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 격차는 선진국이라는 허울을 쓴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보편적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생겨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했죠. 그리고 시장경제에 문을 연 후 생산과 소비에서 가장 핵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외부의 풍요와 내부의 빈곤이 가장 극을 달리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돈의 물결 속 몇 장이라도 더 건지려 익사 직전까지 휩쓸릴 수 밖에 없는, 혹은 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파도치는 중국이란 공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따하이는 마을의 탄광 사업에 얽힌 비리를 폭로하려다 연루된 자들의 하수인에게 된통 맞고 조롱을 당합니다. 조우산은 바이크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산적들에게 둘러쌓입니다. 샤오위는 성매매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님에게 행패를 당합니다. 샤오후이는 어린 나이에 떠맡은 가장의 책임과 그가 진 빚 때문에 찾아온 옛 동료의 위협에 맞닥뜨립니다. 이들 주인공은 모두 돈 때문에 파국에 몰려있습니다. 그리고 돈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자존심을, 정조를, 인간다움을 유린당합니다. 이들의 인생은 너무나 하찮고 암울합니다. 이 끝없는 부조리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아 장 커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에 희생되는 약자의 애환이 아닙니다. 영화는 이들의 울분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연민을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돈과 욕망 앞에서 이들은 결코 온전한 피해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거든요. 애초에 따하이의 고발은 정의로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촌장이 약속했던 커미션을 받아먹지 못한데다 자신을 욕보인 놈들을 향한 울분이었죠. 광산이 터졌는데도 그는 전복된 트럭에서 떨어진 토마토를 주워먹기 바쁜 한량입니다. 저우산은 권총강도질로 대낮에 사람을 쏴죽이고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 있죠. (영화에서는 킬러라고 소개되는데, 그게 어디에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창녀가 아니라며 몸을 팔지 않을 것이라 항변했던 샤오위는 사실 유부남과 내연의 관계를 갖고 있는 데다 이것이 들통나 줄행랑을 치는 사람입니다. 샤오후이는 동료의 치료비를 물어주기 싫어서 도망치는 무책임한 어린 애구요. 그래서 이들의 비극은 지극히 건조하게 그려집니다. 거기에는 타락의 정도와 가진 돈의 차이가 있을 뿐, 속물을 재는 저울 위에서 어느 한 쪽이 기울만큼 이들은 온전한 선인이 아니니까요.
이 네 명의 중심인물 외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돈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따하이의 동료들은 비굴한 침묵을 지키고 사장의 부하들과 촌장의 한패들은 비굴한 충성을 보내고 있죠. 저우산의 형제는 지나칠 정도로 공평한 분배를 가족간에 적용합니다. 샤오위가 카운터를 보는 매춘 업소의 여자들은 시체처럼 대기하다가 자신의 번호가 호명될 때 불려나갑니다. 그녀를 태워주던 공사장 트럭의 인부들은 부당한 통행세를 요구당하고 두들겨 맞습니다. 샤오후위가 일하던 공장의 사장은 치료비를 부담하지 않으려 하고, 그가 짝사랑하던 여자는 그가 보는 앞에서 손님의 몸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을 채우는 나머지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노곤함이 떠오른 얼굴과 허름한 옷으로 멍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보면, 중국은 절대로 경제대국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중국이란 공간 자체 또한 빈곤함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탁 트인 하늘 아래로 펼쳐진 것은 오로지 고속도로나 벌판, 완공되지 않은 채석장 같은 장소들이고,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담기지 않습니다. 그 미쟝센이 먼저 전달하는 감상은 언제나 황량함과 쓸쓸함이고, 그곳은 놀라울 정도로 낙후되어 있는 시설과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죠. 때로는 한 프레임 안에 동시에 담긴 대도시의 건축물과 대조되고, 혹은 발전된 도시 속에서도 군중 속의 고독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나라가 이루어낸 성장은 여전히 살풍경하게 보이고, 사람들은 메마른 표정으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의도적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배경을 옮겨가면서, 발전의 정도를 차례차례 보여주고 어디에나 자본주의가 침투해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시간 동안 영화 속에는 동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중국의 인민들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채찍질을 당하며 몸부림 치는 말, 멍한 눈으로 트럭에 실린 채 팔려가는 소, 차에 갇혀 있다 잽싸게 탈출하는 뱀 한마리와 목줄이 채워진 원숭이, 봉지 안에서 방생을 기다리는 금붕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누군가에게 가축 아니면 애완동물일 수 밖에 없죠. 돈에 종속된 채로 어딘가에 매여서, 혹은 떠돌아다닐 수 밖에 없는 존재 말입니다.
그러나 감독은 이 부조리를 그저 보여주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탄에 그치는 대신 영화 속 인물들의 폭력을 통해 이 부조리에 대해 강렬한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요. 수호지의 경극 한 장면과 동시에 엽총을 들고 나서는 따하이는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호걸처럼 그려집니다. 저우산의 강도질에서는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 대한 싸늘한 냉소가, 샤오후위가 투신하는 장면은 스물스물 잠식해오는 자기파괴의 충동이 담겨져 있구요. 샤오위가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무협영화 여고수의 초식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억울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경극 옥당춘을 통해 그녀의 무고함을 대신 말해주지요. 네 죄를 모르겠느냐!! 하고 호통치는 법관 다음 바로 경극을 보는 관중들을 천천히 보여주는 장면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암시하는 건 아닐까요? 당신들 역시도 이 여인의 죄에 무관하지 않다!! 혹은 당신들 모두가 이 부당함을 목격하고 있는 증인들이다!!
사람 목숨이 돈 몇푼 때문에 쓰러져 나가는 현실, 이것이 바로 경제 대국이라 불리는 중국의 현 주소입니다. 성장의 득을 보는 것은 소수의 자본가들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고단한 삶의 투쟁에서 헤어나오질 못해 결국 살인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다뤄지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남 걱정해줄 팔자가 될까요?
@ 이번에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분들의 글을 참조한 부분이 많습니다. 경극 같은 경우 영화를 보면서 연결 고리를 못찾았습니다.
@ 천주정의 실화를 다룬 블로그 포스팅입니다.
http://blog.naver.com/vlzkcbzhwl/50191863659?copen=1&focusingCommentNo=11305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