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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8/23 22:21:53
Name 글곰
Subject [일반] 그 바(bar)가 사라졌다
즐겨 찾는 바가 있었다. 즐겨 찾는다 하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 방문한 것이 사 년 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바는 훌륭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조끼에다 나비넥타이까지 한 나이 많은 사장님은 칵테일에 관한 한 실로 우주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 맛을 못 내요. 그는 그렇게 짐짓 뻐기면서 김릿을 내왔다. 그러나 그 김릿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칵테일은 천사의 손길이었고 악마의 작품이었고 세상을 뒤덮은 만년설 가운데서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아낸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였다. 이런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바텐더가 겨우 고작 그 정도밖에 뻐기지 않다니 이 얼마나 겸손한 분이란 말인가. 희끗한 그의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오랜만에 그 바를 찾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간 그 바는, 그러나, 그 바가 아니었다. 물론 이름은 같았다. 그러나 블루지한 음악이 나오던 스피커에서는 이름 모를 여가수의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두침침했던 벽에는 밝게 번쩍이는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조용하던 실내는 어쩐지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비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사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난 불안함을 애써 감추며 김릿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젊은 남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여기 자주 오시나요?

뭐 어느 정도..... .

사실 저희 사장님이 바뀌셨거든요. 한 달 전에.

......네?

단골분들이 오셔서 김릿이 예전의 그 맛이 아니라고 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여쭤보는 거예요.

나는 주저했고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티니를 주문했다. 진과 베르무트를 섞고 올리브만 집어넣으면 되는 간단한 칵테일이었기에 적어도 기본은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곧 마티니가 나오고 나는 그걸 마셨다. 오 신이여. 그 투명한 액체에서는 개의 오줌에다 숫소의 침을 섞은 맛이 났다. 그 정체모를 액체 혼합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난 잠자코 잔 안의 올리브 두 개를 차례로 꺼내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액체를 그대로 남긴 채 계산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늦여름 저녁공기는 시원했지만 내 마음은 한겨울처럼 스산했다. 그 바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영원히.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글을 남긴다. 그리고 내가 나오기 직전에 바에 들어온 그 남자, 한 달 반만에 찾아왔노라 말하던 그 이름모를 남자와 이 아픔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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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14/08/23 22:27
수정 아이콘
나이 많고 나비넥타이한 사장님이라고 해서 혹시나 하는데 설마 종로에 있는 그 바는 아니죠?
단지날드
14/08/23 22:34
수정 아이콘
바 관련 만화 한화 본거 같네요 흐흐
헥스밤
14/08/23 22:44
수정 아이콘
왠지 글곰님과 흐르는 물 님과 제가 생각하는 곳이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네요.
14/08/24 06:00
수정 아이콘
본격 헥스밤님 소환글...이라고 쓰려고 했더니 이미 등장하셨군요...
감모여재
14/08/23 22:48
수정 아이콘
왠지 흐르는 물 님과 헥스밤님과 제가 생각하는 곳이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네요. (2)
14/08/23 22:55
수정 아이콘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 바가 한두군데가 아니어서...공감이 갑니다.
14/08/23 22:58
수정 아이콘
다들 생각하시는 거기가 아마 맞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네요.
하아......
14/08/23 23:11
수정 아이콘
칵테일 관련해서는 초딩 수준의 지식도 없지만, 말씀대로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칵테일 같은데 신기하네요.
14/08/23 23:36
수정 아이콘
비율과 재료에 따른 바리에이션이 상당히 많은 칵테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맛이 끔찍했습니다.
14/08/23 23:54
수정 아이콘
그 바텐더는 곧 해고당하겠네요. 미리 애도를.
저글링아빠
14/08/24 05:39
수정 아이콘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답니다. 많이.
신비한 칵테일의 세계죠.
14/08/24 06:31
수정 아이콘
뭐든지 알면 알수록 신기할 것 같긴 합니다 :)
14/08/23 23:23
수정 아이콘
오잉 종로 그곳 왜 사라졌나요?
바람이라
14/08/24 00:25
수정 아이콘
왠지 제가 아는 바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감모여재
14/08/24 01:36
수정 아이콘
그나저나 다른걸 떠나서 마티니를 맛있게 만드는 거야 말로 정말 어렵지 않나요. 마티니에서 제대로 된 진의 맛과 베르무트의 향이라도 나면 다행인데, 제가 마셔본 마티니의 80% 정도는 알콜에 기름 얹어놓은 맛이었더랬죠. 직접 만들어봐도 마티니는 참... 쉽지 않더군요.
저글링아빠
14/08/24 05:40
수정 아이콘
개의 오줌에다 숫소의 침을 섞어놓은.. 이라는 표현에서 사실 움찔했습니다.
얼마전 제가 만들었던 마티니 생각이 나서...;;;;;
법기정원가든
14/08/24 09:28
수정 아이콘
엌크크크 혹시 투잡중이셨나요? 크크
법기정원가든
14/08/24 09:29
수정 아이콘
개의 오줌에 숫소를 섞은 그맛을 아시는거 같은데...흠...
무더니
14/08/24 13:51
수정 아이콘
글쓴분의 생각과는 다르게

바텐더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마티니를 시킨다고들하던데 맞나요?

어디에서 봤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네요(만화에서 본거같긴한데)
*alchemist*
14/08/24 16:08
수정 아이콘
제 경우는 맘 편하게 놀 수 있는 바가 집 근처에 있어서 친구랑 많이 놀러갔드랩니다
기타치고 노래 하고 이럴 수 있어서 삘 받으면 밤새 놀기도 하고 막 그러는 곳이었습니다

사장이 노래하는 친구여서 락앤롤이나 재즈 보사노바 이런 거 마구 틀어주고
손님들도 다 어디 동네 뮤지션들이라 노래 신청하고 공연하고 그랬더랬지요

어느날 사장 바뀐걸 모르고 갔더니 모르는 바텐더 두명이 앉아있고
거기서 무려 '최신가요'가 나오고 있더라구요..
가요라고는 에쵸티나 잭키, DOC, 이런거나 틀어대고 춤추고 놀던 곳이었는데..
그 이후론 싹 발길 끊었지요.

맘 편하게 놀 수 있는 바가 없어져서 개인적으로 참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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