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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2 19:41
한가지 궁금한게 그럼 3.1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를 꼽아야 할까요?
상징적으로나마 유관순이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ㅠ,ㅠ
13/12/12 19:56
간디처럼 누구 한 명 꼽기 어려워서 얘기하기 어렵네요.
민족대표 33인으로 하면 친일파 3명(인가 4명인가 세간에 다 변절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3-4명일 겁니다) 때문에 못하겠고, 저 분들 말고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고 할 만한 인물도 없는 것 같고,.. 한 명 꼽으라면 아무래도 손병희 선생을 꼽고 싶네요. 민족대표 33인이며 천도교의 제 3대 교주로 천도교에서도 핵심적 대표적 인물이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나오시고, 고문의 여독으로 병사하셨습니다. 낯선 인물일 수 있지만 제가 어릴 적에 읽었던 유관순 누나 위인전보단 훨씬 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얘기하고, 더 많은 3.1운동의 내용과 업적을 담아낼 수 있겠네요.
13/12/12 19:47
주동자는 민족대표 33인이 맞는데 사람들은 실제 도움이 됐느냐 안됐느냐보다는 스토리가 있는걸 좋아하고 민족대표 33인중 사건 관련해서 죽은 사람은 단 한명이니... 소녀가 사형당했다는 스토리가 있어서 깃발꼽은데 성공한 유관순만 기억하죠 뭐. 근데 지금이라도 천도교를 기억하자 이런거 하면 개신교 쪽에서 반발이 장난이 아닐듯하네요
13/12/12 20:22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자진신고한 사실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안타깝네요.
뭐 독립선언하고 민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외치며 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니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민족대표 33인은 간디처럼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폭력은 폭력만을 부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죠. 성공했으면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처럼 길이 칭송받았겠지만, 실패했기에 야박한 평가가 나오게 되네요.
13/12/12 20:37
저는 그 자진신고 부분때문에 33인에 대해 좋게 생각지 않습니다. 만세운동을 실컷 계획해놓고 그 규모가 커지자 수습 할 생각 조차 않하고 애초에 독립선언하기로 한 탑골공원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어디 식당에서 선언하고 경찰서에 잡혀갔죠. 그 이후의 3.1운동의 전개는 지도자 없이 각 지역에서 진행이 되어버리죠. 전국민이 하나로 뭉쳤는데 이를 이끌어 갈 사람들이 없었던거죠. 심하게 말하면 만세운동에 참가하라고 했던 33인이 만세하러 참여한 사람들에게 빅엿을 먹인거라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13/12/12 20:36
손병희가 안 알려진 인물은 아닐텐데요. 예전에는 위인전 나오면 손병희 많이 들어갔는데 요즘은 아닌가...
잘못 적으신게 33인 중에 천도교가 15인, 개신교가 16인, 불교가 2인입니다. 그리고 천도교가 주도인거야 맞겠지만, 개신교가 하나의 교단을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개신교의 참여를 개인적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이승훈같은 지도자급 인물도 참여했고요. 이승만 관련 부분도 납득이 어려운게, 33인 중 16인이나 개신교인이고 그 중 이승만이 믿었던 감리교가 9인인데(나머지 7인은 장로교) 종파적 이해로 민족대표 33인을 누르면서까지 유관순을 띄웠을지는... 물론 유관순이 과대포장되었다는 부분은 일견 동의합니다. 숨겨진 의도가 있든 없든 유관순의 이야기가 좀 더 대중들에게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큰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화학당 부분은...잘 모르겠군요. 전 유관순 이화학당 나왔는지 오늘 알아서;;...
13/12/12 21:30
민족대표에 관한 내용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이승만 관련부분은 괜히 사족은 단 것 같은 느낌이들지만 '천도교'에서 저런 식으로 설명하는 걸 듣고 쓴 내용이고, 천도교의 입장인지라 걸러들어야할 필요성은 있겠군요. 삭제할까하다가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아서 그대로 둡니다.
