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거장 바텐더이자 영국 바텐더들의 대부인 피터 도렐리 선생이 한국에서 강연을 개최했다. 본인 스스로 '나는 강연이나 설교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냥 즐겁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으면 한다.'라 했으니 강연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편의상 강연이라고 치자. 참가비가 조금 센 편이어서 참가 신청 마지막 날까지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가기로 했다. 최근 '스스로를 조금 더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도 했고, 비싸봐야 영국에 가는 것보단 싸게 먹힐 테니까.
그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오래도록 근무한 사보이 호텔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피터 도렐리. 1940년 로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플레이보이(일흔 몇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남이다). 십대 후반에 홀로 영국에 건너가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스물세 살에 사보이 그룹의 바텐더로 커리어를 시작, 런던 사보이 호텔의 헤드 바텐더가 된 사나이. 엄청나게 재미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농담과 특유의 쾌활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름대로 재밌었다.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대망의 2부가 시작되었다. 바텐더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는 수많은 디테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손님의 응대, 칵테일의 창작, 칵테일의 추천, 공간의 배치, 청소. 표정 관리 등. 거칠게 요약하자면 '완벽주의자의 일반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중간 중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손님에게 칵테일을 건넬 때에는 단지 그 손님의 시선뿐 아니라 공간 전체의 시선을 고려하라. '바'라는 곳은 결국 술을 즐기는 장소이니 지나치게 정중한 환대보다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환대를 고려하라. 서빙을 할 때에는 파티를 개최한 호스트의 느낌으로 손님을 즐겁게 해 주어라. 바는 화장품 같은 것이고, 바의 진짜 맨얼굴은 결국 바텐더다. 기술적인 '맛'에 지나치게 집중할 필요는 없다. 화제를 이용한 칵테일과 칵테일을 이용한 화제를 능란하게 다루어라.
강연이 끝나고 절룩거리는 영어로 질문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완벽을 지향하며 모든 디테일에 힘을 쏟으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고, 어떤 상황에서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그게 상당히 힘들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라면 결국 챙겨야 할 디테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텐데,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있었다.
'당신은 사보이 그룹 부속 레스토랑의 바텐더로 커리어를 시작해서 결국은 사보이 호텔의 헤드 바텐더가 된 사람이다. 당신이 지휘하는 런던 사보이 호텔의 <아메리칸 바>에는 피아노도 있고 피아노 맨도 있으니 그것들을 손님의 시선을 조율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내가 운영하는 서울 구석의 <바 틸트>는 5만 원짜리 스피커를 쓴다. 당신의 바에는 니콜라스 케이지도 왔고 믹 재거의 전 부인도 왔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왔겠지만 내 바의 손님들은 대체로 TV 프로그램의 주인공보다는 신문의 사회면에 김모씨로 등장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더 높은 사람들이다(이 자리를 빌려 얼마 전 내 너저분한 바에서 위스키 한 병을 드신, TV에 가끔 나오곤 하는 모 감독님께 정말로 감사드린다). 당신은 <비싼 가구들이 빚어내는 럭셔리한 분위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라고 했지만 아마 내 바에 있는 모든 가구를 다 팔아도 당신의 바에 있는 앤티크한 의자 하나를 사지 못할 것이다. 돈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문제의 많은 것은 돈을 요구한다. 당장 나는 엊그제 다섯 번째인지 여섯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 <좀 더 인체공학적이고 기능적인> 구조 변경 공사를 위해 또 돈을 빌렸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먼저 챙겨야 하는가?'
영어를 무한대로 잘 했다면, 혹은 질문과 답변 시간이 무한대였더라면 아마 이렇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허나 현실이란 한정적인 자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숨 쉴 틈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우선순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모든 것을 최고로 해내야 한다. 언제부터 바텐더가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었나? 열정을 가지고 일을 즐겨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해서 일에 더 익숙해지도록 하라. 언제나 고민하고 상상하라. 훈련과 고민이 돈이 드는 일인가. 상황이 안 좋고 자원도 모자란다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방법과, 모자란 자원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발버둥치는 방법.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솔직히 그의 답변을 들은 그 순간에는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도 힘이 남아야 하는 거고 고민도 여력이 남아야 하는 거잖아. 모든 것을 챙기라고? 당신이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다고. 내가 물어본 게 그게 아니잖아. 깐깐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아니면 내가 영어가 짧아서 잘못 알아들었나.
강연이 끝나고 집에 오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50년 경력 고수 바텐더의 강연이라고 엄청나게 대단한 걸 기대했는데 기대보다는 별 거 없네. 그냥 다 열심히 하래.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하냐.' 야구의 거장, 야신 김성근의 열혈 팬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엄청 못하는 고등학교 야구선수인데, 김성근 감독이 너희 학교에 특별강연을 왔다고 해봐. 그때 네가 이렇게 물어본다고 치자. <감독님. 저는 체격도 작고 체력도 별로라 타격도 안 좋고 주루도 영 별로고 수비도 그냥 그런데, 어떤 것에 집중해야 될까요?> 그러면 야구 50년 넘게 한 70대 노인 김성근이 뭐라고 대답하겠냐. <너는 체격이 작으니까 수비 훈련이나 열심히 해봐라>라고 하겠냐 아니면 <죽을 힘을 다 해서 되는 데까지 다 해보고 그 다음에 우선순위에 대해 생각해봐라>라고 하겠냐. 마찬가지 아니야? 바텐더 50년 넘게 한 70대 영국 노인이 동아시아 변방의 듣보잡 꼬꼬마 바텐더의 쓸데없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겠냐?'
그렇군.
나는 맥락도 없이 '열심히 해라. 그러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다.'라고 먼저 질러대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그 말은 대체로 틀린 말이고,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인 지점을 은폐하며, 개인적으로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만약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가게에 와서 대뜸 내게 '넌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느냐?'라고 지껄인다면 가게에 비치해둔 야구 배트로 그의 얼굴을 좀 더 몰라보도록 만들어줄 용의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몇 년간 뭘 잘 해보려고 하는데 뭔가가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업계의 전설이 된 노인에게 '잘 해보고 싶은데, 상황이 어렵습니다. 어쩌면 좋죠? 뭐부터 할까요?'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가 '열심히 해. 모든 디테일을 챙겨. 스스로를 단련하고 계속 고민해'라고 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건 꽤 의미 있는 이야기다. 특히나 스트레스를 좀 받게 되면 총체적인 디테일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모르겠다.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내가 관심 있는 거/잘하는 거나 더 집중해야지.' 하는 나 같은 무책임한 사람에게는 더욱. 우선순위는 분명히 중요한 문제지만, 실행계획을 위해 우선순위를 짜기보다는 변명을 위해 우선순위를 짜는 경우가 더 많은 나 같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더욱.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나 같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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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youngjune-joo/story_b_7556554.html?utm_hp_ref=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