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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3 18:48
어제 오유에서 문익점에 관해 재미있는 글을 봤습니다.약간 멘붕..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51579
14/03/03 18:51
남평 문씨가 그래서 족보를 좀 위조하기도 했죠. 문래(문익점의 손자라고 올라와있지만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인물)가 물레를 만들었다는 설화도 그쪽에서 나왔고.
14/03/03 19:13
목화재배가 여말선초에 널리 퍼지면서, 많은것이 변했는데 그중 가장 큰 변화는 결제 수단이죠.
당시 제1 결제 수단은 쌀이었지만, 이걸 직접 거래하기에는 무겁기 때문에, 훨씬 가볍고 [비싼] 무명천으로 대행되었습니다. 무명천은 그 자체로도 옷을 만들수 있는 옷감이기도 했지만, 이 무명천을 들고 가면 쌀과 교환할 수 있었죠. 조선의 경제체재가 물물교환을 기반으로 했다곤 하지만, 이 무명이 화폐를 대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즉 이후 화폐개혁이 실패하는 제 1등 공신이 무명.. 크크)
14/03/03 19:13
4번은 유명한 얘기죠. 원래 역사 인식도 딱히 왜곡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나오더니 이민우라는 배우가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14/03/03 19:18
월탄 박종화의 소설 세종대왕에서 성인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이미지가 널리 퍼졌죠 위인전에도 양녕대군이 세종을 위해서 왕위를 포기한것처럼 나오고
14/03/03 19:19
용의 눈물이 소설 세종대왕을 각색한 거라(내용은 많이 달라졌지만) 양녕대군의 이미지도 그대로 넘어왔죠. 현대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된 양녕대군은 단언컨대 용의 눈물의 이민우일 겁니다.
14/03/03 20:29
김동인의 1933년 작 '운현궁의 봄' 은 대원군이 상갓집 개로 불리우다가 정권을 잡는 이야기를 그렸는데,
그 소설에서도 세종때 양녕이 왕권을 양보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널리 퍼져 정설처럼 되어버렸다는 뜻이겠죠.
14/03/03 19:26
용의 눈물 이전에 세종대왕 위인전에도 다 그렇게 적히고 그랬던걸로 압니다. 뭐 용의 눈물이 불에 기름을 끼얹은 걸 수도 있지만요...
14/03/03 19:36
제가 이야기를 애매하게 썼군요;;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왜곡된 이미지의 양녕대군이 용의 눈물의 이민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ㅜㅠ 용의 눈물이 시작이라는게 아니었는데 ㅠㅠ
14/03/03 19:35
황희정승이 실제로는 엄청 부패한 관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찾아보니 위인전 내용같은 청백리는 전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충격이었습니다.
14/03/03 20:07
지금의 관점에서야 탐관오리겠지만, 그 당시의관점으로는 부패한 관리라기보다는 '그당시 남들 다 하는 정도'라고 봐야할겁니다..
문제의 사건 이후에 정승자리에 올랐으니...(여말 권문세족이 얼마나 개차반같았으면...)
14/03/03 20:38
청렴한 관리의 대명사처럼 포장되어 있는데, 부패한 관리였고, 그에 대한 상소도 상당히 많이 올라왔었다고 합니다.
다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잘했다고 합니다. 또 세종 스타일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의 허물은 적당히 덮어주는 측면도 있었다고 하죠. 청백리는 전혀 아니라는건 사실입니다.
14/03/03 21:32
황희도 그렇지만 진짜 부패했던 관리는 조말생이였죠.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당시 법도에 따르면 사형까지 받을정도였는데 세종이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살렸으니깐요. 단 그때문인지 죽기 몇개월 전 까지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굴렸다는 점에서 세종대왕의 현명한(?) 인사 활용법도 엿볼 수 있구요.
14/03/03 23:34
황희가 청렴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고
진짜로 부패했던건 황희의 아들이죠. 사람들이 '성이 황이니, 마음 또한 황(黃:구리다는 뜻)하다'라고 했죠.
14/03/03 19:56
저렇게 열몇개 들고온걸 장인 정천익하고 나눠 심었는데 문익점은 싹다 죽이고 정천익이 심은건 싹이 나서 그걸 재배해서 퍼뜨리죠. 6차 교육과정 국사에서는 그래서 문씨 집안과 정씨 집안이 서로 면화 보급에 공이 크니 사진을 본인 집안을 실어달라고 싸우다 결국 문익점 초상과 목화 최초 재배지라는 장인네 집 밭 사진이 실립니다. 요새 국사책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14/03/03 20:36
4번에 대해서 더 패배해보자면, 양녕은 위의 설명처럼 그냥 개쓰레기가 맞습니다.
그 이후 또 오래살기도 해서 세조때까지 살았는데, 세종보다 형이었고 한때 세자였던 그였지만, 그와 관련된 난이나 반정의 움직임 조차도 없었죠. 또한 왕권이 위협이 될것이라 여겨져서 견재 받은 적도 없구요. 그만큼 그 누구도 그를 왕권에 도전할 인물로 본적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애초에 왕이될 인물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만 충녕도 드라마 에서나 소설에서 처럼 형과 아버지 사이에서 조용히 본인의 내실을 다지다가 왕이 된건 또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옷자랑을 하는 양녕에게 "옷차림 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도록 하시라." 는 등, 당시 세자라는 직책의 형에게는 다소 강도높은 직언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행동이 왕이 될 형을 위한 것인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건지는 몰라도 조용히 일러도 될 말을 공개석상에서 한것은 분명 당시 눈밖에 나던 형 앙녕과 충녕 사이에서 고민하던 태종의 의중을 어느정도 헤아린 행동은 아닌가, 왕위에 대해서 욕심이 아주 없지 않았지 않은가, 그런 시각으로 보기도 합니다.
14/03/04 00:26
황희는 청백리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다만 말년에는 나름 사회 환원?도 하고 재물 긁는데 정신 없는 아들 정승인 황수신을 꾸짖기도 했죠.
14/03/04 00:2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1442
이글 보시면 황희에 대해서 더 실망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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