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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2 04:35
유독 피지알에서 많이 보는 글중 하나가 개신교를 믿으시는 분들과 개신교 전공자, 예비선교자 분들의 글인것 같습니다.
그 글들에서는 교인이 아닌 입장에서 보는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개신교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뭔가 바뀌는게 전혀 없다는거네요..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도 이 글을 쓰신 분이 바라시는 것 처럼 개신교가 좀 더 긍정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래봅니다.
14/07/02 05:44
실제로 교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큰교회로 성장시키는 목사들은 이런 분들이 아니고 다른 부류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14/07/02 08:43
뭐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도분들도 잘 안 오시거든요. '교회만 나오면 복 받는다'고 해야 잘 오지, 다른 이것저것도 다 해야 한다고 하면 라이트한 성도분들은 아무도 안 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뭐 누구 책임이랄 것도 없죠.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밖에는. 그리고 성도가 적은 교회는 교단에서도 발언권이 강하지 못하다 보니 여러가지로 난국입니다. 바뀌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14/07/02 04:49
새벽시간에 잘 읽었습니다. 길게 쓰고 깊지만 시간이 없어서 일단 추천드립니다. 피에군님만큼 고민하는 목회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흐흐
14/07/02 08:47
감사합니다. 고민만 하지 실천을 하지 못해서 사실 글을 쓰면서도 죄송할 뿐입니다. 저도 사실은 이런 고민에선 후발주자에 가깝습니다. 근데 초심을 유지하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더라구요. 사실 성도 수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면서도, 막상 교회의 현장에 들어가면 성도의 숫자가 중요하게 생각되고 그렇다 보니. 하하하.
14/07/02 05:50
잘읽었습니다. 요즘은 제대로교육받은 신학자라는게 믿음이 큰사람들은 아닌거같더군요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절대적인믿음없이 이론적인것만을 배우는건가요? 우연히 cbs냉시랭의 신학펀치를 몇번보게되었는데... 패널로나서는 신학교수들의 말이 제겐 충격이었는데 희망의신학이었나보군요 예수님이 세상에오신게 영혼구원 즉 천국이절대적인목적이아니다. 이세상에서잘살기위해서다. 성경자체가 사람이짜맞춘거기때문에 해석이 잘못되있다. 제가 보수적인교회만 다녀서그런가? 근데 유명한교회는 다 보수적인 믿음을 가지고있는거같더군요 옛날목사님들은 그들이 어려움가운데 경험한 믿음과 영혼구원이 최우선이라서... 그들의 모든잘못이 믿음과 영혼구원으로 포장되어서... 지금의 한국교회가 이모양인걸수도있겠지만요
14/07/02 09:21
일단은 이론적인 교육을 많이 받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이 무엇을 보고 이야기하는지는 신학적인 담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하. 희망의 신학은 더욱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하고 있습니다. 초보수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큰 교회일수록 보수적인 믿음을 아마. 하하. 그리고 말씀하신 신학 펀치에 나온 패널의 이야기는 아마도 '윤리학적 신학'일 거 같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논쟁하기에 앞서서 성경 속 가르침은 일단 인간에게 선하기 때문에 우린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 정도일까요. 포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 같긴 합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것도 뭐가 잘못인지 알아야 가능하니까요. 허허.
14/07/02 06:12
솔직하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글 감사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인 지 해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지 하늘에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계시가 내려오는 일은 없지요. 해서 언제나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에 대해서도 항상 이견은 존재할 겁니다. 어떤 종교인들에게는 낙태 금지가 전쟁 반대나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거고, 본인의 신앙을 바탕으로 정 반대의 결론이 나오는 분도 있겠지요. 개신교처럼 만인 사제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는 결국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피지알에서 줄타기 하는 사람들처럼 교리 가지고 줄타기하는 기복신앙도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처럼 개인의 교리 해석을 금지하는 교파는 이런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은 또 나름대로의 문제가 많지요. 예를 들어서, 천주교에 대해서는 누구 맘대로 당신에게 교도권이 있는 거요? 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 그냥 그렇다는 거지' 라는 식으로, 사제 따로 평신도 따로 노는 현상도 심하지요.
14/07/02 06:37
네, 저도 동의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의 경우 결국에는 종교의 근원적인 한계가 아닐까합니다. 이러한것을 해결할려면 종교 내에서는 불가능하고
종교의 밖에서나 가능할것 같습니다.
