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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04 20:33:52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1, 2
오매불망 기다리던 등급업이 드디어 이루어져서 이제야 글을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원래는 눈팅만 몇 달 하다가 연재게시판에 글을 연재하고 싶어서 가입을 했었는데
아쉽게도 연재게시판이 사라져서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혹시 게임 게시판에서 도로시-Mk2 님의 크루세이더 킹즈2 연재물을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 글은 크루세이더 킹즈2를 하다가 영감을 얻어서 쓰게 된 글입니다. 양산형 판타지 말고 좀 더 (아아주 조금 더)
현실적인 중세물(+마법이 좀 가미된)을 써 보고 싶은 마음에 크루세이더 킹즈2에서 많은 부분을 따왔습니다. (음모와 막장은 덤)
그러나 필력과 지력의 부재로 전개를 하다 보니 긴장감 넘치는 음모 같은 건 전혀 없는 평범한유치한 글이 되어 버렸네요...
또 크킹에서 잘 구현되는 정쟁과 암투, 고증도 사라져 버렸고....;;;

그래도 처음 보기 시작한 분들께서 끝까지 함께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을 해 보며
일단 연재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p.s. 올렸는데 오류가 나서 지우고 다시 올립니당.




Lost People
빼앗긴 자들



*          *          *


살아있는 모든 자의 왕이자 신앙의 수호자로서
천 년 넘게 대륙을 호령하던 라티움 제국의 콤네노스 가문이 무너져 갈 때
작은 나라 아키엔의 나이시아 가문과 제국의 방계인 앙겔로스 가문이 일어섰다.

꺼져 가는 촛불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콤네노스 가문과
잃어버린 이름의 신을 받아들인 나이시아 가문과
미쳐버린 왕을 폐하고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앙겔로스 가문의

장구한 천 년 역사의 수도이자 신이 내린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노플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결전이 시작되리니...


*          *          *



# 1

1. 아키엔




왕은 말이 없었다.

돌처럼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무심한 듯, 혼이 빼앗긴 듯한 멍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열화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뿜어져 모조리 태워버릴 정도로 뜨거운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왕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렸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기를. 자신을 적극 변호하기를. 아니, 차라리 모함이었다고, 누군가가 선량한 자신을 부추긴 거라고 말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 대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듯한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정녕…… 네가 스스로 한 짓이더냐.”



입술이 열리며 숨결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천천히 끌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변에 기립한 채 말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왕과 무릎 꿇고 앉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는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비굴한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모습이었다.



“네, 아버지. 제가 한 짓입니다.”



남자는 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레인 폰 나이시아. 아키엔 왕국의 국왕 나이시아 12세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자 왕국의 후계자였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이시아 12세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사교적이고 모든 일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나이시아 12세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라온 왕자였다. 그랬기에 그가 성인이 되어 결혼식을 올렸을 때, 선물로 왕국의 서쪽 지역에 있는 세 개의 백작령으로 이뤄진 아르켄 공작 위를 물려받았다. 백작령 일곱 개로 이뤄진 소왕국 아키엔의 절반에 해당하는 영토였다.

아직 나이 어린 왕자에게 너무 강한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어차피 새로 아들을 낳아 줄 왕비는 없었고, 늙고 지친 왕 역시 새로 장가를 들 생각도 없었다. 그저 시간의 문제였을 뿐, 아키엔 소왕국을 이루는 일곱 개의 백작령과 두 개의 공작령은 언젠가는 칼레인 왕자에게 물려 질 것이었기에 그런 우려는 기우로 취급되어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야심적이고 호전적인 칼레인는 언제까지나 이런 소왕국의 왕족으로 살 수는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나이시아 12세는 그것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제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소왕국의 왕으로서,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와도 같았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왕좌에 있었지만, 제국의 눈치를 보며 늘 절절매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칼레인 왕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어쩌면 이 아이라면, 소국의 왕자로 태어나 대국의 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왕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칼레인 왕자가 첫 번째로 칼날을 들이민 상대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것이더냐. 나는 이미 늙고 지쳤다. 조금만 기다리면 모든 것이 곧 네 것이 될 텐데…… 어찌하여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느냔 말이다……!”



