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워낙 글을 한 번 쓸 때도 아니다 싶으면 지우고 다시 쓰고 하다가 아, 오늘도 날이 아니구나, 일필휘지가 되는 날이 아니구나 하면서 지우기를 수십 번 하는 타입이라... 그러다 보니 쌓인 게 좀 많더군요. 오늘 가볍게 썰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전 나름대로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운을 좀 타고났죠. 인생이 더럽게 꼬여도 어떻게든 탈출할 구멍 한두 개는 반드시 나와 주는 그런 삶이었으니까요. 아, 연애 문제는 제외합시다. 괜히 사람 우울해집니다(...) 뭐 하여간에 남부러울 것 없는 대학을 나와서 지금 현재 포항에서 연구... 라고 쓰고 실상은 하루라도 일을 "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계산화학과에 소속이 되어 있구요.
지금으로부터 딱 7달 하고도 7일 전에 처음 포항으로 내려왔습니다. 기숙사 시설에 한 번 뻥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편하게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있는 2인 1실에서 1인 1실인 19동이나 아예 다른 방을 얻어 살 금전적 여유가 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는 있습니다마는...
처음 계산화학과 랩에 들어왔을 때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학부 때 들었던 양자화학 수업에서 김동호 교수님(정확히 하면 그 방의 대학원생분들 일동)이 가르쳐 주셨던 Gaussian 분자 계산 프로그램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모든 기능을 다 다룰 줄 아는 것도 아니고(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다른 분자나 용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진공 상태에서의 최적화된 분자 구조라던지, 에너지나 IR 스펙트럼 및 MO를 보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죠. 머리가 아파 오실 분들을 위해서 줄여서 설명하자면, 주어진 프로그램을 대단히 특정한 상황에서밖에 못 쓰는 그런 상황인 겁니다.
처음 왔을 때, 교수님은 저더러 논문을 많이 읽고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배우라고(NAMD라던지, AMBER라던지, VASP라던지) 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말씀하신 의미를 깨달은 건 며칠 전이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제가 나름대로 이해한 교수님의 첫 말씀의 의미를 설명드려 보면, 일단 트렌드가 무엇인가, 거기에서 어떤 말이 나오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 이런 것들을 알아야 논의(Discussion)가 되고 아이디어가 나오며 랩에서 태스크를 받았을 때 올바른 방향으로 일을 할 수 있다, 뭐 이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런 의미도 있었던 것 같아요. 뭣도 모르고 달려드는 패기는 가상하다만 그렇게 혼자 독자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도 이미 누군가가 거기에 대해서 논문을 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그런 의미요(실제로 딱 석 달 만에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후술).
뭐 근데... 제가 소속되어 있는 랩은 대단히 널럴합니다. 오후 느지막히 나오는 건 예사고, 제가 지난 1월/2월간 툭하면 결근하거나(!) 오후 느지막히 나와서 가장 빨리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더군요. 실은 그래서 제가 이 모양입니다만 - 제목에 특별히 "막장"이라고 적어놓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 여하간 랩은 엄청나게 자유로운 분위기에요.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한다는 거죠(...)
게다가 저는 학부 때도 그랬고 고등학교, 심지어 중학교 때에도 지독하게 놀아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밖에서 뛰어노는 게 아니라 컴퓨터 붙잡고 게임하는 거였긴 했습니다만, 여하간 남들처럼 밤을 새워서 공부하고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죠. 오죽했으면 제 동생이 저를 보고 중학교 때 저리 놀아도 되는구나 하다가 1학년부터 털렸겠습니까. 그 기질 어디 가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분위기와 만나서 완전히 폭주 모드로 들어간 겁니다. 특히나 대학원 들어와서는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하도 싸움이 나는 일이 많으니까 아예 싱글 플레이를 하면서 히키코모리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쉽게 말해서 컴퓨터와 쎄쎄쎄를 했다고 할까요(...)
