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탐독중인 오헝제국의 참모총장 콘라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z Conrad von Hotzendorf)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모총장으로 특유의 편협한 호전적인 정치사상과 (안좋은 의미로) 가공할만한 활력덕에 사라예보에서 프란츠-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하자 오헝제국이 세르비아 침공으로 대응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한명으로 꼽힙니다. 정치적으로 호전적이였던 콘라트는 당대 표준에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호전적이였습니다. 특유의 거창한 작전으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지형, 인적 한계등 작전의 성패를 가를 여러 중대한 요소들을 감안하지 않고 작전을 수립했기에 전초에 참패했습니다.
이런 무능한 듯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 어떻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었는지 의아하겠지만 콘라트는 위의 단점과 실패와 별개로 굉장히 다재다능한 인물이였습니다. 어렵기로 유명한 18일이나 걸리는 비엔나 육군학교 입시시험을 당당하게 통과한 뒤 비엔나 육군학교를 졸업하고1 죽었을 시점엔 독일어, 헝가리어, 러시아어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세르보-크로티아어, 체코어, 영어,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당대 수재였습니다.2 군사학에 통달해 비엔나 육군대학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학과로 주목받던 전술학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891년에 교수직을 떠나면서 유럽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전술연구론(Zum Studium der Taktik)을 출간했으며 이 책은 1918년까지 비엔나 육군학교의 교범으로 남았습니다.3
오스트리아(붉은색)-헝가리(하얀색) 제국과 보스니아(푸른색)
1876년에 오헝제국군이 베를린 조약에 따라 보스니아에 진주하면서 벌어진 지역주민의 거센 반대끝에 대규모 교전에 참전했을 정도로 책상물림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였습니다. 1878년에 본인의 요청에 따라서 교전병으로 분류된 제4여단에 배치되었는데 비록 직접 일선에서 군을 이끌진 않았지만 지휘, 통제, 정찰 활동을 도맡았습니다. 워낙 충출하게 임무를 성공해낸 덕에 훈장마저 얻었는데 1880년부터는 뛰어난 그림실력을 살려 풍경을 스케치해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4
1881년에는 더욱 위험한 중책을 맡았는데 콘라트는 세르비아에 침투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까지 정찰하면서 정보를 수집해야했습니다. 오헝제국 출신의 세르비아 화가로 위장했는데 콘라트가 훗날 회고하기를 본인이 워낙 세르비아어를잘한 탓에 남슬라브인으로 자주 착각당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베오그라드의 학생중 한명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오그라드에서는 성난 군중속에 "오스트리아 스파이(Austriski spiun)"라 불리며 들통날 뻔했는데 어찌어찌 추궁을 마무하고 세르비아의 풍경을 담은 스케치와 함께 복귀하는데 성공했습니다.5 콘라트의 회고록에 의존하다보니 여기저기 미화가 있을지 모르나 살아돌아왔음은 확실하고 스케치도 보존해서 임무를 성공했다는 점또한 분명합니다.
이 스파이활동은 바로 훗날 오헝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하는 콘라트와 범슬라브주의의 맹주 세르비아의 첫번째 대면이였습니다. 1914년에 오헝제국과 세르비아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음을 감안하면 무언가를 예견하는 듯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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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y Jan G. Beaver pg. 41
2. by. Prit Buttar pg.72
3. by. Jan G. Beaver pg. 49
4. by. Jan G. Beaver pg. 43-44
5. by. Jan G. Beaver pg. 44-45
p.s. PGR21에 처음 쓰는 글이라 실수와 애러가 많은 편이였는데 이제야 완성했네요. 1차대전에 대해 읽기 좋아하는 선비욜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