참으려 했으나 기어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꾹 참았기에 벼락같은 함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칼레인 왕자는 말없이 왕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모두를 감싸고, 왕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만 있자 그제야 왕자는 입을 열었다.



“시기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라티움 제국의 황제가 죽어 전국적으로 내란이 일어난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내게 반역을 일으킬 필요는 뭐가 있었느냐!”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라를 잘 다스리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왕이셨습니다.”



왕자의 느닷없는 말에 왕은 물론이고 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왕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치세 동안 큰 전쟁 없이 우리 아키엔 왕국은 평화를 유지해왔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것에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전쟁 없이 이런 작은 왕국이 이토록 오래 버티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러나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싸우는 법을 잊었습니다. 정복은커녕, 평화 협정을 맺기에 바빴기에 나라에서 생산되는 많은 것들과 지역의 특산물들이 제국에 공물로 바쳐졌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옆에 있는 백국과 후국들에게 바쳐진 거지요. 재밌지 않습니까? 왕국의 군주가 백작과 후작들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말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묻지 않느냐!”



나이시아 12세의 목소리가 터져 올랐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왕자님이 머리를 조아리고 잘못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를 바랐으나, 야심 찬 왕자의 머릿속에 그런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입니다.”

“…….”

“아버지 덕분에 평화가 유지됐으나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속국으로 지내 왔습니다. 아버지처럼 유약하고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는 태평성대에는 좋은 왕이 될 수 있으나, 지금처럼 전란의 시대에는 아닙니다. 지금은 힘이 있는 군주를 모두가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를 상대로 한번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붙잡혔기 때문에 체념을 한 것인지 왕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 말 자체로써 이미 대역죄였고 자신이 진정한 반역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국왕 모독죄와 능멸 죄 같은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나를 죽이려 했느냐?”

“죽이다니요. 아버지이자 저의 주군을 살해할 의도 따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저 왕위를 조금 더 일찍 물려받고자 했을 뿐.”



모두가 숨을 죽이면서 웅성거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이미 왕자는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찬탈을 시도했음을 증명했고 왕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모든 자가 똑똑히 그것을 들었다. 남은 것은 왕의 처결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처결에 그렇게 힘이 실리지는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칼레인 왕자는 왕이 나이가 쉰이 넘어서 간신히 얻은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기껏 해 봐야 감옥에 갇히는 정도일 것이다. 후계자를 대신할 다른 아들이 없는 이 마당에 후계자의 목을 친다든가 하는 것은 나이시아 왕조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나이시아 12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것도, 또한 지금도 저렇게 뻔뻔할 정도로 오만방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명의 후계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폐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왕은 슬며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로브를 입은 채 후드 속에 머리를 파묻은 남자가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가 아니라면, 자신이 이런 처결을 내리지는 못했으리라.

왕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가 숨결을 토해냈다.



“칼레인 폰 나이시아. 나의 아들이며, 아키엔 왕국의 정통성 있는 후계자여. 너에 대한 처결을 내리겠다.”



왕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너에게 수여한 공작 위를 회수하고, 백작령과 너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 또한, 너는 상로렌 탑 최상단에 유폐될 것이며 짐이 살아있는 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는 이미 예견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이상 뭘 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처결이 끝날 것이라 예상을 했는지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한 모습도 보여왔다. 하지만 그다음에 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전에…… 너의 후손이 다시는 이 땅을 거닐지 못하게 하리라.”

“……폐하?”

“아버지……?”



의아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미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숨을 참았다. 왕자 역시 이게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칼레인의 눈이 크게 떠졌고, 너무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아, 아버지…… 그, 그게 무슨…….”

“형을 집행하라. 거세형에 처한다.”

“아버지!”

“폐하!”



홀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왕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아니나 그럼 후사는 어쩌시려고? 하는 사람들과 이 말도 안 되는 처결을 집어치우라며 난리를 치는 왕자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왕자를 끌고 가려는 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왕자는 포박된 상태였고, 그가 아무리 건장한 청년이라고 한들, 왕명을 받고 우르르 달려든 형 집행인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끌려가는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앞에서 봉신들이 뭐라고 항변을 하기도 하고 자비를 요청하기도 하고 다른 형벌이 낫지 않느냐고 외치기도 하고 소란을 피웠으나 왕은 말이 없었다.



