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1 - 만원과 꽃다발
대략 10여년 전의 일이다
동생의 고등학교 졸업식으로 기억하는데
부모님과 나는 참석 전에 동생의 학교 앞에서
으레 그러하듯이 꽃다발을 사기로 했다
물론 이번에도 으레
승용차에서 내려 꽃다발을 사는 건 내 몫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만원짜리 한장을 받아 손에 쥔 나는
물샐 틈 없는 인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눈코 뜰새 없이 바쁘신 이 글의 여주인공 앞에 서게 되었다
날이 추웠는지까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운은 확실하게 없었다
바람이 불었으니까
난 마음에 드는(이라기 보다는 사진 찍을 때 꽉 차보이는) 녀석을 한창 고르던 중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손님과 돈을 주고 받던 도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그머니나란 비명과 함께 여주인공께서는
세종대왕이며 퇴계 이황 선생님 몇분을 길바닥에 내뿌리게 되었다
여주인공은 빛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 지폐를 회수했고
나도 거의 반사적으로(아무런 사심없이)
옆에 떨어진 몇장을 주워 드렸다
여주인공인 아주머니께서는 아이고, 학생 고마워요란 대답을 잊지 않고
내가 주운 지폐들을 넘겨받은 것은 물론
꽃다발을 사기 위해 내가 부모님에게 받아 쥐고 있었던
만원짜리마저 가져가려 했다
순간 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당황해서
주특기인 버버벅 모드가 나왔다
"어어어... 왜요? 왜요?"
"주워줘서 고마워요"
아주머니는 잔인하도록 친절한 대답과 함께
내 만원을 결국 강탈???해버리는데 성공했다
그제서야 난 아뿔싸 싶었다
'이거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고쳐 신었구나'
찬바람이 부는 소란스러운 졸업식 참석인들 사이에서
나는 꽃다발 장사하시는 아주머니께 진실을 전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장소도 문제였고
나의 버버벅 또한 문제였고
세상 살기 참 힘든 것도 문제였고
내가 만원 한장을 손에 쥔채로 지폐를 주웠던 행동마저 문제였지만
내 인상이 참 더럽게 생겼던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안 믿었다
절대 안 믿었다
순진무구한 동네 꼬마가 말해도 믿지 못할 판국에
내 얼굴로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건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말해도 소용없었으리라
장사 전에 소지하고 있던 금액과
꽃다발 판매한 수량만 맞춰보면 간단히 나오는 나의 결백도
1년에 한번 찾아오는 정신없는 황금의 1주일을 보내는 이 분에겐
아쉽게도 확인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수십, 수백다발은 팔렸을테니)
그래도 역시 여주인공은 언제나 심성은 착했다
믿지는 않지만 속는 셈 친 것일까
끈질긴 나의 설명(이라기 보다는 요구)에
못내 아쉬운 듯이 돈을 돌려주었다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당시엔 그저 내 또래의 아들내미가 있겠거니 추측했었다
뭐,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만원 때문에 어두운 뒷골목에서 나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란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돌려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날 평생 도둑놈이라 믿는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 얼굴이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그 때 아주머니의 의심도 10%? 아니, 1%는 줄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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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날 억울하게 뺏겼다고 믿는 만원 때문에
몸서리 치고 계실지도 모르는 여주인공을 위하여 글 남깁니다
(물론 제 억울함을 푸는 것도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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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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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3
구두.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