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권에게 약간은 어이없는(중계 탓인지 정말 바람 탓이었는지....)투런-홈런을 맞았지만, 그래도 후속 위기를 한기주가 잘 막았었고, 이후 한 점을 더 내주긴 했지만 곧바로 안치홍이 만회 적시타를 날려 3-1로 뒤지고 있던 6회초.
SK 정상호의 희생 번트 실패가 1-2루 간을 꿰뚫는 안타로 돌변하는 불운, 김강민의 희생플라이와 이어지는 박재상의 적시타로 SK가 2점 더 달아났을 때, 허탈한 마음에 괜시리 다마신 커피잔만 바라보았다.
정상호와 부딪혀 쓰러진 김상훈과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칸베 투수 코치...
어찌어찌 손영민이 이후 잘 막긴 했지만, 6차전까지 빈타에 허덕인 기아 타선이 4점차를 후반부에 뒤집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불가능...
만일 내가 포기하고, 기아팬들이 포기하고, 기아선수들과 코칭스탶이 포기했다면 정말로 불가능은 불가능이 되었을 것이다.
6회말, 2번 타자 김원섭부터 시작되는 기아 타선.
이미 두 번의 타석을 무위로 돌린 바 있는 김원섭이, 상대 투수 이승호의 변화구에 타이밍이 어긋났는지 힘없이 배트를 공에 맞춘다.
7차전 내내 공수에서 활약한 SK 유격수 나주환의 글러브로 공이 빨려들어가는 듯 싶었던 순간, 글러브 안에서 한 번 튀어 솟아올랐고, 당황한 나주환은 곧바로 공중에서 공을 다시 잡아 1루로 던져 보았지만 준족인 김원섭이 이미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행운의 선두 타자 출루. 그리고 타석에 나지완.
나지완. 대졸 2년차 외야수 또는 지명타자.
데뷔시즌의 부진을 딛고 시즌 23홈런 73타점의 준수한 성적으로 한국시리즈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그다.
그러나 1~6차전 내내 그는 시즌 종종 팬들로부터 비아냥 받던 '내플 나지완 선생'으로 일관하고 만다. 특유의 어퍼스윙으로 걸리면 넘어가지만, 대부분 내야플라이 혹은 얕은 외야플라이에 머물고 만 것...
그러나 조범현 감독은 오늘 다시 그를 3번 지명타자 자리에 올려세웠다.
5-1로 뒤진 절체절명의 순간. 상대 투수는 이승호였다.
지난 8월 21일. 그는 대타로 나섰던 나지완에게 동점 상황에서 통한의 만루홈런을 맞은 바 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외곽 꽉찬 볼을 던져본다.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볼.
'이번엔 떨어지는 볼로 낚아볼까?' 그러나 나지완은 배트를 내밀다 만다. 0-2.
더이상 볼카운트를 내주기 싫었던 이승호. 이번에는 타이밍을 빼앗는 느린 변화구를 가운데 꽂아본다.
1-2. 여기서 투수는 고민한다. 2-2는 분명 투수가 유리한 볼카운트.
그러나 만루홈런의 기억은 그를 주저하게 만든다. 잠시 견제구로 숨을 돌린 그는 다시 한 번 아까와 같은 변화구로 2-2를 만들려 했으나 이번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1-3.
'위험하다고 느낀걸까?' 그는 스스로 반문해본다. 데뷔 10년차. 설마 자신에게 그런 트라우마가 남았을 줄은....
'그럴리 없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자신이 뿌릴 수 있는 최고의 공으로 볼카운트를 가져오려 한다. 140Km에 불과하지만 바깥쪽 꽉 찬 코스의 직구. 이걸 칠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내야플라이를 날렸던 '내플' 나지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특유의 어퍼스윙으로 풀히팅을 했고, 그 공은 대한민국에서도 홈런치기 가장 힘들다는 잠실구장 그것도 백스크린쪽으로 넘어가는 투런-홈런이 되고 만다......
나지완이 치명타를 날린 이승호는, 이후 최희섭을 삼진으로 잘 잡고도 김상현에게 볼넷을 내주고 생각보다 일찍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된다.
선발 글로버가 4이닝까지 퍼펙트로 잘 던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점 적시타를 맞고 볼넷을 내주자 서둘로 투입했던 롱릴리프가, 불과 2이닝을 못채우고 내려온 것이다.
4점차의 여유있는 상황. 이승호라는 베테랑 투수가 지난 만루홈런의 기억을 잊고, 기분나쁜 김원섭의 내야안타를 잊고, 그동안 부침을 겪어왔던 나지완에게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면??