“반역자입니다. 그를 옹호하는 자는 모두 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때, 왕의 옆에 있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고, 홀은 유령이라도 지나간 듯이 침묵에 휩싸였다. 저자는 누구기에? 라는 표정들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묻지 못했다. 왕의 옆에 있으면서 후드를 걷지 않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 무례함은 둘째치고라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차갑고도 섬뜩했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 느낌. 그랬기에, 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자 저도 모르게 사람들은 뒤로 움찔하며 물러났다.



“가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검은 로브의 남자와 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며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침묵을 깨트리며 왕이 말했다. 수호기사들이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했고 왕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형이 집행되는 곳으로 향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더니 잠시 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홀에 남은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뿐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도 없는 홀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천장에 높이 난 유리창 너머의 달을 응시했다. 시리고도 푸른 빛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의 그 시절 그 모습이었다. 그때도, 누군가는 달빛을 바라보며 처연함을 느꼈을까. 달도 신도 푸른 빛 감도는 시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도했을까.

잠시 감상에 잠겼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듯 심호흡을 한 뒤, 빠른 걸음으로 형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2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왕자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제 발로 형장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보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형장 저 안쪽에 방치된 거대한 기둥과 형틀을 향했다. 눈동자에 공포감이 피어올랐다.

예전에 한번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어렸기에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제국의 변경백을 끌어들여 왕좌를 차지하려고 했던 자가 있었다.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지나 간신히 역모와 반란이 진압된 뒤, 이미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은 그는 눈에서 핏물을 줄줄 흘리며 저곳에 고정됐었다. 그 뒤 떨어져 내리던 거대한 추와 귓가를 찢어발길 듯 울려 퍼지던 비명…….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칼레인은 마지막으로 힘을 써 보았으나 형 집행인들은 망설임 없이 그를 형틀에 묶었다. 몸통이 묶이고 허리가 묶이고 팔이 잠시 풀리는 듯하다가 다시 뒤로 돌려 묶였다. 작은 칼이 휘둘러지자 입고 있는 바지가 찢어져 나갔다. 형 집행인이 손을 뻗어 그의 음낭을 움켜잡자 왕자의 입에서 저주와도 같은 폭언이 쏟아졌다. 그 기세가 하도 흉흉하여 집행인들도 잠시 머뭇거렸으나 왕과 봉신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체했다가 괜히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크윽!”



순간적으로 몸통을 관통하는 듯한 찌릿한 고통에 왕자의 반항이 잠깐 멈춘 사이, 그의 음낭은 형틀 위의 고정대에 순식간에 채워져 버렸다. 형 집행인들이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왕이 수호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조금 전에 보았건만,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듯한 초췌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왕자에 대한 분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아, 아버지!”



왕자는 정말로 형이 집행될 것 같자 왕을 소리쳐 불렀다. 이미 자신은 형틀에 묶였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움직일수록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왕이 손짓하면 저쪽에 있는 집행인이 추를 매달아 고정해 놓은 걸쇠를 풀 것이고 추는 자유 낙하하여 자신에게 떨어져 내릴 것이다.

본래 이와 같은 거세형은 눈을 파 버리는 형벌과 함께 황가에 대한 반역을 저지른 자들에게 흔히 행해지는 라티움 제국의 유서 깊은 형벌로써 ‘거룩한 황제의 자비’나 ‘품위 있는 죽음’ 등으로 불렸다. 눈을 뽑아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생의 몰락을 경험케 할뿐더러 군주에게 가해질 수 있는 위협을 제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에, 지금은 제국 근처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바로 거세형이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영지를 세습할 수도 없고, 환관을 만들 때처럼 세심하게 거세를 하는 것이 아닌, 추를 떨어뜨려 무자비하게 터트려 버리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상당수는 극심한 고통에 떨다가 죽어 버리곤 했다. 말이 거세형이었지 실질적으로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왕은 만발의 준비가 끝나고 모두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쏠린 지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멍하니 왕자를 응시했다. 왕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왕은 신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다오.”



