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정말 누가 자막 안 만들려나요?)
2편의 제목은 Pals에 대한 내용입니다.
영국에서 최초로 징병을 하면서 처음으로 유도한 건 동네 친구들이 모두 자원 입대해서 같은 대대, 중대, 소대에서 복무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Pals는 동네 친구부터 시작해서 같은 직장 동료, 학교 친구까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장점이 있었습니다. 일단 작중 맨체스터 출신들로 부대로 구성할 경우, 맨체스터 같은 경우 한개 사단을 구성하고
지역 별로 연대, 그리고 동네 별로 대대, 그리고 친구들끼리 중대, 소대, 이렇게 쉽게 편성할 수 잇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친하기 때문에 쉽게 전열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열심히 싸울 것이라는 바람 역시 군부에서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한개 대대에 친구에 동네 주민 혹은 회사 동료가 한꺼번에 들어 갔기에 그 대대가 전멸해 버리면 해당 지역의 젊은이들 씨가 말라 버린다는 것이었죠.
이런 Pals가 투입된 최초의 전투가 바로 1916년 솜므 전투였습니다. 이시기 영국군은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최초 8만에서 시작된
대륙 파견군은 이시기 거의 백만을 넘겼습니다. 문제는 그 질적인 문제였는데 야포 숫자, 장비, 병력의 훈련 수준 모두 최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준비 되지 않은 병력들이었던 것이죠.
이걸 당시 영국군 대륙파견군 사령관 헤이그 경도 알고 있었죠.
문제는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총공세인 베르덩 전투였습니다. 이시기 프랑스 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고 빠르게 영국군이
독일군을 공격하여 독일 병력들을 분산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영군 정치가들은 대규모 공세를 군부에 주문했고 그렇게
시작된게 1916년 6월 솜므 전투였습니다.
영국군의 이론적인 공세 방법은 이미 잘알려 있어 단순히 서술하면 1537문의 포로 며칠간 적진을 쏴대면 적진은 초토화 될 거고
그냥 이 애송이 신병들은 걸어서 적진을 점령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실재 운용된 야포수는 467문. 대부분 유산탄인지라 철조망도 재대로 제거가 되지 못했고 진창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포탄 대량 생산은 처음인지라 생산관리 실패로 많은 경우 불발이 났습니다. 결국 다수의 독일군은 일주간 포격에도 멀쩡히 방어전에
나섰습니다. 거기에 대규모 포병 운영도 해본 적이 없어서 포격 스캐쥴도 개판으로 짠 결과 원하는 곳에 포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미숙한 실력과 새로운 전쟁에 대한 장군들의 경험 부족은 다수의 Pals 부대를 적 기관총에 던져 버리는 결과를 낸 것이죠.
공세 첫날 1만 9240명이 전사 해버렸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는 하루에 5만 7470명이 전사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34사단의 경우
하루만에 50%의 사상자를 내며 전멸해버렸죠.
그결과 영국 지역사회는 완전히 박살난 곳이 늘어 났습니다. 한 지역 사단에서 반절이 죽거나 다쳐 버린다는 그 지역의 입대한 젊은이
반절이 죽거나 불구가 된다는 걸 뜻했으니 말이죠.
<입대전 같은 지역 사람들과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 이대로 그들은 한개 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결국 다음해 이런 Pals 대대 제도는 폐지 됩니다. 모든 대대 보충병들은 그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충원된 병력으로 대체 되는 식으로
이런 Pals 대대가 아닌 그냥 우리가 보는 여러 계층과 지역이 섞인 대대화 되었습니다.
해당 편의 배경이 된 트론 숲 전투는 초기인 7월 8일 부터 14일까지 전개된 초창기 전투 입니다.
여기에 모두 3개 사단이 투입되어서 3천명을 잃었습니다. 전투 자체는 다른 전투에 비해 곁가지에 치열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보면 아시겠지만 1개 중대 잔존병들 숫자 보면 정말 정신 나간 거 같은 숫자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 주인공의 고향 젊은이들은 최소 그 시점에는 그정도만 살아 남은 겁니다.
문제는 트론숲 전투 후 솜므 자체는 11월 23일까지 전투는 계속 되었고 이 남은 병력 대부분도 얼마후 소진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국군은 솜므에서 총 40만을 잃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25만에서 68만까지 사상자에 대한 설은 다양했습니다.
확실한 건 솜므는 1차 대전의 대명사화 되어 대중에 알려졌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