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어체로 작성함을 양해 바랍니다.
* 글이 긴데 개인적 경험을 주로 다루는지라 3줄 요약을 쓸 수가 없어서...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 사이트
2000년이었던가 2001년이었던가. 여하간 십년도 더 된 일이다.
내가 첫 정을 주었던 사이트의 운영자가 돌연 사이트 폐쇄를 '선언'했다. 공지라고 몇 줄 올라온 것은 개인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사이트를 닫는다는 일방적인 '통지'였다.
회원 300여명, 실 활동 회원이 200명 조금 안되는 소규모 사이트였지만, 커뮤니티의 주제가 명확했고 글리젠도 좋을뿐더러 소규모 사이트 치고는 소위 '친목질'도 없고 규정이 제대로 잡힌 좋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연인관계로 발전해 만남을 이어가고 있던지라 그곳에 정이 각별했다. 애초에 '사이버 공간'과 '사이버 세계의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첫 정을 주었던 곳이니 오죽했으랴.
아무튼, 나는 당시 그곳 운영진 9명 중 한 사람이었는데, 운영진들도 사이트의 '주인'이 내건 공지문을 보고서야 사이트 폐쇄를 알았을 만큼 독단적인 일이었다.
그 사이트는 회원이 300여명 되는 곳이었으나 호스팅 비용과 도메인 유지 비용을 사이트의 '주인'이 홀로 감당하고 있었으며, 사이트의 기술적인 유지보수 또한 사이트의 '주인'이 홀로 해내는, 그야말로 '개인 사이트'였다는 사실을 운영진과 회원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운영진을 지칭하는 명칭 또한 사이트의 '주인'을 돕는다는 의미였다. (특이한 명칭이었기에 공개할 수 없음은 양해바란다.) 당시 운영진들은 그 명칭을 '사이트의 회원'을 돕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사이트의 '주인'은 자신을 돕기 위한 이들로 운영진을 모집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트의 '주인'은 일주일 뒤 사이트를 닫을 예정이니, 필요한 글은 개인 컴퓨터에 문서로 저장하라는 친절한 조언을 남기고는 잠수를 타 버렸고, 회원들과 운영진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다들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그렇게 어영부영 3일이 지났다. 차츰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사이트를 이어받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 '총대'를 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오지랖에서였는지 그놈의 정때문이었는지 아무튼 이대로 정든 곳이 사라지는걸 두고 볼 수 없다는 마음이 들어 운영진을 모아 긴급 회의를 열었다. 당시 나는 그 운영진 중 가장 막내였었는데, 언니와 오빠들은 발을 구르면서도 '생업'때문에 선뜻 나서기를 꺼려했다. 당시의 나도 사실 눈에 불을 켜고 돈을 벌 때였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않자 결국 내가 '총대'를 메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회의의 결과는 내가 총대를 메면 지지해주겠으며 내가 새 운영자가 되어도 지금처럼 운영진의 직을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곧바로 사이트의 '주인'에게 메일을 보냈다. 당시 우리의 주된 연락 수단은 메일과 운영진 게시판이었고, 사이트의 '주인'은 운영진 모두의 연락처를 알지만, 사이트 '주인'의 연락처를 아는 운영진은 부운영자 한 사람 뿐이었다. 그녀는 사이트 '주인'과 함께 잠수를 타 버렸으므로, 이메일 외에는 사이트 '주인'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사이트를 물려받아 운영하겠으며, 비용 또한 내가 지불할 것이므로 사이트를 '양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사이트 '주인'은 다음날 답장을 해왔다. 사이트를 이어받아 운영하는 것은 막지 않겠으나, 도메인과 호스팅 계정은 넘겨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정보로 가입되어 있으므로 개인정보를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운하긴 하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나는 그에게 다시 제안을 했다. 호스팅 계정은 넘기지 않아도 되니 서버 정보를 백업해 보내주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과, 도메인은 내놓으면 내가 다시 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제든지 다시 사이트를 운영할 마음이 생긴다면 다시 넘겨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애정을 쏟아 가꿔온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와 도메인은 자신의 추억이므로 넘기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해왔다.
