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한 사람이 프랑스에서 태어 났다 그는 어렸을 적 경제 대공황 때문에
어려운 가정사를 겪었으며 이 때문에 돈을 벌고 싶어 했다. 특히 22년 결혼나서 더욱 이건 절실했다.
동양어를 전공한 그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 온다. 당시 프랑스령 크메르(현재 캄보디아) 발굴단 참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923년 그는 인도차이나에 도착하여 라오스로 향하던 발굴단에서
떨어져 앙코르와트 근처를 배회한다.
그는 그곳에서 각종 불상, 조각품들을 무단으로 발굴하여 미술상에게 넘긴다.
그건 확실한 발굴이라기 보다는 도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원래 뜻대로 그는 어느 정도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다 그는 곧 크메르 경찰에게 체포된다. 특히 당시 너무 앙코르 와트의 도굴이 성행한지라
크메르 왕실과 국민들은 그가 시범 캐이스로 처벌 받길 원했고 몇개월 감옥에서 썩게 된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잘 두었다. 나름 부자 친구들과 당시 유명한 앙드레 지드 같은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엄청나게 유명한 연상 친구의 탄원은 큰 도움이 되었고, 그는 곧 풀려나게 된다.
그는 거기에서 한동안 놀다가 곧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그들의 혁명을 지원하게 된다.
알고보면 그는 좌파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 공산주의자와 친교를 맺고 1925년 프랑스로 귀국한다.
뭔가 이 알 수 없는 도굴꾼은 그 뒤, 나름 인도차이나에서 좌파활동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인도차이나 독립을 지지하는 단체를 만든다. 그리고 그 기관지 편집장을 시작한다.
1926년 그는 서간문 형식의 작품인
[서구로 부터의 유혹]을 쓰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최초의 소설
[정복자]를 쓰고
30년에는 인도차이나에서 자기 행적을 기록한
[왕도로의 길]을 저술한다.
그는 그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고 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다. 그 와중인 1934년 그의 최고의 걸작
[인간의 조건]을 완성한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최초의 문화부 장관의 직책을 준다. 1976년 75세로 죽을 때까지
그는 부와 명성, 그리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예까지 얻었다.
도굴꾼에서 문화부장관까지 오른 대문호- 그의 이름은 바로 앙드레 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