어디까지나 'if...'일 뿐이다.
SK의 세번째 투수는 놀랍게도 카도쿠라였다.
그는 불과 이틀 전에 열렸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나왔었다.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이용규의 스퀴즈 번트와, 최희섭에게 맞은 적시타로 2실점하여 비록 패전투수가 되었지만, 5와 3분의1 이닝 동안 단 4안타로 선방했던 그였다.
그 날의 투구수는 82개.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정우람과 정대현은 정상이 아니다. 채병룡도 정신력으로 버틸 뿐이다. 윤길현과 고효준은 멘탈이 부족하고, 김원형의 구위는 원포인트 또는 패전처리용일 뿐이다.
어찌보면 비정상적인 투수 운용이었겠지만, 뒤가 없는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김성근 감독의 선택은 애초부터 매우 제한적이었다.
카도쿠라. 37세의 노장 용병 투수는 그러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여, 대타 차일목을 상대로 풀카운트까지 몰렸지만, 상대를 삼진으로 잘 처리한다. 힛앤런 작전이 걸렸던 1루 주자 김상현은 포수 정상호가 멋진 2루 송구로 잘 처리, 이닝이 종료된다(아직도 왜 차일목이 스탠딩 삼진을 당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작전이 걸린 상황이라면 뭐가 되든 건드렸어야 하지 않았나?).
자신감을 얻은 카도쿠라. '하루만 쉬고 나왔지만,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독과였다.
2사 2루의 좋은 추가점 기회를 살리지 못한 SK. 그러나 카도쿠라는 자신이 막아서 경기를 종반으로 가져가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이닝에 한타자만 상대했으니 2이닝 정도 더 던질 생각으로 그는 자신과 맞선 타자에게 공격적인 투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첫타자를 상대로 과감히 한가운데로 꽂은 직구. 143Km. 속도는 그저 그렇지만 상대 타자는 반응도 못하고 서있다. 포수 정상호는 반쯤 일어선 채로 2구를 기다린다.
2구를 포수의 요구대로 높게 빼 보았지만, 상대 타자는 화들짝 놀라 거의 뒤로 넘어질 뻔 한다.
'조심할 필요 있겠어? 쉽게 쉽게 가자구'
마음이 급한 카도구라. 3구를 1구와 마찬가지로 한가운데 직구로 집어넣는다. 쳐봤자 플라이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정상호 역시 다른 코스나 다른 구종을 왜 요구하지 않았을까. 상대 타자가 안치홍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안치홍. 90년생 고졸 1년차 루키. 미스터 올스타.
올스타전에서 MVP로 뽑혔을 때만 해도, 신인왕 타이틀을 향한 그의 집념은 대단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투수쪽에도 홍상삼이나 이용찬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지만, 이미 올스타 브레이크 시점에 고졸 신인 선수로서 홈런을 10개 이상 쳐내고 있었다. 타율을 조금만 끌어올리거나 20홈런을 넘긴다면 타이틀 홀더가 충분히 될 수 있었던 상황.
그러나 그는 체력관리를 받을 수 있는 투수와 달리, 매경기 출전해야만 하는 야수였다. 후반기 들어 고갈된 그의 체력은 스탯까지 갉아먹어 8월 타율은 어느새 .189의 빈타가 되어있었고, 수비력마저 흔들리는 상황. 조범현 감독은 후반기 그를 많은 경기에 선발명단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 선발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간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한국시리즈 전까지 3주간의 휴식을 취한 점, 그리고 경기 중후반에는 김종국 등과 교체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기에서 그는 끝까지 2루수 자리에 있었고, 그는 부족한 경험이 수비에서 드러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베테랑 급의 호수비를 연일 선보이며, 김종국이 대주자 외에는 나설 자리가 없게끔 하고 있었다. 예상 외의 활약이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이 전자만 맞고 후자는 틀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부호였던 타격. 6차전까지의 성적은 17타수 4안타 1득점 0타점이었다. 확실히 잘 쳤다고만은 볼 수 없던 상황.
그러나 오늘만은 달랐다. 이미 난공불락이었던 글로버로부터 최희섭에 이은 팀의 두번째 안타를 뽑아냈고, 타점도 올렸던 상황. 더군다나 절친이라고 할 수 있는 1년 선배 나지완은 앞서 투런-홈런으로 기세를 올린 바 있다. '한 번 쯤 풀스윙해봐야지'라고 이미 마음먹고 타석에 섰던 그였다.
