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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18 22:44:35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14


남자는 멈칫했으나 이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가요. 날 이 방에서 내보내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모두 최면에 빠뜨리게 하고, 이제는 날 죽이려고 사용한 비약이?”



보랏빛의 작은 물병에 든 그것은 고요한 환상의 꿈이라는 고상한 이름을 가진 비약이었다. 무색, 무취, 무미였기에 당하는 사람조차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최면에 빠진다고 했다. 약효가 즉각 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나 대기 중에 비약의 성분이 일정 이상 퍼트려졌을 때 비로소 효과가 나기 때문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작업하고 자리를 비우기에 안성맞춤인 비약이었다. 게다가 최면에 빠진 자는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뭐 때문에 최면에 빠졌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역시 아무런 향이 나지는 않는군요.”



고사리 같은 손을 부채처럼 흔들며 냄새를 맡아 보려는 칼리스토의 모습에 남자는 모골이 송연해 짐을 느꼈다. 고요한 환상의 꿈은 그 효과가 매우 강력했다. 오래 노출이 될 경우, 상대는 최면을 뛰어넘어 깊은 잠에 빠지게 되고, 그 잠의 깊이는 이승을 뚫고 지하 세계로 내려갈 정도라서 아예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런데 칼리스토는 물병에 코를 들이밀고 그것을 맡아대고 있었다. 게다가 물병의 입구에 있어야 하는 마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말은, 지금 즉시 이 방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설마 날 놔두고 그냥 가지는 않겠지? 이사키엘 대주교가 그냥 놔두지는 않을텐데?”



저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서려는 남자를 향해 칼리스토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동공이 확대되고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이내 그의 입에서 주문과도 같은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연달아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불러대던 그는 한참 뒤에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신앙의 힘으로 공포를 간신히 누른 정도에 불과했지만.



“저,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남자는 이렇게 단번에 걸릴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걸려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튕겨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칼리스토의 눈은 더욱 붉게 타올랐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품에 숨겨 놓았던 단도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이사키엘 대주교가 건네준 건가요?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면서?”



신앙은 사라지고 공포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이까지 딱딱 거릴 정도로 남자는 부들부들 떨었으나 신의 축복을 받은 단도를 부적처럼 여기면서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다가오지도 않은 채 그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칼리스토를 노려보았다.



“참으로 딱하군요. 그나마 신심이 깊은 사람을 보냈을 텐데, 너의 행동을 보니 거사를 치를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

“하지만 좋든 싫든, 너는 날 죽여야 할 거야.”



순간, 붉은 막이 확 펼쳐지며 남자와 칼리스토 사이를 가로막았다. 남자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막을 통해 펼쳐지는 움직이는 그림들을 보았다.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몽롱한 느낌이라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아니, 그림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성벽이 무너지며 박살이 난 병사들의 시체조각이 여기저기로 날아갔고, 깔린 사람들을 짓밟으며 성난 군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비명과 함께 목이 날아가고 팔이 잘렸다. 왕의 머리에 놓인 왕관마저 날아가 데구르르 굴러갔고, 처참하게 처형당한 왕의 시체가 불태워지며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러댔다.

동시에 그는 또 다른 현실을 보았다. 쏘아지는 불덩어리를 헤치며 왕이 성벽에 우뚝 섰다. 그의 주변은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뭔가가 폭발하는 듯하더니 이내 수백 갈래의 붉은 물줄기가 뿜어지며 성 주변을 초토화했다. 성벽은 건재했고, 더는 성을 공격할 병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검이 날아들어 자신의 목을 후려쳤다.



“으아아악!”



그제야 참고 있던 비명을 내지르며 최후의 방어를 하기 위해 몸을 뒤틀던 남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죽은 것 같다는 생생한 느낌이 들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핏빛 막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칼리스토만이 침대에 앉아 자신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는 잘 봤나요?”

“뭐, 뭐였지 이건?”

