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가 일하고 있는 곳과 제가 지금 사는 곳은 딱 버스 노선이 끊기는 경계면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는 집 앞에서 서는 대부분의 버스가, 하필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을 코 앞에 두고 전부 좌로 우로 흩어지거나 유턴을 해서, 집 앞에 서는 버스가 10대가 넘고, 그 버스들 대부분이 제 일터의 전전 정류장까지는 대부분 갑니다만, 실제로 그 보더라인을 넘어 일터까지 가는 것은 딱 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사생활도 없는 버린 몸이니 번호까지 공개하자면 6623번 버스와 642번 버스인데요. 이 두 버스가 없었다면 저의 사회생활 지각 0회의 신화는 지금 일터에서 아마 깨졌을거라고 생각하기에 이 두 버스, 특히 나름 최근 노선 변경이 된 642번 버스에는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0. 저는 서울 촌놈이라 지방의 경우는 잘 모릅니다만, 서울 버스의 환승 시스템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것 중 하나가 바로 하차 태그 시스템인데요. 사실 환승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교통카드를 하차할때 태그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차할때 태그하지 않으면 2배의 요금을 내게 되는것은 어디까지나 환승을 했을 경우일뿐이고, 환승을 하지 않는 다면 하차할때 태그를 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혼잡한 버스를 타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승차 단말기에도 하차 태그가 가능합니다. 둘은 기능 차이가 조금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단 승하차 처리는 동일하게 처리합니다.
0. 저는 점심시간에 따로 약속이 잡혀 있지 않은 경우 밥을 먹기 보다는 혼자서 딴 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특히 바빠서 잘 할 시간이 안나는 일을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처리하는것에 굉장한 쾌감과 보람을 느끼는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머리를 손질하러 집 근처 미용실에 간다든가, 사무실에 남아 애매한 잔업을 마무리 한다든가 (고용인분들의 많은 쪽지 바랍니다.) 대체로 이런 습관이 든 이유를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너무나도 맛 없는 급식 때문에 3년을 점심 시간에 밥을 안 먹고 헛짓거리를 하며 보낸것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0. 저는 눈치가 빠르다거나 센스가 좋다는 이야기를 생각보다 많이 듣는편인데, 정확히 말하면 센스는 전혀 없는것에 가깝고, 눈치가 빠르기보다는 평소에 주변을 쓰잘데기 없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공부에 도움이 되는 기억력은 별로 안 좋지만 이상하게 감각적인 기억을 잘해서 위화감을 굉장히 잘 느낍니다. 예를 들어 맨날 복도에서 지나가다 보는 그림에 한 부분만 이상하게 바뀌어 있으면 저는 스쳐 지나가면서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받습니다.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면 주변을 관찰해서 평소와 달라진게 뭔가 주변을 관찰해서 찾아내고는 합니다.
본론을 얘기해보면, 지금으로 부터 약 3주정도 지난 얘기인데요. 저는 어느때처럼 아침 일과인 운동을 마치고, 8시 20분쯤에 집 앞정류장 겸 짐 앞 정류장 겸 미용실 앞 정류장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도착한 642번 버스를 타고 일 하는 곳에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해서 오디너리한 얼마 안되는 오전 일과를 마치고, 바쁘게 일하는 현대인들 사이에서 묘한 죄책감... 과 동시에 그 죄책감이 주는 길티 플레저를 만끽하며 탱자탱자 놀며 잉여인간짓을 하다가, 점심시간을 10분 앞두고 아 오늘 머리하러 가기로 했지 하며 집 앞 미용실에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합니다.
초봄이라 날씨도 좋고 이번에도 역시 좋은 타이밍에 도착 해 준 642번 버스를 타서 교통카드를 승차 단말기에 댔는데, 그 순간 뭔가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근데 버스에 타고 미용실로 향하는 내내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그 위화감의 출처를 알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교통카드도 평소 그대로의 교통카드였고, 버스도 평소 그대로의 버스였거든요. 카드가 제대로 안 찍혔나? 하면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통카드만 따로 가지고 다니는 지갑이 있고, 무엇보다 삑사리 난 소리 때문이었으면 그걸 제가 몰랐을리는 없거든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내릴 정류장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이따가는 어쩌면 642가 아닌 6623번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미용실에서 실장님이 귀신같이 30분안에 손질과 샴푸를 마치실수도 있으니 어쩌면 환승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어 하차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까의 위화감이 뭐였는지 알 수 있었는데, 왜냐면 제가 하차 단말기에 카드를 댔을때 '삐빅-'하는 보통의 하차 단말기 태그시의 소리가 아닌,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뭐가 이미 처리되었다는걸까 하고 미용실로 걸으면서 생각해봤습니다. 내가 하차 단말기에 미리 태그를 했었는데 까먹었나?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무심한 인간이 아닙니다. 내 행동 하나 하나를 조금하고 생각하며 신중하게 하며 주변에도 관심을 많이 갖는 그런 사람입니다. (고용인분들의 많은 쪽지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찾아낸 그 날 있었던 일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 그날 아침에 저는 '642번 버스 A'에 타서 승차 단말기에 교통 카드를 찍고 일터까지 가서 하차 단말기에 태그를 하지 않고 내렸습니다.