사이트의 '주인'이 만들고, 비용을 대며 유지하고, 관리해 온 곳은, 그 곳을 채운것이 회원들의 노력과 시간이라고 할 지라도 온전히 '주인'의 의사에 따라 처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황당하지만 당시의 현실이었다. 나는 그 '주인'에게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달겨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촉박한 시간이 나의 화를 짓눌렀다. 결국 사정 끝에 '주인'에게서 한가지 '협조'를 약속받았다. 도메인이 만료되는 시점까지 내가 만들 새 사이트를 연결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끝끝내 그동안 쌓인 그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는 넘겨받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당시의 나는 제로보드를 쓸 줄만 알던 초짜였다. 부랴부랴 서버 호스팅이며, FTP며, 제로보드 설치며, frame이며 iframe이며 header와 footer등이며 하는 것을 밤을 새워 하루만에 독학했다. 하루만에 허둥지둥 사이트를 만들고, 사이트 내에 대체 사이트를 홍보했다. 가입러시가 이어졌고 그와 더불어 버그 제보가 속출했다. 태그라고는 폰트 조금 꾸미고, 사진과 동영상 삽입하는 정도밖에 할 줄 몰랐던 놈이 하루만에 독학해서 만든 사이트니 뭐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밤을 새워 버그와 씨름을 했고, 약속대로 기존의 운영진들은 새 사이트의 시작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개인 사이트'는 사이트 '주인'의 뜻대로 닫혀버렸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내가 만든 새 사이트의 주소만을 메인에 남긴 채.
운영진
사이트 하나가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할 게 너무 많았다. 나는 매일밤 지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제로보드 사이트를 뒤져가며 제로보드에 대해 배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이트 유지보수에 관한걸 독학했다. 기술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유저들이 원하는 기존 사이트의 기능과 디자인을 구현하기 바빠 사이트 내부의 일은 손댈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 일은 온전히 기존 운영진들이 맡았다. 게시물을 관리하고 회원들의 문의나 요구를 듣고 답하는 것도 새 사이트에서는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본진이라고 해야 할 지, 전신이라고 해야 할는지. 아무튼 기존의 비교 대상이 있으니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운영진들은 스트레스와 '생업'을 이유로 내게 사임의 뜻을 건네왔다.
나는 새로운 운영진을 뽑았다. '개인 사이트'에서 사용하던 운영진의 명칭은 버리고 '운영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곳이 내 개인의 의지대로 열고 닫고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하는 곳임을 명시하고 함께 할 사람을 원하노라 구구절절 썼던 것 같다. 6명이 지원을 했고, 가리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니었던 나는 그들의 지원서에 들어찬 포부를 읽고는 무조건 ok를 했다.
내가 새 운영진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딱 3가지였다. 사이트에 애정과 주인 의식을 가져줄 것, 권한을 남용하지 말아줄 것, 운영진임을 숨겨줄 것.
새로운 운영진들과 논의 후 게시판 하나를 새로 파서 회원들 모두가 동참하는 '규칙'을 만들기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 기존 '개인 사이트'에서 규칙을 가져올까도 생각했으나, 새 부대에 담은 새 술은 그 맛과 향이 달라야 한다며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규칙들은 뭐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반말과 욕설 사용 금지, 개인글과 지명글과 개인 호칭 금지, 존칭과 ~님 사용, 외계어 사용 금지, 글 하나에 이모티콘 10개 이상 금지, 최소 10줄 이상 작성할 것... 뭐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게중에는 '개인 사이트'와 비슷한 규칙도 많았다.
어쨌든, 운영진은 이렇게 정해진 규칙에 의거해서만 권한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운영진이 어떠한 글을 삭제하거나 회원의 등급을 강등할 때에는 회원에게 쪽지로 그 사유를 알려야 하며 반드시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를 사이트 규칙 내에서 댈 수 있어야 했고, 그렇지 못하고 자의적인 처리를 했을 경우 회원들이 신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회원들 또한 신고의 이유와 증거를 입증해야 했는데, 회원의 신고 내용이 사실일 경우 해당 운영진에게 경고 처리를 했다. 경고 누적 10회가 되면 운영직을 박탈하게 되어 있었다. 운영진 게시판 최상단의 공지는 운영진의 경고 누적 현황이었다.
내가 '개인 사이트'의 운영진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 있었다. 운영진은 그 직함만으로도 일반 회원들에게 일종의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표현으로는 '네임드' 대접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내 스스로가 보기에도 허접한 글이, 일반 회원의 잘 쓴 글 보다 호응이 좋을 때가 많았다. 댓글 자체도 많이 달리고, 칭찬도 많았고, 태클 거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내 글의 위아래에 올라온 다른 회원의 글이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글은 일종의 '대접'을 받았다. 아마 운영진의 '노고'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으리라.
새 사이트에서는 그런 식의, 일종의 '계층화'가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운영진에게 제안한 것은, 운영진으로서 사용할 아이디와 일반 회원으로서 사용할 아이디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운영진으로 사용할 아이디를 새로 만들고, 기존에 사용하던 닉네임은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운영진으로서의 활동은 운영진 아이디로, 그 외에 일반적으로 사이트를 이용할 때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아이디를 사용하여 일반 회원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했다. 또한 기존에 쓰던 닉네임을 새로 변경하되 그것을 다른 운영진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해서, 운영진들도 일반 회원의 아이디로 사이트를 이용할 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회원은 자신들 중 누가 운영진이 되었는지 모르고, 운영진들은 자신들 중 누가 저글링앞다리(예시)인줄 모르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나 역시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었다.