“방금 말했잖아. 미래라고.”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놀라고 당황해서인지 남자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칼리스토 역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똑같이 답해주었다.



“미래.”

“무슨 미래!”

“너가 하려고 했던 것을 하지 않으면 볼 미래일걸요.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칼리스토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말하는 것이 묘하게 짜증스러웠던 남자는 꼬맹이 앞에서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것을 잊기 위해서 단도를 내밀며 성큼성큼 칼리스토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의 크기였으나, 이상하게도 남자의 눈에 칼리스토는 작아 보였다.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작은…… 저 작은 목을 움켜쥐기만 하면 그대로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작은 생명체.

그러나 간신히 억지로 끌어 올린 용기는 칼리스토의 웃음 한방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저렇게 웃고 있다니. 네놈은 정녕 악마의 자식이로구나! 단도를 든 남자의 손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이제야 할 마음이 들었나요?”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에도 칼리스토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 반응이었기에 남자는 다시 머뭇거렸다. 어린아이라는 점. 그러나 악마의 자식이라는 점. 상상하지 못했던 예상외의 반응 들이 하나로 모여 남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칼리스토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이 소리 들려요?”



점차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 뭔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바로 옆에서 들려올 정도로 소리가 커지자 남자는 들어 올렸던 단도를 떨어뜨리며 귀를 막았다. 그러자 동시에 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전쟁이 시작됐어요. 아마 당신이 이렇게 시간 끌고 있는 사이 바깥의 시간은 상당히 흘러갔을걸. 하지만 괜찮아. 덕분에 난 아버지께서 필요하실 때 힘을 드릴 수 있게 됐으니까.”



다시 한 번 칼리스토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네가 날 죽이기만 한다면.”

“으…… 으아아아아악!!!”



저건 악마의 자식이 아니야. 악마 그 자체야! 신에게 버림받은 사악하고 더럽고 추잡한 악마! 혼란스러움의 극치에 달한 남자는 마침내 영혼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내지르며 떨어뜨렸던 단도를 집어든 채 칼리스토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작은 가슴을 향해 단도를 밀어 넣었다.

마치 인형 같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단도는 그의 가슴을 후벼 팠고, 한 줌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아 보였던 칼리스토는 그대로 뒤로 뻗어 버렸다. 그러더니 전혀 떨림 없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또 다른 아버지…… 이제 된 거지? 내 역할은 여기까지…… 하지만 날 죽게 했으니 대가는 작지 않을 거야…….”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단도를 뽑으며 다시 그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그의 옷이 너덜너덜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사방으로 뿜어져 내린 피가 찐득찐득해졌음에도 남자는 끝없이 칼을 휘둘렀다. 이미 사람의 형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자당하고 바스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악마를 죽여야 한다는 광기에 휩싸인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로, 칼리스토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처럼 흘러가더니 이내 작은 웅덩이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거대한 별의 장식을 부수며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짙푸르러야 했던 하늘이었지만, 사방에 충천한 화광에 휩싸여 빛나고 있었다.

핏빛보다 더한 핏빛 색깔에 물든 채.




--------------------




세상만사다반사 님, 댓글 감사합니다. ^^
읽으시는 분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어차피 비축분도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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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다반사
14/11/18 23:29
수정 아이콘
뭔가 이야기가 미궁으로 빠지는군요! 또 다른 아버지라 함은.. 동명이인의 삼촌일까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19 00:31
수정 아이콘
칼레인과 칼리스토는 일란성 쌍둥이라 DNA가 똑같으므로 사실상 칼레인의 아들은 칼리스토의 아들이 될 수도.... (응?)
댓글 감사합니당. ^^
14/11/19 00:02
수정 아이콘
몇 회분 몰아서 읽느라 한참 걸렸네요.
계속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19 00:32
수정 아이콘
그러셨군요! 그러나 이제 보실 편수가 얼마 남지 않았답니당.... 완결이 아니라, 비축분이 다 떨어져가므로.... ㅠㅠ
그래도,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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