결과는 나지완과 거의 같은 코스, 비슷한 비거리로 날아간 솔로-홈런.
시즌 14홈런의 선수라면, 아무리 타율이 낮더라도, 같은 코스의 같은 직구가 위험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을까? 역시 무의미한 'if'일 뿐이다.
카도쿠라는 멍해졌다. 순식간에 점수는 5-4가 되었다. 솔로홈런을 맞았을 뿐이지만, 2점차와 1점차는 그 의미의 간극이 너무나도 큰 것이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다음 타자가 나온다. 최경환, 처음보는 이름이었다.
최경환은 72년생의 노장 선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메이저리거의 꿈을 안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가혹한 현실의 벽만 체감한 채로 실패하고 말았다. 멕시칸 리그를 잠시 거쳐 한국 무대에 복귀할 당시에는 LG로부터 1차지명을 받는 등 관심을 모았으나 이후 주목할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두산 - 롯데를 거쳐 2008년부터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었다. 시즌 중 주전이 아닌 대타 혹은 대수비 요원으로 간헐적으로 출장한 그였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도 애초에 홍세완에 밀렸지만, 홍세완의 몸상태가 악화되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번 타석도 선발 출장이나 대타가 아닌, 대수비 투입 후 타순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장성호를 대타로 쓸 수도 있었겠지만, 조범현 감독은 수비를 염두에 두고 최경환이 그대로 타석에 들어서도록 한다.
생경한 타자를 상대로 카도쿠라는 신중히 접근한다. 바깥쪽 꽉차는 코스의 커브로 1-0.
아직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카도쿠라는 같은 코스로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가려 한다.
그러나 아뿔싸 들어간 것은 한가운데 실투였다. 다행히 상대 타자는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2-0.
순간 놀랬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포수로부터 볼을 건네받는다. 어쨌거나 2-0. 유리한 볼카운트다. 이제 어떻게 할까...
결단이 내려질 즈음, 상대 타자가 타임을 건다. '내 인터벌이 마음에 들지 않나? 흠...' 카도쿠라는 생각한다. '그럼, 들어가서 쉬라구.'
정말 절묘한 바깥쪽 낮은 슬라이더가 들어갔다.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이건 건드려봤자 유땅 아니면 3땅. 잘해야 커트라고.
그러나 38살의 노장 선수는 엉덩이가 뒤로 완전히 빠진 상황에서, 배트가 공에 닿을 수 있도록 왼손을 놓아버린 채 오른손만으로 스윙을 한다. 마치 검사가 칼을 휘두르듯이. 그리고 그 칼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젊은 신예 선수의 우직한 풀스윙과 노련한 노장 선수의 절묘한 테크닉이, 카도쿠라와 김성근 감독의 계획을 망쳐놓았다.
이후로도 많은 'if'들이 지나간다. 기아측에서도 SK측에서도.
이용규가 성급하게 초구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광길 코치가 김원섭 타석에 외야수 위치 조정을 하지 않았다면?
최희섭에게 던진 정우람의 바깥쪽 꽉찬 1구가 볼 판정이 났다면?
만루찬스에서 나온 김상현의 컨디션이 정상이었다면?
8회초 SK 공격에서 최정이 희생번트를 제대로 댔고, 그 이후 곽정철이 공을 뒤로 빠뜨렸다면?
로페즈가 조금 이기적인 성격이어서 완봉 이후 7차전 등판을 거부했다면?
아니면 하다못해 로페즈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다면(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안치홍이 내야 뜬공을 놓쳤다면? 아니면 8회말 공격때 희생번트를 제대로 댔더라면?
최경환의 절묘한 기습번트 때 차일목이 좀더 주루를 잘했더라면?
아니면 박정권이 조금쯤 당황해서 주자, 타자 모두 살 수 있었다면?
몇 번의 찬스에서 이용규의 컨디션이 조금만 좋았다면?
수많은 'if' 이후 5:5 9회말이 다가왔다.
페넌트레이스에서 1승 차로 1,2위를 나눠가져간 팀 답게, 시리즈 전적 3승 3패 점수는 9회말까지 5:5.
12회 제한이 있는 연장 승부건만 양팀 모두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투수운용을 한다. 당연한 선택.
Sk는 8번째 투수로 채병룡을 내세운다. 김원형이 뒤에 있지만 사실상 마지막 카드.
