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들 담배는 끊는게 아니라고 죽을 때까지 참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제 스물다섯이 되며 담배를 손에 댄지 꼬박 6년이 되어가고 있으니 나도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치어도 모자라서 이제는 헤아려본 적도 없는 횟수만큼 담배를 끊었고, 그러다 또 피웠고, 그러다 또 끊기를 반복해대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담배를 끊는다는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인내심에 대한 도발에 가까운 문구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든다. 얼마만인지도 모를만큼 얼떨떨한 기분으로 불을 붙인 담배는 그 모호한 기간만큼이나 많은 걸 뽀얗게 만들었고, 이내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법한 생각이 수십개는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 태운 담배는 예상했던 것만큼 역했고, 예상하지 못한만큼 달콤했다.
#2
"어쩌다가 이런 결론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오랗게 물을 내린 유자차는 더할 나위 없이 달고, 온기가 필요했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잔을 덩그러니 동그랗게 돌려본다.
어쩌다가 이런 결론이 나게 됐을까. 해야 할 이야기도, 들어야 할 이야기도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아무런 대화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적잖이 동의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한거야. 하고서. 이제 남은 건 남들 다 하는 것마냥 별 같지도 않은 잘 지내라는, 행복하라는 말을 건네고 주고 받으며 최대한 웃어보이는 것 정도일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 응. 계속 말해봐."
"그냥, 미처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된 것 같았어요. 처음에 오빠가 나한테 밥 먹자고 했을때부터 우리가 사귀게 되었던 그 날까지
사실 고민 정말 많이 했어요. 나로서도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던게, 오빠는 좋은 사람처럼 보였고,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기엔
그러니까 마냥 좋기만 한, 착하고 멍청하고 순진하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정리해서 한켠에 내버려두기엔 매력있는 사람이였으니까"
"칭찬 같아보이는거네 그 말"
"아니 분명히 칭찬이에요. 왜 전에, 아는 사람이 오빠는 잘난 것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느냔 얘길 들었다는 얘기 했잖아요."
"그랬지. 내 시스터가 그랬어."
"그 언니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사람을 못 알아볼까. 오빠는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가끔 나한테 과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꼴랑 한달도 안되는 시간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았냐."
"나만 그랬던건 아닐거니까요."
그 짧은 순간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지, 지금에 와서 그 시절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대체 서로의 어떤 점이 서로를 사랑하게 했고 이별하게 했는지, 비 한바탕 내리고 나면 지고 없는 벚꽃처럼 기억 속에서나 허망하게 흩날리게 될 우리라는 단어를 테이블 위에 손으로 자그맣게 써본다. 내 손길을 따라오는 그녀의 눈빛은 더할나위 없이 애뜻했고, 방금 비워낸 유자차만큼이나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카페 주인이 창문을 열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내 손끝을 나무란다. 조용히 손을 내리고, 이 나른한 이야기를 서로를 위해서라도 끝맺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근데 왜.."
"왜 이런 생각을 했냐구요? 그냥, 미처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알 게 된 것 같았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줬으면, 하는 오빠의 모난 모습들, 한심한 모습들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앞으로 하루든 이틀이든 오빠랑 함께 지내면서 기념일도 챙기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면 참 좋겠다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오빠의 모난 모습들이 너무 마음에 걸렸어요."
"이야기를 하지 그랬니."
"알아요. 무슨 이야기든 일단 내뱉고, 아니 내뱉는단 말은 미안해요. 무슨 이야기든 일단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오빠 생각, 성격.
근데, 어떻게 말을 해요 그런 걸.."
"..."
"어떻게 말을 해.."
"그래.."
"지금 마음으론 안될 것 같아요. 미안하단 말 싫어하는거 알지만,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 듣고 싶어서 널 좋아하는건 아니니까,
근데 뭐 이제는 상관 없겠지. 이제껏 너한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게 너한테 가볍지 않은 말이였단 거 알아.
하나하나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미안한 것도, 고마운 것도 많다."
"...네."
"혹시 부탁 하나만.."
"네? 네."
"한번 안아보자."
"물론, 당연하죠. 나도 부탁 하나만 할께요"
"응."
"나한테 잘 보이려고 담배 끊었죠?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이런 말이 더 힘들게 하겠지만, 나도 힘든걸 어떡해. 이해해줘요.
그리고 이렇게 된거 이참에 그냥 끊어버려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금연, 해봐요. 그럼 더 좋은 사람 만날수도 있잖아."
"오늘부터 술담배가 끊이질 않을텐데 시기부적절한 충고 같지 않냐. 고려는 해볼께."
"...알겠어요. 미안해요. 아니 미안하단 말도 미안해. 안아줘요."
두 어권을 책을 품에 안고 있는 그 아이를 엉거주춤하게 껴안고서, 눈을 감고 잠시나마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접어본다. 이대로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밤을 설레었고 아파왔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없이 끝나는 연애는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했던 것인지, 나의 감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였으며 짧은 시간동안 그 아이를 스쳐지나가며 어찌나 많은 생채기를 남겼을지 고단한 후회가 밀려온다. 올바로 그 아이를 껴안을 수도, 그렇다고 손을 떼고 그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려 물러설수도 없다. 우리는 어쩌면 이따위 어설픈 관계를 연애라는 포장지에 곱게 싸버릴 생각이였을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그 아이에 대한 생각만을 해본다. 이별에 가까워서야 우리는 연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고, 체 떨림이 가시기도 전에 플랫폼을 떠나는 열차마냥 쉽사리 멀어져만 간다. 늘 이딴 식이였다. 맞닿은 어깨와 느껴지는 서로의 숨소리와, 럽떱거려대서 어느쪽에서 나는지 모를 심장소리와 우리의 짧은 시간. 그렇게 또, 10초짜리의 연인. 영영 멀어질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나와, 새어나온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서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그러나 그것은 넘쳐나는 미소가 아니었다. 잠깐 스쳐가는 허망한 웃음이었다. 금방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는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심해서 가. 난 좀 있다가 가야겠어"
"그래요. 먼저 갈게요."
그 아이는 무언가 떨쳐내듯 일어나서 황망하게 자리를 떠나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 아이가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따라나가고, 카페에서 멀어지는, 아니 나로부터 멀어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살랑거리는 머릿결, 한 발씩 꼭꼭 내딛는 발걸음, 아래로 향한 고개. 아주 오랫동안 지금의 광경을 잊지 못할 것을 나는 빤히 알고 있었고,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 아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그 아이를 시선에서 놓친다. 아니, 영영 놓치고 말았다.
#3
사랑이란 언제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타인을 기만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로맨스라는 것이다.* 잘 지내라던가, 행복하라던가하는 그 흔한 이별의 위로들을*, 치킨무따위를 건네듯 무심하고 황망하게 주고받았던 우리는 어쩌면 완벽하게 서로를 기만함으로써 로맨스를 끝내고 싶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한 회상들에 너무 익숙해졌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게,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날의 우리를 생각하다보니 이제 너를 생각하면 그 때의 우리들 가운데에 무엇이 소중한 기억이였고 무엇이 그렇지 않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먼저가 되었건 하나씩 소중함을 잃고 하나씩 잊어가며 지낸다. 뭐든, 그렇게 하나씩 소중해지지 않는 법이고, 그런식으로 잊혀지는 법이다. 그 아이의 금연 클리닉은 많은 고뇌와 인내 속에서 결국 아무런 이해도 주고받지 못하고 끝이 났다.
* 브로콜리 너마저 유자차
* 냉정과 열정사이
* 오스카 와일드
* 임창정 나란놈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