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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0 15:52
예전에 한 블로그에서 1980년의 이른바 '서울역 회군'에 관한 글을 읽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가슴이 턱하고 내려앉았는데요.
"그리고 광주는 고립되었다" 이 한문장에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주체하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15/05/20 16:02
당시 아버지께서는 도망친 후 몆 주간 고구마와 물만 먹으며 숨어계셨다고 합니다. 길거리에 나갔다가 잡혀갈까봐... 당시 광주는 거대한 감옥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05/20 15:58
광주 사람들이 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복수하지 않는 것은 전두환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음은 치킨님과 같겠지만요.
15/05/20 16:17
망월동 5.18 묘지에 스무번째 봄이 왔다. 새 묘역은 망월동이 아니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이다. 그러나 다들 망월동이라고 부른다. 새 묘역의 유영 봉안실에는 1980년 5월에 총맞아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들 3백여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교복 차림 고등학생도 있고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부도 있다.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온 주검들이다. 다들 사진틀을 깨뜨리고 세상으로 걸어나올 것처럼 생생하다. (중략) 그때, 젊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앉아 있다가 군홧발에 채였던 태아들이 다들 죽지 않고 이 세상에 나와 지금은 스무 살이 되었다.
(중략) 목발을 짚고 꽃가게를 경영하는 총상 피해자 이세영 씨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그 사태에 대한 인식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구둣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두들겨 맞고 나서, 총에 맞고 나서, 이 사태가 무슨 사태인지 알게 되었다." "총을 쏘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갈 때 무섭지 않았나?"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그 무서움이 갑자기 분노로 바뀌었다. 그때 온몸이 떨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목발에 대해서 묻지 않는가?"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왜 목발을 짚느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옛날에 다쳤다고 대답했다." (중략)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한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 김훈, 「망월동의 봄」에서 인용했습니다. 어찌 잊으라 하겠습니까.
15/05/20 16:33
이 문제는 광주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떠났죠.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민주주의를 향유한다면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할 역사입니다. 저 역시 죽을 때까지 이 역사에 대해 잊지 않을 것이며, 교사로 남아있는 기간동안 항상 그날이 오면, 그날의 역사를 말 할 겁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 것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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