82년생의 프로9년차인 이 선수는 지난 몇 년간 많은 이들에게 '악'의 대명사로 불려져 왔다.
빈볼시비 및 벤치 클리어링에서 보여준 태도, 승부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인한 그의 투쟁심은 많은 안티팬들을 불러모았고, 그들은 그의 외모까지 비아냥거리며 그를 질시했다.
그러나 그의 투쟁심이 그르친 것은 어쩌면 그의 명예뿐이 아닐지 모른다.
김광현과 전병두가 이탈한 투수진에 송은범이 불완전한 상태로 복귀하긴 하였으나, 팀은 그 역시 필요로 했다. 아니 어찌보면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도 마운드의 짐을 진 자는 그였다. 이미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도 선발로 5이닝 넘게 던졌고, 6차전에서는 한점차 박빙의 승부를 지켜내기도 한 그였다.
그러나 그동안 그의 팔꿈치는 서서히 망가져 갔다.
선두타자는 동점타를 친 김원섭. 맞춰잡기 위해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진다. 그러나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볼.
'시간이 없다....'
투구수가 많아질수록 구위 하락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그는 장점인 로케이션 잘 된 직구로 승부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가운데로 공이 몰렸다.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유격수 정면 타구.
'그래 동료들을 믿고, 빠른 승부를 하자' 결심이 서는 그였다.
다음 타자는 나지완. 그의 투런 홈런이 아니었다면 SK는 이미 우승기를 휘날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채병룡의 투쟁심이 더욱 불타오른다. 초구는 한가운데 변화구. 이를 놓친 나지완이 아쉬움을 나타낸다.
'칠테면 쳐봐. 어차피 나는 공을 던질 뿐이고, 너를 아웃시키는 것은 내 동료들이다.'
아까부터 로케이션이 뜻대로 되고 있지 않았지만, 채병룡은 개의치 않았다.
바깥쪽 꽉차게 던진 볼이 역시나 벗어났지만, 그래도 이후 파울 실갱이 끝에 2-1 유리한 볼카운트를 잡았다. 여기서 그는 상대 타자가 걸려도 좋지만, 걸리지 않더라도 이후 빠른 직구로 승부하기 위해 변화구로 유인구를 던졌다. 나지완은 아슬아슬하게 배트를 내다 멈췄다.
'자, 이제 니가 치고, 아웃당할 차례다'
정상호 포수는 바깥쪽에 걸터 앉아 꽉찬 코스의 볼을 요구했다. 채병룡 역시 그렇게 던질 심산이었다.
'지완아. 단타는 의미없다. 무조건 풀로 당겨라'
9회말 동점인 상황에서 이미 1사가 된 상황. 안타가 소중하지 않을리 있겠냐마는 황병일 타격코치는 아직은 부족한 나지완의 불안을 떨쳐주기 위해 위와 같은 주문을 한다. 소극적인 스윙으로는 죽도 밥도 안될 상황. 이미 홈런을 친 바 있는 나지완은 고개를 끄덕이고 타석으로 나갔다.
힘만으로는 팀내에서 최희섭에게도 안 진다는 그였다.
한가운데 높은, 139Km 직구는 배팅볼보다도 치기 좋았을 것이다.
그가 믿었던 팀동료 그 누구도, 관중석을 너머 광고판 상단을 맞추는 초대형 홈런으로부터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3년의 군복무 시간이 있다는 것을 위안 아닌 위안 삼아, 채병룡과 그의 팀은 우완 정통파 투수의 팔꿈치를 혹사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못다 이룬 꿈. 3연패의 위업. 그래도 그 누구도 '상처뿐인 영광'이라 폄하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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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의 쉼표를 찍고, 마침내 타이거즈의 열 번째 우승이, 전설로서 완성되었다.
93년 입단 동기 이종범과 이대진은 그라운드에서 뜨겁게 포옹을 했다.
신이라 불리우는 사나이는 그 누구보다 사람답게 펑펑 울었고, 포스트 선동렬이라 불리던 사나이 역시 그를 다독이면서도 속으로 기쁨과 설움이 뒤엉킨 오묘한 눈물을 삼켰다.
메이저리그를 호령할 수도 있었던 198cm의 거구 역시, 결승 홈런을 친 룸메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9년의 무명 설움을 이겨낸 까만 피부의 사나이도,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팀을 7차전까지 내몰았다 자책하던 에이스도, 시즌내내 부상과 병마와 싸워야 했던 자들도, 큰 일을 해낸 두 어린 선수들도, 발을 절룩이는 주장도,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