형을 집행할 때는 이렇게 봉신들과 관료들이 지켜보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왕은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고 그들은 안 그래도 후계자의 거세형인지라 보기가 참으로 민망했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형장에서 빠져나갔다.

불규칙한 발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이제는 형 집행인과 왕자 그리고 왕과 그의 옆에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만이 남은 상태였다. 왕은 잠시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 쪽을 바라보다가 칼레인 왕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회하느냐.”

“후, 후회합니다! 아버지!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조금 전과는 달리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왕자였다. 그저 영지와 작위를 몰수당하고 심하면 감옥에나 갇힐 것으로 생각했었지 거세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왕이 명령을 내렸을 때는 그래도 진행하다가 중간에 멈추겠지, 싶었으나 지금은 저 위에 있는 추가 떨어지기만 하면 자신은 영원히 남성성을 잃어버릴 상황이었다.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허탈한 표정을 짓던 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리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 후회한단 말이지? 네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왕자는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망설임을 읽어내렸다. 그랬기에 더욱 열심히 용서를 구했고 왕은 말없이 있었지만, 그것을 들으면서 점점 그를 용서해 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형 집행인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왕자를 형틀에서 풀어줘야 하나 고민할 무렵 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그때, 검은 로브의 사내가 국왕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고 동시에 국왕의 얼굴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망설이며 떨리던 눈동자가 점차 진정되기 시작하자 그 안에 깃든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바라봐주던 눈빛은 그대로 식어버렸다.

국왕은 힘없는 표정으로 바람 빠지듯이 말했다.



“너무 늦었다.”

“아, 아버지!”



형 집행인은 국왕이 돌아서서 형장을 나가기 전, 그가 눈짓으로 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걸쇠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왕자가 발악하며 고함을 쳤으나 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형 집행인이었다. 걸쇠는 그의 손짓에 따라 해방되어 버렸다.

쉬이이익-

추가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형틀 위에 세워진 기둥을 타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자의 눈이 공포로 물든 순간, 추는 빠르게 떨어졌고 이윽고, 쩡-! 하는 굉음과 함께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찬 단말마가 형장을 가득 메웠다.



“크그르르르…….”



뱃속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왕자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단단히 묶여 있었음에도 그의 몸이 미친 듯이 부르르 떨었다.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왕자는 평상시에 찾지도 않았던 아타나시우스 교의 신을 미친 듯이 찾았다. 헛소리가 튀어나오더니 이내 격한 기침과 함께 다시 핏물과 구토물이 쏟아져 나와 그의 몸을 더럽혔다. 이성이 마비되고 사고를 유지할 수 없었다. 끝없는 고통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풀어서…… 이동…… 내의를 부르…….”



점점 아득해지는 의식 저 너머로 집행인들이 뭐라고 떠드는 것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터져 나가버린 부분에 누군가의 손이 닿자 왕자는 기절할 것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뭔가가 쑥 빠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을 옥죄고 있던 느낌이 사라졌고 이내 붕 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때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더니 그것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허무한 생각을 끝으로, 왕자는 기어이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



썩씨딩 유 파더를 외치며 반역을 일으켰던 야심찬 왕자는 그렇게 붙잡혀 거세되어 버렸....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시라도 재미가 있으시다면 댓글도 좀 남겨주시길 ^^;;
늘 행복하시고 항상 기쁨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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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감는새
14/11/04 22:14
수정 아이콘
잘읽고갑니다..근데 모바일에선 읽기가 불편하네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05 00:06
수정 아이콘
저도 모바일에서 확인하니 끊어지게 나오더군요.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4/11/04 22:20
수정 아이콘
썩씨딩 유 파더 실패군요 크크
강제개행만 수정하시면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05 00:05
수정 아이콘
PC에 맞춰서 저렇게 배열했더니 모바일에선 끊어지더라고요 ^^; 모바일에서도 잘 나오도록 주욱 이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편도 수정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파랑파랑
14/11/05 04:15
수정 아이콘
내가 고자라니 이보시오 의사양반
그게 무슨 말이오.
가브리엘대천사
14/11/05 14:21
수정 아이콘
헤헤. 다들 심영에 빙의하신 듯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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