14/07/02 07:11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다만 Moon 님이나 저같은 무신론자한테는 그런 결론이 너무 당연한 거지만, 종교는 아무래도 '이것이야 말로 궁극의 진리' 라는 슬로건을 포기할 수 없는 면이 있느니만큼, 그런 방식으로 선회하기는 힘들지 싶습니다. 뭐 현실적으로야 목회자들도 현실 세계의 도덕이 움직이는 경향을 잘 파악해서 그에 맞춰나가는 식으로 움직일 것으로 봅니다만, 일단 종교인 입장에서의 대의 차원에서는 종교가 도덕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근원이 종교니까요....
피에군님의 원글과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여기까지만 댓글을 달겠습니다. 기껏 개신교 목회자 지망하시는 분께서 개신교에 대한 생각을 적으셨는데 우리끼리 너무 이야기를 진전시켜나가면 '님들은 해도 안됨' 이라는 식으로 보일 것 같아서요.
14/07/02 07:15
결국 종교를 포기하지않는한 불가능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지만 결국 게속 나가자면 원글의 내용가 멀어지긴 하눈군요.
무신론자와 종교를 가진 사람과의 건널수 없는 입장차이네요. 저도 이 이상의 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이 글에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14/07/02 10:11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말씀하신대로 제 개인적인 견해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죠.
하지만 전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이 쓰여진 시대에도 그랬고, 신약성경이 쓰여진 시대에도 그랬구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그랬는데. 다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며 악법은 없애는 것이구요.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가장 기본인데, 자신들만의 논리로 이 울타리를 넘어서는 게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의 밖에서 가능하다는 부분이 저는 '법과 윤리'로 보는데요. 저건 기독교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죠. 더 잘 지켜야 하는 것이구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함정이지만요.
14/07/02 13:28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사 잘 섬겨야 복 받는다라고 얘기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개신교의 성직자는 약간 '군사부일체'처럼 스승이자 어버이 같은 역할로 성도들에게 비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윗분들을 잘 모시던 유교의 문화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도분들이 성직자를 챙겨주었는데... 문제는 이걸 받는 성직자의 입장에서는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일텐데,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고, 도리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그러한 대접을 요구하기도 해서 참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성직자의 길을 갈 한 사람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들도 다 고쳐나가야죠. 객단가가 무슨 말인지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하하하.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여전히 성도 수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수에 집착하고 있는 교회들도 많구요. 다만 수를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의 변경이 나타나는 시기라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14/07/02 07:1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신학적인 접근이고 뭐고 다 떠나서, 날라리 신자로서 아주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한국교회가 더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일반 대중에게 외면 받는 이유는 대중에게 공감을 못 받아서죠. 그리고 이 점의 가장 큰 원인은 철저한 이중잣대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들에게 있다고 봐야죠. 기복신앙에 근거한 신도들의 잘못된 믿음이다 뭐다로 끌고가면 결국 양비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저는 특별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톡까놓고, 일반 평신도중에 성경을 통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주석을 읽어가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비유 (특히 신약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은 비유로 되어있죠)와 각주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용하는 신약시대의 사도들의 설교등)를 일일히 찾아가면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육체가 곧 성전이라고 하여 술 담배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이근안이 목사가 되고, 서세원이 목사가 되고....목사가 빤쓰를 내리라고 설교해도 문제가 안되고, 헌금을 많이내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교해도 문제가 안되고, 누구를 안찍으면 자신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설교해도 문제가 안되고...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있다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라면서, 고급차에 언론사 회장에, 심지 그 언론사는 가장 살색이 난무하는 찌라시급 스포츠 신문을 만들고...하늘아래 누구든지 타인을 정죄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누구는 빨갱이다...포퓰리즘이다... 이런 이중잣대를 지적하면 또 현실이 이상을 지키기에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라면서... 아니, 목사가 현실에 굴복하면 그게 목사입니까? 그들이 맨날 경고하고 비판하는 사이비와 뭐가 다릅니까.
