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4명의 대투수가 있습니다. 각각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이 선수들은 위부터 이대진, 박명환, 김수경, 배영수 투수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100승 투수이고, 2012년에 현역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올해까지 현역이었던 이 네 대투수들 중 2명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여 코치가 되었고, 1명은 은퇴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명만이 남아서 기록을 이어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 선수들을 짧게나마 기억해보고자 이 글을 써봅니다.
"Ace of Ace", 이대진

기아 타이거즈 시절의 이대진
화려한 데뷔, 그리고 전성기
이대진 선수는 74년생으로, 현재 나이 서른 아홉입니다.
데뷔는 93년도, 이종범과는 입단 동기인데요, 당시로는 상당히 드문 고졸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0승 5패 방어율 3.11을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98년까지, 그는 거의 매년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95/98년 탈삼진왕, 97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이대진은 일본으로 떠난 선동렬의 뒤를 이어 해태를 이끄는, 해태의 에이스 투수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Ace of Ace"였습니다. 즉 에이스 중에서도 에이스 투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최고였습니다.
이대진의 주무기는 강력한 직구와 커브였습니다.

이 두 무기를 바탕으로 타자들을 압도했는데, 98년 5월 14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는 역사에 남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바로, 10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대기록입니다. 이 엄청난 기록이 끊긴 것도 김재박이 번트를 지시해서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만큼 전성기의 이대진은 화려한 투수였습니다.
재활, 길고 긴 시련의 시작
하지만 그렇게 젊고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이대진 선수는 이후부터가 길고 긴 시련이었습니다.
99년을 부상으로 쉬게 된 이대진은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연봉 50% 삭감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승/세이브를 올리면 그에 따라 옵션으로 연봉을 올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대진은 00년에 복귀하여 8승 6패 13세이브를 올립니다. 연봉은 5천만에서 1억5천만으로 오릅니다.하지만, 너무 이른 복귀였는지 부상은 악화되고 재활에 매달리게 됩니다.
재활 중이던 2002년, 재활에 지친 이대진은 타자 전향을 결심하게 됩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7733&ctg=14
고교때까지는 투수 겸 4번타자로 타격에도 재능을 보이던 선수였기에, 부상이 낫질 않자 타자 전향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도 졸업한 지 10년,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어도 10년의 공백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02년 그의 타자로써의 성적은 23경기 36타수 3안타 4타점 2볼넷, 타율 0.083의 초라한 성적입니다. 하지만 이 3안타 중, 임팩트 있는 한 안타가 있었습니다. 바로 7월 28일, LG전 7회 초 2:2 2사 만루의 상황입니다. 당시 기아의 감독이었던 김성한 現 한화 수석코치는 이대진을 대타로 내보냅니다. 그 타석에서 이대진은 최고의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3타점 3루타를 터뜨립니다. 하지만 타자로써도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이대진은 다시 투수로 돌아왔습니다. 03년 잠깐 올라왔지만, 1회에 150km 가까이 뿌리던 공은 통증과 함께 2회 140km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는 세번째 수술과 함께 또다시 기나긴 재활에 매달립니다.
재기, 그리고.. 100승
07년, 이대진은 150km의 돌직구와 파워커브로 찍어누르던 투수에서 140km도 안되는 직구와 다양한 변화구로 맞춰잡는 투수로 바뀌어 다시 돌아옵니다.

07년 첫 선발 경기, 4월 7일 LG전. 팬들은 길고 긴 재활의 끝에서 다시 돌아온 에이스를 축복해주었습니다. 7년만에 돌아온 에이스를 위해 노란 종이비행기 3000개를 접어 그에게 날려주었습니다. 그 날, 이대진은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감격의 승리를 거둡니다.
예전과 같은 화려한 구위는 없었지만 경험으로 방어율 4점대의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이대진은 통산 97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09년, 기아는 구톰슨-로페즈-윤석민-양현종-서재응-곽정철로 이어지는 막강한 6선발의 투수진이 됩니다. 불펜에도 손영민-유동훈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이대진의 자리는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생긴 빈 자리를 맡으며 5이닝씩 막아주며 승리를 챙겼고, 8월 5일 LG전, 5.2이닝 3실점으로 통산 99승을 기록합니다. 그렇게 이대진은 무난히 100승의 고지에 올라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의 등판은 연패, 09년 기아의 아름다운 8월, 20승 4패의 기록중에 3패를 이대진이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9월 11일, 한화의 류현진을 상대로 5이닝 2실점을 기록하고, 팀은 4:2로 이겨 100승을 달성합니다. 6년동안 74승을 기록했던 투수가 16년만에 26승을 더 올리며 감격적인 100승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날, 입단 동기 이종범은 동생을 위해 홈런을 치며 100승을 지원해줍니다. 그리고 100승 기념공을 이대진에게 건네줍니다.
그 해 97년 이후 12년만에 올라간 한국시리즈, 12년 전 두 경기에 등판해서 2승을 거두었던 그는 똑같이 두 경기에 등판해서 2.2이닝을 막고 우승의 기쁨을 누립니다. 우승기념행사에서는 36세의 젊지 않은 나이로 하트브레이커도 부르면서 춤을 추는, 색다른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그리고 은퇴
하지만 09년이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10년 몇 번 선발투수로 나왔지만 성적이 썩 좋지 못했고, 구원투수로 대부분을 등판하게 됩니다. 10년의 성적은 14경기 22이닝 0승 0패 방어율 6.55, 이마저도 11년엔 1이닝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피나는 재활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한계가 왔습니다. 구속은 너무 느려졌고, 제구도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단에서는 은퇴를 권유합니다. 하지만 현역생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이대진은 이적을 선택합니다.

11년 7월 23일 웨이버공시로 방출된 이대진은 LG의 선택을 받아 18년을 뛰었던 팀을 떠나 LG로 이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LG에서도 그는 쓰임받지 못합니다. LG에서도 거의 대부분을 2군에서만 머무른 이대진은 12년, 고향팀 기아를 상대로 선발등판하지만 3.1이닝 5피안타 5사사구 6실점, 최악의 피칭을 보이며 패전투수가 됩니다. 그리고 이 등판은 마지막 등판이 되었습니다. 시즌 중반부터는 2군에서도 등판하지 않게됩니다. 은퇴를 결심한 듯 보였습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264096
그리고, 그것은 확정이 되었습니다. 올해 9월, 그는 은퇴 수순을 밟는다는 기사가 나왔고, 그렇게 영원히 마운드를 떠납니다.
http://sports.chosun.com/news/news.htm?id=201210170000000000009801&ServiceDate=20121017
하지만, 선수로써 영원히 떠난 것이지, 야구인으로써는 아닙니다. 이대진은 바로,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감독, 김응룡 감독이 이끌게 된
한화에 재활코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이대진의 인생 2막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에이스 오브 에이스, 돌아온 에이스였던 이대진은 너무나도 길고 길었던 재활에서 벗어나 코치로써 어떤 삶을 살아갈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