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제 딱 30일만 버티면 꿀단지 같은 여름방학인데 시간이 갈수록..... 참 추벅추벅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입니다.
영국행이 결정되었을 때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친 첫 생각은 "아 그럼 이제 EPL 직관 하는 건가? 시즌권이 얼마지?" 였는데
역시 인생은 실전,
중계조차 못봤네요.
일단 근근히 버티는 가난한 유학생 처지에 어딜 티비를 구매하고 수신료를 내겠습니까.
인터넷으로 티비를 보면 되잖아! 했는데 인터넷으로 봐도 수신료 징수 덜덜
사실 굳이 찾아보려면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자니 시간도 없네요.
근근히 에세이 데드라인에 치여 사는 대학원생에게 이런건 마 사치 아니겠습니까.
사실 축구보다 더 재밌는 게 정치지요. 그 유명한 터키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정도면 모르겠지만, 정치만큼 스릴넘치고 몰입감 넘치는 리얼타임 스포츠가 또 어디있겠어요.
그래서 영어공부도 할 겸 취미생활도 할 겸 정치기사를 챙겨보는 편입니다.
사흘 전 목요일에 큰 행사가 있었어요. 드디어 제 유학생활 처음으로 선거라는 걸 구경하게 된거지요.
아쉽게도 큰 선거는 아니고 751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뽑는 유총(유럽총선거?)이였습니다.
....어!?
네 그렇습니다. 유럽의 향후 5년을 결정할 입법기관의 의원을 채우는 선거이지요.
더불어 지방선거도 같은날 같이 치루었구요.
에...그런데 여기 지방선거는 지역별로 임기가 제각각이라 공석이 생긴 지역들이 매년 5월 같은날에 동시에 치르는, 그런 연례행사랍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좀 관심에서 멀어진 분위기고,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유총이 더 주목받는군요.
현재 시점이 나름 총선 1년 전인지라 전초전 같은 느낌으로 긴장감 있게 진행됐습니다.
유럽연합 28개국 각국에서 선거가 제각각 진행되는 관계로 투표결과 공개는 오늘 (일요일) 오후 10시에나 이루어집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모든 회원국에서 투표가 끝나기 때문이죠.
여튼, 이제 발표까지 50분 남았습니다. 흐흐. 긴장되네요.
이번 선거의 화두는 유로회의주의자(Euroskeptic) 극우파들의 약진입니다.
한국 선거문화도 보면 우리 지역구 의원 뽑을 때는 사표 나오지 않게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 표를 주지만, 비례대표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음, 지역구 표는 어느당에게 줬으니 비례대표는 다른 당을 찍어볼까?" 하면서 의외의 표를 던지고 산뜻한 기분을 즐기곤 하지 않습니까?
여기도 약간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서, 정작 영국 의회에는 의석이 없는 극우파인 독립당(UK Independence Party)이 선거운동 기간 내내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가장 높을 땐 한 38%정도 찍더군요.
심지어 집권당인 보수당은 15%를 간신히 채울까 말까고, 제1야당인 노동당이 30%대 초반의 지지율로 독립당을 추격하며 고전하는 괴랄한 그림이 되었지요.
양당이 독립당을 상대로 쟤들 인종주의자에 파시스트라고 공격했지만 돌아온 건 역효과. 지지층 결집.
헐
그냥 영국 보수당이 뭘 못해서 보수층이 독립당으로 갔다기엔 석연찮은게, 현재까지 들려오는 출구조사 속보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그 유명한 극우파 쟝 마리 르팽의 딸이 이끄는 (아빠는 은퇴) 극우정당이 25%의 득표율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대통령 올랑드가 이끄는 집권 사회당은 10% 초반의 굴욕을 당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입니다.
독일은 메르켈이 이끄는 집권당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는 가운데 극우정당이 7석 정도를 가져갈 것이 유력하다고 전해졌습니다. 극우파 당선유력인사 중 하나는 네오 나치로, 히틀러 빠돌이라고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ㅡ.,ㅡ;;
소식 듣고도 3분간 멍했습니다. 내가 잘 못 본건 아니겠지? 그런데 사실이더군요. 히틀러 빠돌이라니..
폴란드에서는 다행히(?) 친 유럽주의 진영이 승리할 것으로 예견된 가운데 공공연하게 "브뤼셀의 EU 건물들을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해 매음굴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극렬한 유로 혐오주의 극우정당이 무려 8%나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선거 전문가들은 751석 중 약 30%를 유럽통합 반대론자들이 가져갈 것으로 점치고 있는데요, 앞으로 유럽연합 국가간의 이민장벽을 낮추려는 친 유럽주의자들의 정책결정이 매우 험난한 반대에 부딪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극우파의 약진은 대체로 반이민자 정서 (우리 일자리 뺏기고 범죄율 늘어남. 노노)의 반영이라는 분석이 대부분이군요.