14/07/02 13:35
네 맞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궁극적으로는 성직자의 이중적이며 위선적인 모습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점들에 대해서 사과드리고 싶었구요. 장경동 목사님이었던가요. 이런 말씀을 하셨던 거 같은데요. 사모(목사님 와이프)가 가장 예배드리기 힘들다고. 집에서는 가정 일 하나도 안 도와주고 맨날 잠만 자면서, 설교 시간에는 '남편 여러분 가정에서도 섬김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면 사모님들이 '퍽도...'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저부터도 가장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은 성경 말씀과 저의 삶을 일치시키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교회 내에서도 이제는 성도들이 비록 떠날지라도 성경 말씀에 대해 공부하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직자가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할 것이고, 올바른 신학관이 정립되어야 겠죠. 그리고 삶의 모범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구요. 이렇게 보면 갈 길이 멀지만, 늦었다고 생각이 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4/07/02 07:39
"하나님께 죄를 회개한 걸로 그치지 말고, 네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가서 그 사람이 용서할 때까지 용서를 구하라고. 그리고 죄를 용서 받아도 죄의 댓가는 치루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아니고 몇번 기웃거린 정도인데.. 저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 기독교는 "내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줬으니까 끝"인줄 알았습니다. 잘못 알고 있었군요..
14/07/02 07:59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개신교의 교리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이미 구약의 율법 (십계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규율)은 그 효력이 새 계명으로 넘어가 버렸다고 봐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의 삼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리가 기독교 (여기서는 개신교와 동일하게 본다면)의 근본적인 이념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따르는 자 = 예수님을 따르는 자 =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위의 글에 남겼듯이,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목사들이 이중잣대로 이상하게 해석하고 이상하게 설교하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죠.
14/07/02 09:09
마태복음 6장 14-15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무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을.(이건 제가 잘못 가져온 구절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의 댓가를 치루는 문제는 신약에서는 물론 면제되는 경우도 나왔나 싶긴 하지만, 구약성경 사무엘서와 역대기를 보면 다윗의 인구조사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다윗이 인구조사하는 걸 죄로 여겼고 선지자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그걸 듣고 다윗은 즉시 회개하는데요. 하나님은 다윗의 죄에 대한 회개는 받았지만, 다윗이 죄를 짓고 생긴 결과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길 원하시죠. 그래도 회개를 했기 때문인지 세 개의 형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무려 선택권을......;; 성경을 보면 회개만큼이나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이것은 다르게 보자면, 용서를 하려면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이 구절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이 구절은 단순히 용서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행위도 강조한다고 요즘은 해석합니다. 다른 성경구절들을 보면 서로서로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거든요. 용서를 구하기 보다는 용서를 하는 주체에서 기록된 말씀들이 많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보긴 어렵고, 죄를 지은 입장에서는 꼭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너의 죄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는 것이죠. (수정했습니다.) '내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줬으니까 끝'이라는 이야기는 좀 더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100% 성립은 아니구요. 성도들이 듣기에 좋은 설교를 하다 보니 더 깊이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요. 용서를 사람에게도 구해야 하는 것과 하나님께만 구하면 끝나는 것의 차이는 꽤 크니까요. 이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구원파로 넘어가면 더 발전해서, '과거에 지은 죄'뿐 아니라 '미래에 앞으로 지을 죄'들에 대해서도 이미 용서를 다 받았다고 얘기를 해버리죠. '회개',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게 사람들에게 먹혀서 기독교 이단 중에서도 꽤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07/02 09:26
마태복음 6장 14-15절 말씀은 우리 "에게" 죄지은 사람에게 우리 스스로 마음 속으로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 역시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우리는 어차피 모두 죄인이기에) 라는 의미 아닌가요? 그렇다면 본문의 상황과는 맞지 않아 보이는데요. 왜냐하면 그 성경 말씀은 우리가 "남에게 용서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가 "남을 용서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본문에서는 전도연이 하나님께 용서받으면 당사자가 용서를 하든 말든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살인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본문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14/07/02 11:41
끄응 더 좋은 예로 들어드릴 구절을 이제서야 찾았네요. 아 앞에 쓴 댓글 지우고 싶다 ㅠㅠ
삭개오 이야기가 있는데 교회에서 쉽게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는 살펴보지 않고 그냥 세리장이 구원 받았다 정도의 에피소드로 넘어가는데요. 자세히 살펴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잘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식사를 하면서 삭개오가 뜬금없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관습이 있었습니다. 범법 행위를 해서 상대의 돈을 취한 경우에는 원금 + 20%를 갚아야 하고, 자발적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면 2배나 4배, 5배까지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4배를 갚는다고 이야기하죠.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저래야 한다고 누가복음의 저자는 본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면, 단순히 세상이 정한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해도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건 예수님께서 구원 받았다고 선포했을 때 삭개오가 감동받아서 얘기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 예수님이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시죠. 하하.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극단적인 해석은 아니구요. 삭개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용서를 구하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저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14/07/02 11:51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14/07/02 08:53
잘 읽었습니다. 교회를 30년 넘게 다니다가 그만뒀기에 이런 글은 어쩔 수 없이(?) 읽게 됩니다. 파고들면 끝이 없고 간단히 정리되지 않지만, 그래도 간단히 하면 교회가 반성 - 회개 - 가 없습니다. 명백한 잘못을 했어도 말이죠. 그런데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인간들이 주류랍시고 권력을 잡고 있으니 조금만 정신차리면 자신이 시간 들여, 돈 들여 가야할 가치가 없죠. 이런 인간들이 바뀔리가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기만 할 겁니다.
