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주번'이라는 것을 했을 때,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매일 칠판지우개를 털었다. 창가에 까치발로 서서 지우개를 탁탁탁 하고 때리면 뿌연 분필가루가 하늘로 천천히 퍼져나가는게 어린마음에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학년이 오를수록 점점 지우개를 터는 일은 점점 내 관심사 밖의 일이 되었다. 하물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기계에 쑤욱 넣었다 빼면 분필가루가 싹 사라져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창가에서 지우개 먼지를 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이를 한살 한살 꾸역꾸역 먹고는 대학생이 되어 칠판과도 거리가 멀어질 무렵에, 나는 학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 창고에 들어섰을 때,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칠판지우개들을 보며 떠억 하고 입이 벌어졌다. 자그마치 18개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우개의 양이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칠판 지우개를 넣는 상자가 어림잡아 20여개..하나에 들어가는 게 30개 정도였으니.. 정말 엄청나게 털어댔었던 것 같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기계앞에 앉아 마스크를 쓰고 드르륵 드르륵 지우개를 털면, 분명히 먼지를 빨아들여주는 기능이 있는 기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지우개를 다 털 즈음에 매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분필먼지를 가볍게 뒤집어 쓰곤 했다.
한 두달 그렇게 제일 막내였던 나의 지우개를 터는 일도 질려갈 무렵, 새롭게 일할 친구가 등장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얼른 지우개를 전부 떠넘기고는 강의실 관리를 주로 했다. 먼지도 별로 먹지 않고 이쁜 조교누나도 자주 볼 수 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아, 역시 짬은 차고 볼일이지. 그리고, 딱 두달쯤 뒤에, 나는 다시 칠판지우개 기계 앞에 앉았다.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여자아이에게 '한번만 더 좋아한다고 했다가는 친구고 뭐고 끝이야'라는 식으로 차여본 뒤로, 어째 예쁜여자들이란 다 표독스러울꺼야! 하는 알게모를 선입견이 있던 나였지만, 유독 이 누나는 그야말로 김대기급으로 적절했다. 뭐랄까, 이쁜 사람이 성격도 고운데 성실하기도 해서, 마치 야구를 보며 저게 류현진이야 이대호야 싶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절대로 놓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온 힘을 다해 내 매력을 어필하려고 아둥바둥댔었던 것 같다. 나서서 일을 도와주고, 간단한 음료수를 자주 가져다 바치고, 행여 볼펜이라도 떨어지면 구사인볼트 마냥 달려가 주워주고, 복사라도 할라치면 냅다 뺏어다 복사기앞에서 끙끙댔었던, 그랬던 매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으로 그 누나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봤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내가 헌팅당하는건 슼이 크보에서 꼴지를 하는 날이 오더라도 오지 않을 일이라 호언장담을 하며 살아왔건만, 오 맙소사.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으아니 나는 무슨 헛소릴 하고 산거야. 뭐지 이 상황은 뭐지 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선택지같은 상황은 하며 혼란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 허우적대기를 약 10여초. 나는 정말 쉬크한척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번호 불러드릴게요 전화하세요 하고 숫자를 드르륵 읇었다. 으아, 복사기에 매달려 있었기에 망정이지, 절대 마주보고는 못할 짓이었을테다. 당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발에 입을 맞추며 오 레이디 그것이 진정 참말이옵니까 하고 말하지 않은 내가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고 통화를 하며 달콤한 꿈을 꾼 것이 딱 한달이었다. 즐겁고 해피해비 블링블링 로리로리로리팝 한 나날들. 그러나 그녀의 퇴직날이 정해진 뒤로부터, 누나는 처음 봤을때의 고운 마음씨도, 성실한 모습도 점점 벗겨져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헌팅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이 어른의 세계에서는 아주 의례적인 사무적 관계였다는 것이었고, 고운마음씨와 성실한 모습이 나한테까지 해당되는건 아니었으며, 어쩔 수 없는 응대속에서 나는 에헤라 제헤라 했던 것이었다. 결국 철없던 어린시절에 좋아한다 말했던 그 아이얼굴이 떠오를때쯔음에는, 이미 누나와의 이야기는 아주 깔끔하게 끝나 있었다. 남아있는 거라곤 영구보관함에 있는 기백개의 문자들 뿐. 이걸 지워 말어 지워 말어 하다가도, 아직도 지우지는 못하고있다.
그렇게 누나와도 멀어지고, 다시 아무일도 없는 매일을 흘려보내다가, 문득 칠판지우개가 털고 싶어졌던 것이다. 산처럼 쌓여있는 지우개를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흰색 마스크와 빨간색 목장갑을 끼고, 털털거리는 지우개 털이기안에 지우개를 쓰윽 밀어 넣었다. 부르르릉, 부르르릉. 지우개 하나에 마음 한조각, 지우개 하나에 마음 한조각. 예쁘고 좋았던 기억이나 화나고 안타까웠던 기억들은 전부 나 혼자 아둥바둥 거렸던 것들이었지만, 그 털털털 거리는 소리에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지우개가 내가되고 내가 지우개가 되는 몰아일체의 경지랄까. 그렇게 나는 칠판지우개 먼지를 먹으며 하나 하나 마음을 추스렸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호수처럼 마음이 잔잔해질 때 쯔음에, 그 많던 지우개들은 깨끗하고 가지런히 정리되었다.
초등학교이후 처음으로, 칠판지우개를 터는 일이 좋아졌다.
지금도, 가끔 머리가 복잡하고 맘이 뒤숭숭하면 어김없이 털털거리는 칠판지우개 털이기 앞에 선다.
털털털털 부르르릉.
털털털털 부르르릉.
역시 콧속이 새하얗게 되서 관둬야겠다. 다시 신입 시켜야지. 허세는 1절만 부릴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