꽤나 성공적인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운영진들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느라 좀 귀찮아 진 것이 단점이었지만. 뻘글에 운영진이라고 좋은 댓글이 달리지도 않았고, 회원간 의견이 갈렸을때 운영진이라고 비호받는 일도 없었다. 나아가서는 내 글이 운영진에 의해 삭제되는 일도 간혹 발생했다. 항의를 하면 운영진은 왜 그 글이 삭제되어야 했는지 사이트 규칙에 의거해 알려주었고, 한발 물러서 내 글을 읽어보면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진짜로 억울한 경우도 있어서 신고한 적도 몇 번 있다. 크크크) 그럴때마다, 이 글이 운영자라는 내 아이디로 올라왔더라면 삭제는 커녕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운영진들도 자신의 글이 삭제되거나 나아가 회원 등급 강등까지 일어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운영진의 운영진용 아이디와 일반회원용 아이디 모두를 아는 나로서는 요즘말로 '웃픈' 경우가 많았다. 운영진이 다른 운영진을 신고하는 경우가 있을때마다 나는 이러다가 운영진들끼리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기도 했으나, 차츰 그런 일은 줄어들었다. 운영진들도 일반 회원과 똑같이 대우를 받다보니 일반 회원으로서 받는 억울한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삭제나 강등 남발도 줄어들고 대신 글의 수정이나 자진 삭제를 권유하는 쪽지를 보내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영진들과 회원들 사이의 분쟁이 줄어들자 운영진들이 욕 먹는 경우도 줄어들었다. 사이트의 분위기는 자연히 정적으로 바뀌었으나, 싸움이 없어 좋았다. 감정 상할 일이 없으니, 운영진도 회원들도 사이트에 주인의식과 애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만 해본다. 직접적으로 듣지는 못했으므로.
회원용 아이디로 정성스런 글을 올려놓고 댓글도 몇개 못 받는 운영진을 볼때면 안쓰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김문수가 "나 도지산데" 했듯이 "나 운영진인데 내 글좀 읽어보쇼" 하고 밝힐 수 있었다면 많은 호응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싶어서. 그래도 운영진들은 그런 설움도 이기고, 때론 신고를 받아 경고도 받으면서, 경고를 받을때마다 소명서까지 써가면서, 돈 한푼 받지 않고 사이트를 위해 '무보수 봉사직'을 열심히 해줬다. 이름을 밝힐 수 없어 '명예'를 받을 수도 없는, 명예직도 아닌 자리를 지키면서.
처음에 이 운영진·회원 이원 아이디 시스템(우린 이것을 그냥 '비공개 운영진'이라고 불렀다.)을 만들 때, 운영진들끼리 했던 논의중에 이런 게 있었다. [운영진은 특별 등급인가?] 당시 우리 사이트의 회원 등급은 10등급 체계였고 운영자인 나는 1등급, 운영진들은 2등급, 일반 회원들은 3등급부터 등급이 나뉘었다. 당시 운영진 게시판에서 우리는 운영자와 운영진이 가진 1, 2등급이 단순히 시스템 상의 편의를 위한 등급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 특권이 있는 등급인지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했다. 모든 회원의 등급은 3등급부터 시작하며 1등급, 2등급은 시스템 상의 편의를 위한 등급이다-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운영진은 타인이 공들여 작성한 글을 자의적 해석에 따라 삭제할 권한도, 회원이 사이트에 글과 댓글을 써가며 쌓아올린 포인트로 승급되는 등급을 낮출 권한도 가진다. 이건 가벼운 권한이 아니라 사이트 내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이므로 운영진은 이 이상의 권한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 권한을 가진 것은 순전히 내가 좋아서 자원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회원들이 운영진이라는 이름을 믿어주었기 때문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므로 이것은 권력이 아니라 과제다. 회원은 운영진이 자신들의 믿음을 깨고 과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운영진이 가진 권한을 견제하고 제재할 수 있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뭐 이런 논의를 우리는 계속해서 했었다.
작은 곳이었지만, 다같이 웃으며 안녕을 외칠 때 까지 그 곳은 꽤나 민주적이고 평등한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곳을 만들기 위해 운영진도 회원들도 그리고 운영자였던 나도 노력했었다고 생각한다. 십여년 전, 아직 커뮤니티 사이트를 운영하는 데 지금보다 노하우가 적었을 때에도 그랬다.
PGR21
그동안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계보랄까, 역사랄까 하는 것들이 꽤나 쌓였다. 커뮤니티 운영 노하우들도 이전보다 많다. 반면교사 삼을만한 사건과 역사도 많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것 같다.
2015년, PGR21에게 묻고싶다.
이 곳은 '개인 사이트'인가?
이 곳의 운영진은 '특권 계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