14/07/02 13:38
네. 링크2의 글에서도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쉽고 객관적으로 교회의 부정을 볼 수 있는데, 교회 내에서는 눈가리고 아웅식이죠.
줄어드는 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다만 정말 신실하신 분들이 상처 입고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그것이 가장 걱정됩니다.
14/07/02 09:47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몰락할 수 밖에 없겠죠.
이런 토대의 붕괴가 더 기형적인 기독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고. 교회가 대중의 공감을 못받는 건 맞지만 오히려 본문과 같은 정론을 주장하는 교회는 더 망하고 흔히 개독이라고 욕먹는 교회는 그래도 세를 불리고 있죠. 이게 딜레마입니다. 사회 자체가 힘든 얘기, 어려운 얘기, 참된 얘기는 듣기 싫어하고 달콤한 얘기, 자극적인 얘기에는 맘을 여는 문화가 범람해 있고 그 문화가 그대로 교회에도 반영되는 것이죠. 이러다가 결국 소수의 참된 교회만 남고 다 망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상 망하기 전엔 극단적인 몸부림이 나오기 때문에 더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14/07/02 13:45
전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고 보는데, 다만 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가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이미지란 이미지는 다 갉아먹으니 있던 자리들마저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진정 총체적 난국.
참 설교 문제는.... 난제인 것 같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데. 목회자들이 달콤한 설교만 해서 성도들이 달콤한 것만 찾는 것인지. 아니면 성도들이 달콤한 설교를 찾다 보니 목회자들이 달콤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인지. 저는 우선은 목회자들의 문제가 크다고 보는 쪽입니다. 전 소수의 참된 교회가 남는다면 괜찮은데, 반대로 다수의 참되지 않은 교회가 남게 되진 않을까 그것이 더 걱정됩니다. 하아.
14/07/02 10:30
http://www.ddanzi.com/?act=&vid=&mid=ddanziNews&category=&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B%AF%B8%EC%89%AC%ED%8C%8C%ED%8A%B8
딴지일보 미쉬파트님 글입니다. 이분 말고도 더 괜찮은 글을 쓰셨던 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블루칼라) 딴지 해킹사건때 글이 날아간건지 리뉴얼하면서 증발한건지.. 검색이 잘 안되네요.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14/07/02 13:55
네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특별히 성서론쪽은...) 뭔가 논쟁할만한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논쟁하고 싶어도 2010년에 쓴 글을 지금 와서...) 그 외에 부분은 저도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내용들에 관해 비판하고 싶구요. 지금 현재 한국 개신교가 뭔가 기형적으로 변해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14/07/02 15:54
구약에 나오는 전쟁기사들은, 기본적으로 내집단 윤리로서의 '고대인'의 윤리의식을 반영하는동시에, 당시 유대인들이 '정서적'으로 해소해야 했던 것들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거짓신들을 징벌하는 내용은 '일정부분', 해당하는 전승을 구성한 당대 유대인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기위한 내용들입니다. 부족국가의 흥망, 제국에 의한 점령, 강제이주, 복귀등 다양한 '공동체'적인 경험들을 자신들이 가진 '신념체계'를 유지하며 해석하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쟁기사'들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구약에서의 전쟁승리는, 다른민족이 하느님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성경이 될 '전승'을 유지하던 '공동체'가 하느님을 '인정'하게 할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 '신약'이 지중해 주변 공동체들로부터 구성되고, 성경과 그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는 이천년 가까이 자신을 재구성 해왔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진리'도 정치적인 투쟁과, 장기간의 해석/재해석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사실 현대 한국에서 기독교의 각 종파들이 보이는 '행동'은 '한국사회'에서 재구성된 '기독교'로서는 올바른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존재여부가 불확실한 '기독교의 원래 믿음'이 아니라, 현대 한국사회의 기준 하에서 '한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재구성 되어온 기독교'가 낙제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14/07/02 16:44
저는 말씀하신 부분에 관한 기록들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대편의 기록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에서는 한 쪽만 이야기했지만요. 하하하.
