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토론문화 글을 보니 생각나는 소설이 있어서 씁니다.
저는 문알못이므로 이 소설의 작품성이 어떻고의 문제를 말할 자격은 못되고
다만 이 소설이 우리가 자주 구경하거나 참여하는 토론이나 논쟁의 어떤 특성을
아주 신랄하게 보여주는 듯 하여 써 봅니다.
이 소설은 학계의 대표적 워리어(?)인 주인공과 현 교수가 장판파 전투의 실존 여부를 두고 혈전을 벌이다
패배의 위기에 놓인 주인공이 현 교수의 개인 소장물인 고대 중국 보검으로 현 교수를 두 동강내는 막장 스토리입니다.
이토록 피 튀기는 논쟁을 예고라도 하듯 소설은 벼락같은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논쟁이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는 것이다."(11p)
평범한 사람들이 논쟁에 대해 갖는 오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논쟁이란 이견이 있는 사실에 대해 상대와 겨루는 과정이 아니다. 역으로, 상대와 겨루기 위해 이견이 있는 부분을 모색하고 그걸 극대화시키는 과정이다."(14p)
"그러므로 논쟁에서는 상대를 일부러 무시하고, 약올리고, 극도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실수를 이끌어내야 한다."(14p)
이 가소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논쟁 주제를 선별하는 것부터 탁월한 안목이 요구되는데
"좋은논쟁의 주제는 오늘날 이견이 분분한 것이어야 하며, 그럼에도 하나의 유력한 가설이 다양한 증거와 검증, 유추 자료를 통해 대표 학설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며, 일회성 에피소드의 수준을 넘어 근접한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어야 하며, 비 전공자로서도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어야 한다.'(16p)
한마디로 뭘 모르는 사람들도 잘 낚일만 한 주제이면서, 얼핏 보기엔 정답이 없어보이지만 해당 분야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유력한 답이 하나 보이는 그런 주제인 것이죠.
훌륭한 논객의 자격요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닌데 이 즈음에서 비용 대비 효과도 고려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얄밉게 웃는 것 만큼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보는 논쟁의 기술도 드물다."(
탁월한 논객은 상황에 맞는 수단을 택할 줄 아는 자인데
"논쟁 중에는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여야 한다. 상대가 너무나 하찮기에 어이없어 웃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상대가 발끈해서 대들 때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까불다가는 다친다, 얘야' 하는 경고의 웃음을, 상대가 역사적 사료 혹은 세세한 연도를 줄줄 읊을 때면 허공을 보며 '하하, 귀엽군' 하는 경탄의 웃음을 지어야 한다."(21p)
약간 짜잘한 지식을 모르는 것은 진정한 논객에게는 오히려 승리를 위한 좋은 기회인데
"지적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혐오의 대상이다. 문답법을 사용할 때는 알려주길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예의이므로, 그 예의 뒤에 숨어 자신의 무지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23p)
"또한 문답법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몰아간다. 상대가 자신이 아는 바를 얘기한다면, 즉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를 내보인다면 질문자는 그에 맞춰 자신의 전략을 수정할 수 잇다."(24p)
비록 비겁한 상대의 암수에 당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 이를 지라도 정신만 차리면 솟아날 구멍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조자룡이 멋진 인물이며 장판파 싸움은 이미 역사가인 진수에게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고 그것이 몇 사람의 의도에서 나왔건 중복의미요소함수를 고려할 때 이현령비현령이라고 하듯 중국 역사의 상대적 총합에서는 마천루의 난쟁이와 같은 것입니다." (37p)
"나는 그가 나를 혼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괴상한 어법을 사용했음을 깨달았다. (중략) 전에도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상대를 만난 적이 잇다. 나를 비롯한 두 명의 논쟁가로부터 동시에 궁지에 몰렸던 어느 괴상한 작자는 이 기술을 비장의 카드처럼 꺼내들었고, 덕분에 나와 내 동료는 서로의 못생긴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38p)
그러나 아무리 잡기술이 많더라도 진정한 승부사는 단 한칼에 상대의 수급을 거두는 법인데
"이 비열한 자가, 이 교활한 후레자식이, 이 천하의 XXX이 우리의 논쟁을 제멋대로 요약하고 결론내리려 한다! 여태 격렬하게 논쟁해놓고는 자기가 불리해지자 갑자기 제 삼자로서 냉정한 중재 역할을 자처하는 수작인 것이다."(44p)
건전한 토론에 상호존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지나친 소신이 야기하는 트러블 때문일수도 있지만
이 소설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를 알게 모르게 장악하는 이 가소로운 승부욕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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