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즈음에 할머니께서 무릎 수술을 하셨습니다.
평소 퇴행성 관절염 때문에 고생하시다가 아들, 딸들이 주는 용돈을 몇 년 동안 알음알음 모아 혼자서 인공 관절 수술을 하신건데요. 수술은 여지없이 잘 되었지만 회복되는 동안 다리를 못 쓰는 관계로 입원 생활 동안 간호인이 꼭 필요했습니다.
급속히 나빠지는 경기 때문에 부모님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었고 고모나 삼촌들은 멀리 살아서 결국 당시 학생이던 제가 간호를 하게 되었지요.
아무리 불효막심한 손자라지만,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까탈스러운 분도 아니고 까짓거. 화장실 갈 때 휠체어만 태워드리면 된다는데.
그렇게 돌입한 간호 첫 날 저는 뼈저린 후회를 하고 맙니다. 병원이라고는 문병 조차도 별로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여성 병동에 남자 가족이 간호인이랍시고 붙어 있는 경우는 저 밖에 없더군요. 환자분들 옷 갈아입을 때마다 죄 지은 것처럼 나가야 되고. 다 같이 쓰는 병실이라 다른 할머니들도 종종 챙겨드리지 않으면 뒤에서 욕을 먹는 빡센 눈치와 코치의 데스필드......!
육체 노동보다 정신 노동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하지요. 여자들만 있는 곳에 남자 혼자 있으면 지옥이 펼쳐진다는데 저는 압니다. 호호 할머니들이 계신 병실도 압박감이 느껴졌는데 직장 상사쯤 되면 오죽할까요. 살아남기 위해서
[주시는 대로 다 먹기] [힘 쓰는 일에 다 나서기] [드라마 보면서 못된 X 욕하기] 등등 모든 스킬을 구사하며 '효자 손주'의 위치를 공고히 해갔습니다.
하늘이 감동하신 것인가, 어머니한테 잠시 들러서 반찬거리를 싸가지고 병원으로 돌아갔더니 엄청난 미녀 한 명이 같은 병실에 입원을 했더군요. 까무잡잡한 피부에 비쩍 마른 몸, 환자답게 화장이라고는 못 한 맨 얼굴이었는데도 묘하게 요염한 얼굴이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예사 미모가 아니여] 하시며 마치 요물 보는 것마냥 수군거리실 정도였으니 정말 엄청났지요.
저는 짝사랑에 가까울만큼 그 아가씨에게 푹 빠져버렸는데 결정타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병실의 모든 할머니, 아주머니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넉살 좋고 친화력 있는 서글서글한 모습. 그 귀여운 경상도 사투리. 고집스런 할머니에게는
[우리 할매때매 몬살겠네!] 멋쟁이 할머니에게는
[할매! 내가 발가락에 매니큐어 발라주께!] 요즘 세상에 어르신들과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는 젊은 여자, 찾기 힘들죠.
의사가 회진 왔을 때 슬쩍보니 가슴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습니다. 옷을 얼마 걷어올리지도 않았는데 보일만큼 길고 큰 절개 자국이더군요. 수술 얘기가 전혀 안나오는 걸 보면 최근에 수술 한 건 아니고 그 이후 몸상태가 나빠져서 다시 입원을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보름에 가까운 입원기간 동안 문병 온 사람이 없었거든요.
퇴원 일정과 관련해 의사와 장난스레 투닥거릴 때는 선머슴이 따로 없다가, 가끔 병실에서 마주쳐 저와 이야기를 나눌때면 숫기라고는 없는 여자가 되서 몇 마디 나누는둥 마는 둥. 그러다가 할머니들 옆에 가면 또 재잘재잘 할매할매. 그 갭은 또 얼마나 아찔하든지. 의사 선생님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병원 생활을 오래한 티가 났는데, 할머니들에 대한 친화력도 거기서 온 모양입니다.
미녀!미녀! 영화에나 나올법한 병약 미녀! 초췌한 모습으로도 요염한 끼가 보이는 미녀! 병원 생활을 오래해서 할머니들을 휘어잡을 줄 아는 미녀! 병원 생활을 오래해서 또래 남자들에겐 숫기가 없는 순진한 미녀! 가족도 없이 홀로 입원생활을 척척 하고 있는 기특한 미녀! 미녀!미녀! 으아아.
그러면 본인은 어떠한가. 투철한 머슴 정신과, 요즘 보기 힘든 '할머니 손수 간호하는 손자' 타이틀로 주가가 치솟은 병실의 신성. 평판이 날로 높아져 우리 할머니가 방실방실 웃으시는 복덩어리가 아닙니까. 병실 밖으로 들락날락거리다가 할머니들끼리 제 칭찬을 하시는 모습을 한 두번 본 게 아니었습니다.
미녀 아가씨는 할머니들과 매우 친하니, 당연히 제 평판을 들었겠지요. 또 우리 할머니들이 오지랖에 가까울만큼 그런 쪽으로 밀어주는 건 또 얼마나 잘합니까? 그러한 기대를 품으며 마음 졸이는 사이 덜컥 운명의 날이 오고 맙니다.
경과를 두고봐야된다고, 좀 더 있으라고 만류하는 의사와 넉살좋게 투닥거리더니 정말로 퇴원 날짜를 앞당겨버린 거지요. 입원 환자가 미어터지는 큰 병원에서 담당의가 붙잡는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텐데, 대수롭지 않게 튕겨내는 모습을 보면 아마 한 두번 겪는 입원이 아니었나 봅니다.
아가씨를 붙잡고 전화번호를 따야 하나. 황급하게 가슴 속에 있는 용기라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 원기옥을 충전했죠. 조기탄이나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할머니 틀니를 씻으러 잠시 화장실에 갔다온 사이 병실 안에서 이런 대화가 들리더군요.
[전화번호 하나 주고가라. 우리 손주 주구로...]
아! 그랜마더!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가씨를 데리러 그쪽 아버님이 오셨고,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우리 할머니가 노련한 직구를 들이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가 오가는 중에 들어가는 것이 쑥스러워서 열어제치려던 문고리를 놓고 다시 복도로 나왔습니다. 커피를 한 잔 뽑아서 홀짝이고 있으려니 미녀와 가족들이 우르르 나오더군요. 이제 나간다고 환자복을 벗고 제대로 화장을 했는데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가벼운 인사로 작별을 고하고 멍하니 떠나간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병실에 들어섰습니다.
심장이 빠운스빠운스.
"할머니....혹시...전화번호...?"
"남자친구 있다더라."
그래 분명히 있겠지. 15일동안 문병도 안오고 전화통화도 한 적 없어서 할머니들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남자친구가.
남자에게 숫기가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저랑 말하는 게 싫었나봐요.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1-07 09:1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