그렇게 반 년의 시간이 흘렀죠. 한 일이 있을 수가 없었고, 배운 게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제가 나름대로 인턴생활하고 있을 동안에 떠올리다가 틈나는 대로 혼자서 생각해 왔던 아이디어가 이미, 그것도 2년 전에 Angewandte에서 - Science나 Nature 같은 학술지입니다 - 관련 논문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에 뻥지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전보다 훨씬 더한 아이디어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교수님 같은 분에게도 아이디어 하나는 굉장히 소중한 건데, 하물며 갓 입학한 대학원생에게 있어서 그러한 아이디어라는 것은... 체감상, 10년 전의 올림푸스배 결승에서 전용준 캐스터가 그리 외치셨던 황금베슬 백금베슬 다이아몬드베슬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슬이 스커지 두 기에 파괴될 때 서지훈선수의 심정이 그랬을까요? (물론 결과적으로 우승은 서지훈선수가 했습니다마는)
그러다 보니까, 한 가지 드는 게 있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라는 말이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마는... 그건 바로 '자각'이라고나 할까요. '님 이건 좀 아님. 아무리 봐도 지금 이건 좀 많이 아님.' 이런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뭐 지금도 솔직히 랩에서(...) 뻘글을 쓰고 있습니다마는, 적어도 예전처럼 닥치고 놀자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것보다는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수업 째는 일도 줄고(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마는... 1교시가 졸리긴 졸리더군요. 게다가 제가 잠을 주말만 되면 12시간씩 자서), 뭐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안 적었는데, 제가 수업을 들었을 때 기본으로 빠지는 게 1/3 이상이었고, 출석체크를 안 하는 교수님의 경우는 아예 절반이 넘게 수업을 째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광반응 - Photochemistry 쪽을 연구, 아니 그 분야의 논문을 읽고 있습니다. 목표는 이러한 광반응 같은 것을 통해서 아예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거나, 또는 공업적 프로세스를 줄여서 단가를 낮추는 것. 또는 그러한 반응을 제안하고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생판 모르는 생화학도 "새로" 공부해야 하고(학부 때 생화학을 안 들었습니다), 다 잊어먹은 유기화학도 다시 펴야 하고, 계산할 때 기본 이론을 알아야 하니까 물리화학도 다시 공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학도 다시 봐야 하고... 다시 봐야 할 것들, 새로 봐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쓸 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좀 웃기는 이야기이긴 한데... 계산화학 랩에 들어가 있는 주제에 학부 때 성적은 물리화학이 가장 낮았습니다. 유기화학이 B+/B+, 분석화학이 A0/C+(그 망할 놈의 전기화학;), 무기화학이 A-/B0였는데 물리화학은 B-/B-였죠(...) 제 지론이, B- 이하면 그건 그냥 모르는 겁니다. 발로 시험을 쳐도 충분히 C+은 나온다는 주의라(실제로 수학 이중전공하면서 모든 시험을 발로 치고 성적도 딱 그렇게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계산화학, 그것도 와 보니까 이건 뭐 "물리"화학 - 문자 그대로 물리가 메인인, 분명히 소속은 화학과이건만 - 그런 랩에 오게 된 거죠. 그런데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놀아제꼈으니(...)
어쨌든 대분야는 잡았고, 소분야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아둥바둥하고 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3년은커녕 아직 그 1/6도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 시작이긴 합니다만... 이제는 적응에 필요한 시기라고 할 때는 지났고, 그리고 솔직히 저는 적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심하게 게을러빠진 거라서(...) 무거운 엉덩이를 좀 일으켜볼까 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건, 전 24살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참지 않았다는 것을 꼽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죠. 전 항상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시험이 내일이라도 스타크래프트가 하고 싶으면 열 판이고 스무 판이고 했고, 마작을 치고 싶으면 마작을 쳤고(제가 가장 좋아하는 보드게임이라고 해 두죠 - 단 리치마작만 칩니다), 그런 삶을 살았죠. 문자 그대로 철저한 쾌락주의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제가 스스로 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뭐, 적어도 제 선택에 대해서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항상 시험 성적이 나쁘게 나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성적표를 뒤로 던져버렸으니까요.
이제 대학원에 입학해서 한 달쯤 지나서도 감을 못 잡고 뱅뱅 도실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 글은 솔직히 썰을 풀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쓰는 글이기도 합니다. 제 말아먹은 반 년을 훌륭한 반면교사로 삼으시기에 부족함은 없으실 거라 봅니다(...)
글쎄요, 꿈이 한 가지 있다면, 교수가 되는 거긴 한데, 육사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체력이 심하게 떨어지지만(대학원 들어와서 상당히 자주 앓아누웠는데 고질적인 체력 문제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날도 풀렸겠다, 어차피 학위 딸 때까지 최소한 5년, 최대 6년까지는 더 있어야 하니 졸업할 때쯤 되면 만 27세 아니면 만 28세겠죠. 그 동안에 체력을 기르고 전문연구요원 병역을 마치면 한두 번 정도의 기회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사관으로 가서 장기 복무를 노리는 것... 낙타가 아니라 코끼리가 바늘 구멍에 들어갈 확률이라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지 싶네요. 가서 꼭 별을 달고 싶습니다. 비육사 비3사 비ROTC 출신으로. 안타깝게도(?) 해사나 공사는 교수부장이 대령급이더군요.
이 정도로 썰을 마칠까 합니다. 좋은 하루들 되시길...
PS. 제목은 7막 7장 - 어느 분 말씀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aka 77막장(...) - 의 패러디입니다. 오늘이 딱 그 날이더군요. 덧붙이면 전 그 책을 서점에서 표지만 봤습니다(...) 애당초 자기 스타일대로, 철저하게 마이페이스로 살고 있는 제가 자기계발서 같은 데 눈을 돌리는 일은 없다고 보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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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원생으로서 반갑네요. 파인만이 그랬죠. 처음엔 자기가 혼자 한게 찾아보니 1800년대에 했었다. 그 다음에 한것도 찾아보니 누가 했더라. 근데 계속 이러면서 보니까 남들이 했던 일이 점점 최근이 되더라. 그러다 보니 자신이 처음으로 한 일이 생겼다.
사실 대학원생 연구주제라는것이 대학원생 혼자 힘으로 찾을 수 있을만한건 별로 없습니다. 사실 박사의 의미가 그것이죠. 이 사람은 혼자 연구를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방향을 제시해 주고 그 부분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죠. 이렇게 연구를 하다 보면 나중에는 혼자 주제를 찾을 능력도 생기고요.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정말 방향만 제시해주고 그 분야는 잘 모른다는게 함정... 음 결론은 우리 존재 화이팅입니다.
아... Kim. KS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시니......
그냥 한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계산화학은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대서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잘 못 하면 이도저도 아니게 허송세월 할 수도 있습니다.
대학원 생활은 본인이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연구를 대신 해주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