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겪은 몇 가지 일로 짧은 글을 써 봅니다. 부족한 글솜씨와 반말체는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 *
집에서 기를 수 있는 민물고기 중 베타란 어종이 있다.
지느러미며 꼬리가 이뻐서 보기에 좋고,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이마트 같은 곳에서 삼천원 정도에도 살 수 있는 저렴한 가격에다, 물컵에 넣어놔도 살 수 있는 강한 생존력을 갖추고 있는 어종이다. 다만 동족에 대한 공격 본능이 강해서, 같은 종을 보면 식음을 전폐하고 달려드는 습성이 있어 두 마리 이상을 같은 어항에 넣어 키우면 문제가 있다고 한다.
[1]
처음에 얻어온 구피와 새우 몇 마리로 시작한 어항 생활의 규모가 조금씩 늘어갈 무렵, 베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보라색 베타를 한 마리 샀다. 그러다 보라색 베타의 발색이 이쁘지 않다는 핑계로 빨간색 베타를 한 마리 더 들였다. 이제 어항을 하나 더 늘여야 하는데, 그러면 먹이며 물 갈아주는 것이며 손이 가는 일이 많아지게 되어 적당한 크기의 어항에 칸막이를 치고 두 마리를 같이 넣기로 했다.
물이 통할 수 있도록 검정색 격자 형태의 플라스틱 칸막이를 어항 가운데 설치하고, 베타들을 양쪽에 풀어놓았더니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서로를 발견한 후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부풀려가며 으르렁댄다. 플레어링이란다. 빨간 베타(나중에 뚜비로 불렀다)가 덩치는 좀 작지만 성깔이 있는지, 보라색 베타(이 놈은 보라돌이라고 불렀다)에게 자꾸 들이대는 모양새였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귀엽기도 했는데 먹이도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그러고 있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설마 죽을 때까지 플레어링만 하겠냐는 생각에 모른척 했다. 두어시간 후 보니 각자 혼자 있는 것 마냥 돌아다니고 있어서, 아, 이 놈들이 불편한 동거에 적응을 했구나 하고 안심했다.
[2]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뚜비가 없었다.
당황해서 찾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보라돌이랑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밤새 싸웠는지 둘다 등지느러미며 꼬리가 엉망이었다. 특히 뚜비는 등지느러미가 반쯤 뜯겨져 나가서 어항 바닥에 빨간색 파편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고, 보라돌이는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지느러미와 꼬리가 군데군데 망가지긴 매한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둘은 계속 엉겨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싸우고 있었다.
일단 둘을 떼어 놓는게 먼저일 것 같아서 뚜비를 건져서 옆으로 보내고, 지느러미와 꼬리들을 치운 다음, 칸막이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지만 뚜비가 통과할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밤새 어떻게 뚜비가 보라돌이에게 넘어 갔을까 하는 궁금함도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칸막이는 포기하고, 귀찮더라도 둘에게 어항을 한 개씩 배정하고 나란히 배치한 다음 어항 사이에 가림막을 두어 서로 볼 수 없도록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어항을 분리하고 나니,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어항 사이의 가림막을 제거하면 둘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플레어링을 해댔지만, 가림막을 원위치시키면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이 속한 어항 속을 돌아다녔다. 아. 과연 물고기는 물고기구나.
그렇게 더운 여름과 짧은 가을이 지나갔다.
[3]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어항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면서, 다시 뚜비와 보라돌이를 합치게 되었다. 이번엔 칸막이에 가림막을 덧대어 물은 통하지만 서로를 계속 바라볼 수 없도록 나름대로 보강하였다. 보완책이 어느정도 먹혀서 나름대로 평온한 동거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사흘 정도 집을 비울 일이 생기게 되었다. 어항에 물을 깨끗한 걸로 갈아 주고, 칸막이도 확인하고, 먹이도 좀 많이 뿌려준 다음 잘 지내겠지 하는 마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보니, 또다시 둘이 같이 있었다.
다만 이번엔 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뚜비는 그나마 조금 자라났던 꼬리며 등지느러미와 양쪽 지느러미가 아예 없다시피 한 상태로 아가미만 겨우 움직이면서 배를 보이면서 수면에 떠 있었고, 보라돌이는 그나마 덜 망가졌지만 피곤했는지 수조 바닥 근처에 장식해 둔 개운죽 뒷편에 숨어 있었다. 황급히 뚜비를 옆으로 옮겨놓고 밥을 뿌려줬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떻게 뚜비가 보라돌이에게 넘어간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4]
그 일이 있고 하루 뒤인 오늘, 뚜비는 수면 근처에서 배를 보이며 뒤집어져 있고, 그 근처로 가끔 새우들이 배회하고 있으며, 보라돌이 역시 개운죽 근처에서 미동이 없이 웅크리고 있다.
그 와중에도 먹이를 주려고 다가서면 보라돌이는 다가와서 먹는데 반해, 뚜비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먹이가 뿌려진 다음에야 몸을 뒤집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양쪽 지느러미가 없어서인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구피나 네온테트라와 같이 배를 보이면 금방 죽어버리는 작은 어종에 비해 덩치가 커서 그나마 버티는 것 같지만, 제대로 먹질 못하니 아마 오래 살아남긴 힘들 것이다.
동족에 대한 투쟁심과 그 결과로 인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뚜비를 바라볼 때마다 미안하고 애처로운 마음과 함께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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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밭에서 키웠는데(물론 집은 토끼장) "동족에 대한 투쟁심과 그 결과로 인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 딱 그걸 보여줬습니다. 번식기에 다른 수컷에게 물려서 도대체 어떻게 물어댄건지 뼈가 보이도록 허벅지에 상처가 났어요. 분명히 무지 아플거 같은데도 밥을 주면 또 꾸역꾸역 먹어요. 사람이라면 그냥 죽겠구나 싶은 상처였는데 어떻게든 살겠다고 오히려 밥은 더 잘먹더군요. 그러면서 집안에서 웅크리고 겨울을 나더니 결국 낫더랍니다(물론 부모님의 정성어린 간호+항생제 버프도 있었어요) 막 죽어가던 애가 좋다고 뛰어댕기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아 자연은 참 신비롭구나. 생물의 본능은 정말 위대하구나. 자연은 이렇게 생명들을 돌보는구나. 감회가 새롭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