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sh. 한국말로 하면 짝사랑.
내 머릿속과 목구멍에는 일주일동안 '짝사랑'이 아니라 'Crush'가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내 Crush는 그렇게 혼자 바스라져 버렸다.
이 글은 갓 스무살을 넘긴 조무래기의 이야기다.
그 조무래기는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한 달정도 홍대 근처 고시텔에 머물렀다.
그 고시텔은 외국인 숙박객을 주로 받고 있어서 게스트하우스에 좀 더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을 종종 마주치곤 했다. 물론 나는 영어를 아주 잘하는게 아니라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그저 마주치는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들은 금방 돌아가니까 딱히 친해질 필요도 없었다.
두 명 빼고. 로벤 닮은 프랑스형이 그 한 명이었다. 그 형은 23살이었는데 로벤이었다. 생각해보니 로벤도 23살때 로벤이었겠지만. 우리는 가끔 5층에 중국풍 공용식당에서 영어로 대화했다. 사실 의도적으로 중국풍은 아니었는데 인테리어하고 위생이 묘하게 중국느낌이 났다. 특히 그 묘하게 빨강과 주황사이에 걸쳐져 있는것 같은 빛깔의 전등.
중국관광객들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주구장창 5층에 몰려들었다.
5층, 5층. 그렇게 이 이야기의 엘레베이터는 10월의 마지막날, 5층에서 문이 열렸다.
로벤형과 나는 저녁 늦게 할로윈 얘기를 하고있었다. 로벤형이 할로윈이 미국에서 시작됐다고 했는데 나는 스코틀랜드라고 반박했다. 고등학교 원어민 수업시간때 나눠준 프린트물에 분명 그 얘기가 있었어! 하니까 유래는 아마 유럽인데 흥한건 미국이라고 했다. 그런것 같다. 미국애들은 할로윈 꿀잼이라고 좋아하던데 유럽에는 뭐 잘 없는것 같으니까. 로벤형은 프랑스친구들하고 놀러간대서 나도 3층에 사는 한국형이랑 가려고 했는데, 3층을 아무리 뒤져도 그 형이 안보였다. 해서 야식을 사서 5층에 올라갔더니 그새 3층형하고 웬 여자가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꽤 예쁘다 였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형은 안되는 영어로 열심히 작업을 걸다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자 이내 돌아가버렸다. 잠깐만? 영어? 한국인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라면먹으면서 어디서 왔냐고 하니 중국이라고 했다.
절대 중국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중국인에게서 보이는 미묘한 촌티가 없어서 홍콩이나 대만인 같다고 생각했다. 내 오만한 편견에 부끄러움이 생겼다. 나이를 묻자, 26살이라고 했다.
절대 그렇게 안보였는데. 23살, 22살로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알고 봐야하는구나.
관광이에요? 네. 2주정도. 1주일전에 왔어요. 아 1주일 남으셨네. 그럼 여행 재밌게 하세요. 나는 식기를 대충 정리해서 돌아가려는데 중국여자하고 다시 엘레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할로윈 파티가세요? 할로윈이 뭔데요? 할로윈 모르세요? 그게 뭔데요? 아. 중국에서는 할로윈이 없을수도 있단걸 몰랐다. 호박하고 김정은하고 돌아다니는 그런거 있어요, 그럼 어디 가세요? 담배피러요. 그쪽은 담배 피세요?
손을 보니 담배와 라이터. 그녀가 담배 피세요? 하고 물어봤을때 이성을 담당하는 내 대뇌피질에서는 하하, 전 담배 안피워요. 예전에 한번 피워보고 그 다음부터 안피웠어요. 백해무익한걸 뭐하러 핍니까. 라고 대답하라고 분명 지시를 내렸는데, 대뇌피질을 제외한 내 모든 신체기관에서 네, 피워요. 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렴. 다수결이 옳지.
확실히 나는 담배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친구들과 같이 있다 어쩌다 피게되어도 속담배대신 겉담배로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거의 일년에 한두개피 피웠다.
1년에 한두개피 피던 내가, 그녀와 보냈던 일주일동안 하루에 한 갑씩 피게될 걸, 내가 그 일주일동안 앞으로의 인생 모두에서 필 담배를 그때 다 피우게 될 걸 나는 알았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어렴풋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둘 다 영화를 좋아하는걸 알았다. 그녀가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는 내가 알 턱이 없지만, 적어도 영화에 관심이 있는건 알았으니까 나는 겨우 용기를 냈다. 같이 영화보러 갈수있냐고 물었다.
그녀가 sure, why not? 이라고 했을까? 여기는 안타깝게도 현실이었다. 영화속이 아니라. 그래서 그녀는 sure, why not?이라고 했고, 나는 여기가 현실임을 되새기고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잠깐, 뭐라고? 나는 진짜 말그대로 귀를 의심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풀리나? 그러하다. 여기는 현실이었고, 때로는 영화보다 더 간단하고 더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어쨌든, 나는 그녀가 계속 '무비'를 '무이'라고 발음하는게 조금 신경쓰였지만 더 이상 상관않기로 했다.
귀여웠으니까. 그걸로 된거다.
우리는 각자 옷을 갈아입고 다시 만나서 신촌역 cgv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바로 앞의 홍대앞 cgv를 놔두고 거기까지 갔던 이유는, 그냥 걷고 싶었으니까. 그 뿐이었다.
<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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