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2 - 퀵턴하는 여성
내가 안 다니게 된 길이 하나 있다
지금은 물론 이사왔기 때문에 갈 일 조차 없지만
자주 다니던 길을 스스로 봉쇄해버려야 했던 슬픈 전설이다
양재천 둑방길 아래에 아파트며 오피스텔이며, 학교가 줄지어 나오는
왕복 2차선을 따라 난 좁은 뒷길이 하나 있는데
차들도 쌩쌩 안 달리고
학생들 하교 시간 아니면 비교적 한적한 편이고
가로수가 이어진 구간도 있어서 좋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신호등이 없다는 점이 매력이라
성급하지만 조용하고 사람 섞이는 걸 싫어하면서 빠르게 걷는 내가
매우 애용하는 길이었다
하루는 조금 이른 저녁이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꽤나 어둑어둑 했었고
가뜩이나 운이 없게도 난 그 길의
흔히들 우스개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장소, 굴다리 밑을 딱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만화나 소설 처럼 반대쪽에서는 옛 연인이..는 멍멍이뿔
그냥 사람 한명이 나타났다
일반 성인이 20여보만 걸어도 통과할 거리였지만
시력이 안 좋은 나로서는
옷차림이나 체형을 보아 그 사람이 젊은 여자일 거라 추측할 따름이었고
얼굴이나 그런 거 전혀 확인이 불가능했는데
아무튼 이 상태대로라면 굴다리 안에서 마주치게 될 판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반대편의 여성은 시력이 좋았던 것 같다
나를 인식하자마자 얼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바로 퀵턴(바이오 해저드 게임에서 방향을 180도 바꾸는 액션)을 구사해
좀비로부터 도망가는 질 발렌타인과도 같이
순식간에 오던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난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끼고 제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지금이야 워낙 비슷한 에피소드도 많이 알려졌고
유명 연예인의 발언도 있었고
여성분들이 목소리도 많이 내고 계셔서
무식한 나도 알고 있는 남자가 조심해야 할 밤길 사항이지만
당시엔 인터넷 인구도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저 계용묵 선생님의 수필만 읽어본 나로서는
이럴 수도 있다는 사실과 내가 직접 당했다는 실감이
꽤나 큰 갭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 사건이 터진 무렵은 무려...
제대한지 1주일? 2주일도 안 되었을 쯤이다
길고 길었던 2년 2개월의 추억과 함께 위병소를 등지며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무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인생을 주물러 댈 준비를 하고 있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그 날의 충격은 꽤나 컸고
당했던 패배감 역시 이루 다 설명 못할 지경이었다
그 여자의 퀵턴은
당시엔 나루토 유행어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마 난 안 될거야
딱 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테크닉이었다
물론 반대쪽에서 오던 여성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그 현명한 대처는 존경심마저 일 정도의 빠르기였다고 칭찬하고 싶다
허나
난 남자, 그 분은 여자인 것도 문제였고
그 시각에 딱 둘만 거기를 지난 것 또한 문제였고
내가 갓 전역한 빡빡머리 아저씨인 것도 문제였고
내 걸음이 일반인에 비해 유독 빨랐던 것마저 문제였지만
하필이면 또 내 인상이 참 더럽게 생겼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컴컴한 어둠을 헤치고서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야수와 같은 눈빛의 거친 인상의 사내(불행하게도 그게 나다)에게서
자기 방어는 무조건 필수라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퀵턴 한방에 무너져버린 내 자신감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 좀 슬프긴 하지만
여성분들의 무서운 밤 거리 제공에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내가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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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이후에 어두운 밤길에서 저를 만날
젊은 여성뿐만 아닌 모든 분들을 위하여 글 남깁니다
"해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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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2
구두.3
구두.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