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다짜고짜 미래의 여자 친구라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여자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평소 시덥지 않은 망상을 일삼는 사람이다. 우습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은 과거에 몇 번이고 상상해봤다.
미래의 내 여자 친구가 어린 내게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해줘야 할까. 아직은 여자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를 여자 친구로서 대해 줘야하는 걸까. 또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텐데 지금의 내가 미래의 그녀와 평탄하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일들을 어쩌면, 여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밌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흥미는 흥미일 뿐이고, 여자가 단순 미친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지라도, 제시한 상황이 굉장히 매력적이고 끌린다는 점이다. 평행세계에서 현 여자 친구와 같은 여자 친구가 찾아와 두 명의 여자 친구를 두게 된다면 어떨까 싶었던 상상보다는 훨씬 덜 충격적이고 현실적이다.
일단 만나죠.
이런 이벤트를 마냥 무덤덤하게 넘기기에는 내 호기심은 인내심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다섯.
미래의 여자 친구라 주장하는 여자를 만났다.
카페로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그녀의 청순한 첫 인상과 함께 든 생각은 글쎄? 미래의 여자 친구라는 주장이 정말 사실이라면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 다른 취향을 가진 것 같다. 물론 그녀가 예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그 어떤 남자가 봐도 그녀는 청순하고 예쁘다. 의외로 글래머러스하다는 점은 그나마 지금의 내 취향이다.
하지만 문제는 글래머러스한 점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지금의 내 취향과는 완벽히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런 청순한 여자 보다는 조금 더 퇴폐적이고, 뇌쇄적인 그런 이미지의 여자야 말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파괴적으로 다가와 나의 내면까지 부수고 흔들어 버리는 그런 여자야말로 내가 언제고 원하고 바라던 여자였다.
미래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이 다른가보죠?
내가 마냥 그녀를 믿고 맞장구 쳐줄 수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난 너무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나 내 취향과는 전혀 다른 미래의 여자 친구를 보니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거짓말, 거짓말! 그래 괴팍한 망상은 망상일 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이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망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 짜릿함은 아마 오르가즘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은연중에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이중적인 것이 내 상태였다.
달라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약간이나마 거짓으로 기울던 무게추가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그럼 그렇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취향이었다면, 절대 이 여자와 만났을 리 없다. 다양한 망상을 하는 나이지만, 언제나 내가 바라던 꿈속의 여자는 팜므파탈에 가까운 여자들이었으니까. 그런 여자라면 사랑하다 부서져도 갈기갈기 찢어져도 괜찮을지도.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여자 친구라는 것을 제게 증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여섯.
고향은 인천이지만, 살기는 쭉 서울에서 살았죠. 어릴 때 부모님 두 분 다 늦게 오시는 날이 많아서 위로 다섯 살터울인 누나가 항상 돌봐줬고요. 누나랑은 그래서인지 언제나 각별한 사이였어요. 누나 이상으로, 마치 엄마를 따르듯.
상상, 아니 상상 이상의 망상을 하길 좋아했죠. 언젠가도 제게 미래의 여자 친구가 본인한테 찾아오면 어떡하지? 하고 묻기도 했죠. 막상 정말 이런 상황이 생기니 놀랍기도 하고, 얼떨떨하네요.
강아지보단 고양이를 좋아했어요. 눈치 없이 들이대는 개보단 지 필요할 때만 부비는 고양이가 훨씬 매력적이라고 했죠.
치골 옆엔 작은 점 세 개가 있죠. 다 이으면 정삼각형의...
딱히 좋아하는 색은 없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는...
친구는... 군대에서 있던 일인데...
일곱.
무게 추는 거짓에서 진실로,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울어진다. 어떻게 내 과거사며 취향이며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을까. 첫째, 그녀는 정말로 미래에서 온 내 여자 친구이다. 그렇다면 아마 단순히 가볍게 만난 사이는 아닐 것이다. 가볍게 만나는 여자에게 내 모든 걸 주저리 떠들진 않았을 테니까.
둘째, 그녀는 놀랍도록 집요하고 무서운 스토커이다. 이 경우라면 정말 인생에서 가장 소름 돋는 순간을 겪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현재로선 그녀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터무니없지도 않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은 항상 하며 살아왔으니까. 단지 현실로 일어나지 않았을 뿐.
내게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생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극히 소수인 누군가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심장이 마구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닌 이 여자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덟.
그러나 아직 완전히 의문점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녀가 증명이랍시고 꺼낸 것은 얘기일 뿐. 물질적인 증거가 없다. 이를 테면 미래의 년도 수가 찍힌 동전이라도 가져왔다면 완벽하게 그녀를 믿을 수 있을 텐데.
그녀가 나의 과거를 조사했고, 몇 가지는 우연히 찍어서 맞췄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미래에서 온 여자 친구를 만날 확률보다는 그런 스토커를 만날 확률이 산술적으로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왜 물질적인 증거는 없는 거죠? 미래에서 애초에 저를 만나로 오실 거였다면, 그렇게 절 잘 알고 계신다면 제가 의심이 많은 것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간단하게 미래의 화폐 중 년도가 잘 보이는 것 중 아무거나 가져오기만 했어도 쉽게 믿었을 텐데요.
쉽사리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홉.
사실 그러니까 저는... 뭐 쉽게 믿어 줄 거라고는 생각안하지만요. 사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미래에서 온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미래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죠. 음...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 아니에요.
네, 전 회귀한 사람이에요. 살아왔던 인생을 거슬러서요.
열.
살짝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녀가 설령 정말 스토커에 미친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내 구미를 당길 수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사실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사실! 물론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거짓일 지라도 이렇게 아귀가 딱딱 맞게, 내 흥미를 끌 수 있게 준비성을 갖춘 여자라면 싫지 않다.
이미 마음속에선 갈팡질팡했던 무게 추가 완전히 한 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회귀를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 것인가. 회귀를 해서 알고 있던 사람,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다시 재회하는 느낌은 어떨 것인가. 묻고 싶고, 알고 싶다.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쨌든 나를 다시 만나러 왔다는 것은 나와 다시 잘해볼 생각이 있다는 거겠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된 거. 우리 다시 한 번 잘 사랑해봅시다.
(제로는 읽으셔도 되고 안 읽으셔도 됩니다. 결말의 상상이 나눠지겠네요.)
제로.
어쨌든 다시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게 되니 좋네요. 원래 내 세계의 그와 이 세계의 그가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일지 라도요. 이렇게 제게 웃어주는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염원해왔거든요.
이 세계의 그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저와는 많이 달라서 걱정이지만 괜찮겠죠. 어쨌든 그는 그이니까.
네. 저는 사실 거짓말쟁이에요. 회귀 따위는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어쨌든 지금 그가 웃어주고 있잖아요.
다만 좀 미안하네요. 그에게 미안하냐고요? 아니요.
이 세계의 나에게. 그녀에게 미안하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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