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맛들려 있던 속물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정말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어퓨굿맨’, ‘데블스 애드버킷’,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등, 같은 주제를 가진 다른 작품들이 줄줄이 떠오르죠. 그러나 이 영화를 식상하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 ‘노무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노무현의 영화인 동시에 노무현의 영화가 아니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한 인물을 다루는 가장 흔한 방식인 전기 구조를 띄고 있지도 않고, 이런 식의 실화 영화가 의례 할 법한 실존 인물의 사진이나 영상을 끼워넣지도 않습니다.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기에는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대신, 서사 속에서 이 인물이 무엇을 했는지 행위를 보다 중점적으로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왜 굳이 송우석이라는 가명을 쓴 것일까요? 마케팅에서부터 이 영화는 노무현의 이야기를 가지고 만든 영화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데 말이죠. 물론, 노무현이란 인물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미 알 거 다 아는 상황에서 굳이 능청을 떨 것 까지는 없잖아요.
영화의 주인공이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를 쓰는 순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함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야말로 팬클럽 영화가 되고 말았겠지요. “봐라, 노무현은 저런 걸 해낸 사람이다. 정말 대단하지?” 이런 질문은 노무현의 팬, 안티,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 모두에게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시도입니다. 거기에서 추억 말고는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웠을 거에요. 그러나 노무현 대신 송우석을 통해 관객은 자연스레 그에게 우리 자신을 투영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망과 잠재력을 품은 인물이니까요. 송우석은 노무현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노무현의 영화라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송우석이라는 인물 자체보다도 그 인물이 놓인 시대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정작 주인공의 변모와 영웅 행위보다도, 이 영화는 그 시대가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의 안과 밖을 훨씬 더 세세하게 그려냅니다. 가면 속으로는 기민하고 흉폭하며, 가면 바깥으로는 견고하고 압도적인 시대적 악을 말이죠. 너덜너덜해진 국밥집 아들이 툭 하고 면회실에 떨궈지는 순간 관객은 공포와 연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베일에 감춰져 있던 악이 황폐해진 인간을 통해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후 송우석이 항거하는 이야기는 과정이 축약되고 결과만이 공판 과정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시대의 단면을 어떻게를 곁들여 자세히 그리는 대신, 송우석이란 인물의 승리에 다가가는 과정은 그 묘사가 부족해보이죠.
관객은 송우석의 눈을 통해 그 시대의 횡포를 목격합니다. 동시에 국밥집 아들 진우를 통해 권력의 야만을 직접 체험하죠. 손찌검이 남겨놓은 멍자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관객은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그 결과, 관객은 자연스레 송우석보다 진우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관객은 진우가 되어 송우석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 부조리로부터 관객을 지켜줄 최후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더 이상 그의 일상을 세무 변호사일 때처럼 샅샅이 그려낼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이제 그는 인간이 아니라, 송우석이란 이름을 빌린 정의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관객은 불온한 시대와 홀로 맞서 싸우는 ‘변호사 양반’의 외로운 투쟁을 목도하고, 응원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연출은 사실 촌스럽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도식화된 선과 악의 구도 속에서, 인물들은 전형성을 띈 대사와 행동으로 관객의 울분을 자극합니다. 악당들은 하나같이 뻔뻔하고 교활하며 이런 그들에게 송우석은 노골적으로 용기와 분노를 뿜어냅니다. 이런 연출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그들의 법정 대결이 마치 어린애 싸움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정말 법정에서 저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고 리얼리티에 대한 의심마저 품게 만들기도 하죠. 그러나 이 영화에는 오히려 세련된 연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잔머리 안쓰고 황소처럼 우직하게 달려드는 내용을 이리 저리 재주를 부려가며 찍는다면 결국 영화의 통일성 자체가 깨지고 말았을 겁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뻔하다 싶을 정도의 우직함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이 촌스러움은 어느 정도 필요에 의한 선택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이 우직한 연출을 다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차동영을 연기한 곽도원이 먼저 거론되어야겠지요. 으름장을 놓는 와중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은 왜곡된 관료주의 그 자체입니다. 사실. 공권력의 하수인, 잘해봐야 행동대장 정도인 위치의 인물이 사실 최후의 적이자 송우석의 분노에 대응되는 불의의 실체로 보이는 것은 곽도원의 연기 덕이 큽니다.송우석이 정의의 상징이라면, 차동영은 공포정치의 대변자로서 권력 자체를 자신의 말과 몸짓으로 상징하고 있어요.그리고 이를 연료 삼아 송우석과 관객은 함께 분노하고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크나이트의 조커 같은 존재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냈습니다.
송강호의 연기야 말 할 것이 있을까요? 각성한 이후의 송우석에게서 노무현보다는 오로지 송강호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도 잊혀질 만큼, 송강호는 이 영화를 송우석의 이야기로, 그리고 하나의 완전한 픽션으로 완전히 장악합니다. “국가란 곧 국민입니다!” 라고 일갈을 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노무현의 색채가 가장 크게 지워지는 순간입니다. 소박한 시민의 모습과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의 모습을 한 그릇에 이렇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마 송강호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결국 송우석의 변호는 실패로 끝나고, 훗날 그는 불의한 권력 속에서 죽어간 누군가를 위한 추모식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고졸 출신에, 돈만 밝히던 그를 변호하기 위해 부산의 변호사 100여명이 법원에 출석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품고 있던 상식과 진실이 모든 이에게 인정받는 결말로, 영화는 무난하지만 따뜻한 마무리를 맺습니다. 결국, 이는 한 변호사의 성장 스토리이며 정의와 용기라는 케케묵은 가치에 대해 연설을 하는 영화인 거지요.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스스로의 삶이 올바름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었는지, 나도 그렇게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게 될 겁니다. 거기서 어쩔 수 없이, 우리 현실과의 접점을 곱씹지 않을 수 없을 거에요. 그것은 그리움일수도, 아련함일수도, 혹은 쓰고도 무서운 맛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자체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이 이야기의 조각조각이 우리의 현재와 너무나 많이 겹쳐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송우석이란 인물은 노무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 법정 장면에서 송우석이 부딪히는 장면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했는데, 실제로도 이 영화의 모델은 공판 과정에서 그렇게 검사에게 삿대질을 하고 악을 쓰고, 울음을 참으며 변론을 했다는군요.
@ 이제 곽도원씨는 공무원 외의 다른 직업을 연기하면 어색할 것 같습니다. 점집 같은 곳에서 공무원 상이라고 초상화를 그려놔도 될 것 같아요.
@ 송강호씨의 필모그래피가 흥미롭습니다. 900만을 넘긴 최근의 세편에서 그는 시대의 부조리를 꿰뚫고 파괴하는 자 - 시대의 부조리는 알아도 무력한 자 - 시대의 부조리를 알고 저항하는 자 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