선거의 최종 투표율은 높아봐야 44% 정도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는 5년 전 투표율과 거의 비슷한 수치로, 큰 차이가 없군요.
선거방식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까요?
일단 각국에게 의석수가 분배됩니다.
인구에 비례해서 국가별 의석수가 정해지는 가운데 인구가 적은 회원국의 불이익을 막기 위해 조정이 들어갑니다. 인구가 높아질수록 의석수의 증가속도는 떨어지고 낮아질수록 감소속도가 떨어지지요. 독일이 약 100석, 프랑스, 영국 처럼 덩치가 있는 나라들은 대략 70석 후반의 점유율을 갖고, 꽤 작은 나라들도 20석 정도는 가져갑니다.
각국은 각자 투표관리를 알아서 합니다. 다만 큰 규칙 세 개는 지켜야합니다.
1. 비례대표로 뽑을 것, 구체적으로 Party List법이나 Single Transferable Vote 둘 중 하나를 채택할 것.
2. 지역별로 선거구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니네 맘대로. 다만 선출자의 대표성을 해치지 않게 조심하쟈.
3. 비례대표의 Election Threshold는 5%를 넘기지 말 것.
파티 리스트는 우리가 아는 그 비례대표 선거에 가장 가까운 방법입니다.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가 나열되어있고 거기다 투표하는 거지요.
여기서도 그 리스트를 어떻게 짤 것이냐에 따라 방법이 막 달라지는데.... 영국은 뭐였더라... 대체로 Closed List 였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비례대표 뽑는 것처럼 정당에서 후보순서를 정하는 거지요.
STV는 1지망 2지망 3지망.....후보를 적어내는 건데요, 아 이게.... 너무 어려워요. 집계 방식이 너무 많고 알고리즘이 복잡해요 ㅡㅡ;
제가 아는 가장 쉬운 방식이 Droop Quota 방식인데, 실제로 이게 영국에서 쓰이는지도 모르겠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데 유권자가 100명이라고 해볼께요. 그러면 여차저차한 자기 나름의 공식에 의해 34표를 얻으면 당선 인정을 해줍니다.
1지망 후보를 기준으로 개표를 해서 일단 34표를 넘긴 후보를 당선자로 확정시켜요. 그런데 만약 그 당선자가 한 64표를 가져갔다고 해볼께요. 그러면 당선 확정선인 34표를 제외하고 나머지 30표는 그냥 남는거잖아요? 그렇다면 해당 후보가 얻은 64표 중 2지망으로 누구를 찍었나 확인해봐요. 보니까 40표는 2지망에 소규모 정당 김후보를, 24표는 조금 더 큰 정당 이후보를 찍었군요. 그러면 잉여표 30표를 40:24의 비율로 나눠서 두 후보에게 도로 나눠주는거지요.
헉헉...
이야기가 몹시 복잡한데 그냥 단순히 말하자면 사표방지를 위한 결선투표제도를 그냥 투표 한 방에 해결하고자 만들어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역별 선거구는... 영국의 경우 12개 선거구로 나누었더군요. 잉글랜드에 아홉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하나씩.
각 선거구별로 비례대표를 뽑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3번의 경우, [Election Threshold는 5%를 넘기지 말 것.] 이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한 선거구에서 한 100명쯤 뽑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득표수 비례대로 뽑을 경우 어떤 정당에서 1%만 득표해도 당선자가 하나 나오겠지요? 이런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양반들이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득표 비례대로 의원을 뽑되 최소한 5%는 득표해야 1자리 준다... 그런 거지요. 이 제도를 적용해도 좋지만 그 수치를 5% 이상으로 잡지는 마시오.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이고 복잡하네요.
문제는, 각 국가별로 룰을 따로 정할 뿐 아니라, 최소한 영국의 경우, 각 선거구별로 또 자기네 나름의 투표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겁니다. 예컨대 앞에서 말씀드린 1지망 2지망 요고 계산하는 법만해도 자기네들 제각각이거든요.
말씀드리는 순간 영국쪽 개표 결과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군요. 잉글랜드 동북부 지역구 개표가 끝났습니다.
무슨 공식으로 계산했는지 모르겠는데 계산 방식에 따라서 보수당이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실패하는군요.
발표를 선더랜드 선관위에서 하네요. 저쪽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선더랜드인가봅니다.