손병희선생이 덜 유명하다는 점엔 위인전에 손병희 선생이 있는 책이 있지만 유관순보단 확실히 적다고 생각했고요. 대중들에게 절대적으로 유관순보다 많이 안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3/12/12 20:48
그냥 과대 평가 과소 평가 할것없이 유관순의 행적이 칭송받을만 한가 아닌가만 판단하면 됩니다.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1918년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1919년에 3.1 운동이 시작되자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그것이 3.1 운동과 흔히 혼동되는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4월 1일, 음력 3월 1일). 다만 그 여파로 류관순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류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천벌을 받게 되어서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서 위협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징역 7년형으로 증형되어 수감되었는데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 감옥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류관순은 일제 헌병들에게 장살당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맞아죽었다. 그냥 고문이 아니라 아예 때려죽여버렸던 것. 어린나이에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그 결과 감옥에 갇혀 모진고문을 당하며 맞아죽었습니다. 이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과장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이 행적에는 거짓이 없지 않습니까... 이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존경하고 칭송받아야 마땅하고 다른 잊혀진 위인들에 대해선 그 행적에 대해 발굴하고 널리 알려 따로 칭송하면 될뿐입니다. 굳이 훌륭한 일을 한 유관순을 과대포장했다고 깍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13/12/12 20:51
그리고 유관순을 3.1운동 독립운동의 대표 즉 주동자로 아는 사람이 많을까요?
대부분은 여기저기서 만세운동하니 자기도 고향으로 와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으로 아는게 대부분일텐데요? 누가 유관순이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계획하고 주도하여 움직였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다 독립운동은 33인의 대표가 시작했고 그것이 확산되면서 유관순도 이에 동참해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덮어두고 어린 소녀가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만세운동한 사람들중 가장 유명할 뿐이지요.
13/12/12 21:33
대표격 인물이라는 서술이 지적 받게 되는 거 같네요. 상징적인물로 수정했습니다. 저도 의미상으로는 상징적 인물로 사용했는데 단어를 대표라고 얘기해서 논란이 된 거 같네요.
13/12/12 20:52
나이들면서는 유관순이 과연 위인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선조셨으니까요. 유관순이 특별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한 명의 예를 드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 분들이 유명해지려고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13/12/12 20:53
옳은 일을 한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그 행위를 한 사람이 위인이 아니다라고 할수가 있나요?
독립운동가가 수없이 많다고 해도 그중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도 똑같이 위인인거지 유관순이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위인이 아니라고 할수가 있을까요? 그냥 유관순의 행적만 보고 평가하면 되는겁니다. 행적만 보면 충분히 위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13/12/12 21:22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오랜 기간 박해받으며 가스실에서 죽어갔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건 은신처에 숨어있다 전쟁 막바지에 끌려가 가스실이 아닌 병으로 죽은 소녀 안네 프랑크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관순을 3.1운동의 대표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거죠. 3.1운동의 대표는 33인이고 유관순이 휴교로 인해 서울에서의 3.1 운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3.1운동에 관심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거죠. 몇몇 소수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 '누구나 다 그렇게 알고 있는 거 아냐? 이건 문제다' 라고 해봤자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문제가 있다면 있는거죠.
유관순은 3.1운동의 대표는 아닐지언정 3.1 운동의 상징입니다. 대표가 아닌 것과 상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별개죠.
13/12/12 21:35
넵 대표격 인물이라는 서술이 지적 받게 되는 거 같네요. 상징적인물로 수정했습니다. 저도 의미상으로는 상징적 인물로 사용했는데 단어를 대표라고 얘기해서 논란이 된 거 같네요.
윗댓글 그대로 첨부합니다. 상징이 맞는데 단어 선택이 큰 문제네요 하
13/12/12 22:22
단어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글의 흐름이 문제인거죠.
마치 유관순이란 인물이 부각되면서 다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위인들은 덜부각되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유관순에게 뺐겼다. 라는 뉘앙스로 글을 적으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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