㅅ은 시읏이 아닌 시옷(時
[衣] - 역시 옷 의 자를 뜻으로 읽은 것입니다.) 으로 표기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 당시에야 자신이 한글 자모낱자를 읽는 법을 500년후까지 좌지우지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몰랐을테니까요.
그리고 덕분에 현대에 사는 우리들 역시 ㄱ은
[기역]으로, ㄷ은
[디귿]으로, ㅅ은
[시옷]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은 시험에서 작대기를 받게 되었...)
사실 당시 훈몽자회에서 한글의 자음을
[@+ㅣ/ㅇ+ㅡ+@]으로 표기한 것 자체가 자음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음이 자모를 조립할 때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보여준 예를 보여준 것에 불과하였다고 (초성에 들어가는 모습을 앞 글자에서 보여주고, 종성에 들어가는 모습을 뒤 글자에서 보여주는 것) 합니다. 어떤 것의 사용법이 그것의 이름이 되어버린 경우라고나 할까요.
첨고로 당시 훈몽자회에서
[@+ㅣ/ㅇ+ㅡ+@] 로 표기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까지이고, 그 외의 자음들은 단순히
[@+ㅣ] 형태로 표기하였었습니다
[1]. 지금의 ㅋㅋㅋㅋㅋㅋ 은 당시 훈몽자회 식으로 읽자면 키키키키키키 가 되고 ㅎㅎㅎㅎㅎㅎ 은 히히히히히히 가 되는 셈이죠.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오늘 pgr에서 키키키키키키 거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주
[1] : 당시 최세진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은 초성과 종성으로 고루 쓰이는 자음임에 비해, 그 외의 자음들은 종성으로는 쓰이지 않고 초성으로만 쓰인다는 이유로
[@+ㅣ]로 표기하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글 자음의 표기 자체가 자음이 자모를 조립할 때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보여준 예시였기 때문에, 종성으로 쓰이지 않는 자음들의 경우 ㅇ+ㅡ+@ 부분까지 표기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서술 때문에, 한동안 최세진은 終聲復用初聲이라는 훈민정음의 규정을 왜곡시킨 장본인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www.korean.go.kr/front/bookData/bookDataView.do?book_seq=344&mn_id=104&book_category_id1=13&book_category_id2=42 (최세진의 학문과 인간 - 국립국어원 1999년 10월의 문화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