이번엔 잉글랜드 동부에서 결과가 나왔습니다. 독립당이 3 석, 보수당 3 석, 노동당 1석이군요.
독립당의 약진이 예상되는 가운데 현재 BBC는 다른 어떤 결과보다도 프랑스에서 극혐 우파 Front National 의 승리 소식에 멘붕된 듯 당선자 인터뷰 할 때마다 꼭 이걸 물어보는군요. 근데 영국 독립당도 혐오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지금 옆동네 걱정할 때가...ㅡ.ㅡ 곧 죽어도 우리 수꼴이 프랑스 수꼴보단 낫다 이건가....?
자, 다시 유럽의회로 뿅 날아가보아요!
이렇게 각국에서 알아서 의원을 뽑아서 스트라스부르(프랑스)에 위치한 유럽의회 건물에 보내서 5년간 일을 시켜먹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1등 먹어봐야 영국 쿼터 70여석 중에 한 25석이나 먹고 가는 셈인데, 정작 유럽의회에 가서 보면 751명 중에 25명일 뿐이지요.
그렇다고 우리 영국인끼리 힘을 합쳐서 70표짜리 정파를 만듭시다 할 수도 없는게 워낙 서로 안친해서 ㅡㅡ;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각국의 각급정당에서 모인 의원들끼리 다시 더 큰 상위개념 정당을 만들어서 뭉칩니다.
2009년 선거를 통해 선출된 현재 의회의 다수당은 기독교 중도 우파 계통의 유럽국민당 (European People's Party, 약칭 EPP)으로 모두 265석을 차지하고 있구요, 제 1야당에 해당하는 건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사회민주진보동맹 (Progressive Alliance of Socialists and Democrats, 약칭 S&D)로 모두 184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로 EPP는 200석대 초반으로 내려앉고 S&D는 약간 늘어서 190대 후반, 200대 초반 정도로 아슬아슬한 콩등이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중도우파계열의 EPP가 날린 의석수는 대부분 극우들이 가져갈 것으로 보이구요.
유총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느낀 점은, 얘들은 주권(sovereign) 개념이 참 다층적으로 잡혀있어서 그런지 유럽연합이라는 괴이하고 희한한 걸 구성할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였습니다.
뭐랄까, 예컨대 "영국(U.K.)" 자체가 각자 이해관계가 다른 이질적 정치체제들끼리 지리한 협상과 논쟁을 통해 만들어놓은 인공물, 각자의 주권을 양도해서 만들어 놓은 인위적 합의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을 다시 한 번 한 단계 위쪽으로 이양해보자는 생각이, 실제로는 쉽지 않을 지라도, 그렇게 이상하게 다가오지 않는 거지요.
또 재밌는 건, 이민법 같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직결된 문제가 생길 때, 그렇게 권력이양을 통해 만들어보자는 유럽연합을 깨부술 대표단을 뽑아서, 그것도 어디서 갑툭튀한 극우정당을 뽑아서 보내는 패기....입니다 ㅡ.,ㅡ;
이렇게 갑툭튀 듣보잡이 선거를 "이겨버리는" 일은 그래도 좀 드문 편이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정당이 많고 부침이 심한 것도 잔재미 중 하나입니다. 낙승을 거두었다는 독일 집권당도 30%,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는 프랑스 극우 정당도 25%를 간신히 득표했어요. 이탈리아는 집권당이 33%를 득표하며 대승을 거두었을 것으로 출구조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벨기에는 최다득표당이 18.4%로 13.2%를 기록한 2등을 여유있게 따돌렸다고 하구요. 나라가 28개나 되다보니 하나하나의 결과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상 단일 정당이 한 국가에서 40%이상 득표한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자기를 규정하는 "이념"의 다양성 뿐 아니라 이슈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히 지지당을 바꾸고, 또 심지어 만드는 성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들 철새들인 거고, 또 어떻게 보면 자기 정치성향을 바꾸는 데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가볍게 보는거기도 하구요. 음.... 그때그때 느낌 따라 여기도 찍었다가 저기도 찍었다가 갑툭튀한 지역정당에도 찍었다가 하는 충청도 같은 느낌입니다 (결코 비하 아님).
아... 저녁 11시 반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눈이 가물가물해요.
원래 한 편으로 끝내려던 글인데, 아무래도 글을 나누어서 다음에는 영국 국내정치에 대해 다시 한 편을 써야 할 것 같군요.
결과방송 계속 보고 싶은데 이만 자러가야 겠어요.
피쟐러 여러분도 즐거운 월요일 아침 되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