이스라엘의 성서고고학자들도 두 가지를 가지고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 끼리 논쟁이 계속 되고 있죠.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쪽과 사울부터는 이스라엘이 존재했다는 쪽, 또는 더 이전의 가나안 정복 시대의 성경 속 역사도 사실이라는 쪽까지요. 미니멀리스트가 고고학 발굴 근거를 들어 성경의 허구성을 증명하려고 하면, 또 한 쪽에선 맥시멀리스트들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여튼 전 쿨하게 둘 다 인정하는 편이라, 포로기 이전에 특히 솔로몬 시기에 정립된 전승들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것이 가능했다는 쪽이고, 포로기 이후에 정립된 전승들의 경우에는 심한 부침 속에서 민족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했다 정도일까요. 신명기 사가와 역대기 사가를 구분 짓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뭐 비단 한국 사회에서만 개신교가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고 이와 비슷한 문제가 미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개신교의 신학 사상과 교회의 형태, 전도 방식 등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흥하고 쇠락하는 형태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정교회가 결국 문을 닫은 것처럼, 어쩌면 강남의 모 교회가 결국 문을 닫게 될 수도 있죠. 사실 변화가 없다면 시간상의 문제, 오래 걸릴지, 아니면 금방 나타날지 정도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개신교와 한국 개신교의 특히 보수 진영의 차이는 이슬람(알 카에다? 후세인?)을 북한으로 대치시켜서 생각해보면 정치적 활동의 모습이나 신학이나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공화당과 새누리당의 포지션도 비슷하고. 성도 구성도 비슷하고. 기존의 개신교에 대한 반발로 수많은 대안 교회들이 탄생했죠. 아마 한국에서도 비슷한 행보가 나타나고 있는데 당분간 이러한 경향을 유지할 것 같습니다.
14/07/02 22:08
다윗이나 솔로몬시대에 이스라엘지역에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은 '국가'가 명확하게 운영된 적은 없다고 봅니다.
주변에 영향력을 가지는 '부족국가'야 있었을 수 있지만요.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서'라고 하기보단 '설화집'에 더 가깝습니다. 상당수의 설화나 신화에는 역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설화상 '기록된 바'와 같은것은 아니죠. 개신교에 한정한다면, '신도 재생산'성공 유무가 앞으로의 성패를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혐오스러운 개념인 '모태신앙'과 같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사상적인 억압과 강제는 여전히 '잘 기능하는' 사상의 재생산 수단중 하나여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그렇게 금방 종교조직이 축소되고 할 것 같진 않습니다.
14/07/02 22:53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은 사실 영토의 경계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존재했다거나 중앙집권체제 같은 국가 시스템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고, 좋게 봐줘야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 정도로 추정할 순 있겠죠.
하지만 부족국가라고 할지라도 솔로몬 시대에는 주변에 영향력을 상당히 미쳤다고 추측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들이 이스라엘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맥시멀리스트들의 말을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신도 재생산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역피라미드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시간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에서는 모태신앙이었으나 중학생 이후 대학생까지의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무신론으로 전향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 것인가 계속 논의 중이기도 하구요. 마땅히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았기도 하구요. 아무리 사상적인 억압과 강제가 있다고 해도, 일주일 중 하루만 보내는 교회와 일주일 중 엿새를 보내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나 가정에서의 사상적인 억압은 이제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게 가정 내에서의 갈등 요소가 될 순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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