- '642번 버스 A'는 저를 내려준 후에도 오전 내내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기분 좋은 여행을 계속하며 본인의 노선을 돌았고, 저는 사무실에서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자연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 그렇게 자기 할것을 하던 '642번 버스 A'를 저는 미용실에 가는 길에 기적적으로 다시 버스정류장에서 재회하고, 저는 승차 단말기에 아까 찍은 교통카드를 찍습니다.
- 승차 단말기는 안타깝게도 눈과 귀가 멀어서 제가 '642번 버스 A' 에서 내리는것을 알 수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제가 '642번 버스 A'에 타서 할일 없이 4시간 동안 버스와 함께 서울 구경을 했을거라고 생각하고, '하차 태그' 처리를 합니다. 즉 저는 실제로 아까 내려서 일하다가 지금 다시 탄거지만, 승차 단말기는 계속 타고 있다가 이제 내릴라고 찍은것으로 인식한거죠.
- 하차 단말기에 하차 태그를 시도했을때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소리가 난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미 하차 태그를 찍어놓고 왜 또 하차 태그를 찍냐고 하차 단말기가 저한테 말해준거죠.
사실 정리해도 복잡한데, 조금 더 쉽게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출근할때와 우연히 '정확히 같은 버스'를 타고 점심시간에 집에 가게 되었는데, 출근할때 하차 태그를 찍지 않았기에 2번째 탑승시의 요금 계산이 '환승 태그' 로 적용되어 1050원의 요금으로 버스를 2회 이용했습니다. 즉 두번째 저의 버스 탑승은 무임승차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피지알에 왜 썼냐면, 저는 이 일화를 주위 사람과의 이야기 소재로 굉장히 많이 사용했는데, 하도 많이 사용하다가 문득 한가지 드는 의문이 '꼭 아예 같은 버스를 타지 않아도, 642번 버스를 타고 내릴때 하차 태그를 하지 않은뒤 다시 642번 버스를 타도 본문과 같은 상황이 적용되는가?' 가 궁금해지더라구요. 만약 후자가 가능하다면, 저는 기적의 무임승차를 겪은게 아니라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노양심짓을 단지 모른채로 했을뿐이니까요.
저는 정말로 같은 버스를 우연히 2번 타서 백번, 천번에 한번 일어날 기적의 무임승차를 했던걸까요? 아니면 그냥 원래 같은 노선의 버스를 여러번 타면 일어날만한 별거 아닌 일이었을까요?
만약 후자라면 저는 다음 642번 버스를 탑승할때 2100원을 내며 '아 저번에 안 낸 거 이번에 냄' 이라고 말하며 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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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최근에 그런 경험이 있는데... 집근처 식당에 밥먹으러 220번 버스를 타고가서 밥먹고 오는길에 다시 220번 버스를 타고 카드 태그를 하니 이미 처리되었다는 말만 나오더군요.. 전 경기도에 살아서 하차시에도 버스카드를 태그해야하거든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밥먹으러 갈때 탔던 버스가 그대로 돌아온걸 탔나보구나 싶더라구요. 버스가 보기엔 아까 내리겠다고 하차 태그를 했으면서 또 카드 태그를 하니 '너 아까 내린다고 태그했잖아'라는 메시지가 나왔던거 같더라구요 흐흐.
그래서 하차시에 태그하고 내리면 다시 동일한 차를 탈 때 이미 처리되었습니다가 뜨고, 그러면 기사님이 조작해서 요금을 내도록 하지요. 하차태그를 안 하고 내려서 한 번 요금에 두 번 타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죠. 비양심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겠죠. 물론 알아차렸다면 기사님께 얘기해서 탄 것 만큼 요금을 내도 좋을 것이고요.
00번 A버스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뒷차 00번 B버스로 승객 전부 옮겨탄적이 있었는데요
이때 승차할때 카드 찍지 말라고 해서 안찍고 탔다가 내릴때 습관적으로 00번 B버스에 대니까 카드상으로 A버스 승차 - B버스 승차 로 기록되서 돈을 2번낸적이 있습니다.
완전 동일 버스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정말 드믄 확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