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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5/30 00:03:51
Name nickyo
Subject [일반] 그래도 음악트랙은 돌아간다. 다음으로, 다음으로.


예전에는 mp3플레이어를 열심히 충전해서 들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참 편리하다. 어쨌거나, 주머니에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덜 불룩해진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꽂노라면, 수백여개의 곡들 중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분명히 내가 좋아해서 넣었건만, 원하는 곡이 나올때까지 미련하리만큼 다음을 누르고, 또 다음을 누른다.



가수는 남자에서 여자로, 그리고 어느새 이수영에 도달했다. 이수영. 휠릴리, 라라라, 단발머리, 그리고 그 이전으로 그래도 사랑해, 얼마나 좋을까, 광화문 연가 등. 셔플을 끄고 이수영 트랙만을 돌린다. 그 애절함, 울음이 섞일듯한 말투. 사랑을 하고 있는 아픈 여인의 절제된 떨림이 마음을 울컥이게 만든다.



이수영의 노랫말은 내게 일종의 환상같은걸 심어주었다. 그건 어떻게보면 여성에 대한 일종의 편견으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더욱 이수영의 노랫말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노래속의 여인은 한결같이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손을 내민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게 돌아와요. 이수영의 음악, 그 중심을 꿰뚫는 '기다리고 바라보는 여성'. 어릴때부터 애정보다는 엄격함에, 여자보다는 사내놈들 사이에서 크기만 했던 내게 그건 일종의 판타지였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사랑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너무 고와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도 이수영의 음악을 추천해 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있는지도 모를 그대지만. 아마도 내가 이수영의 노랫말 주인공 같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얼마전에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별 감흥이 없었다는 말에, 친구가 넌 첫사랑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했다. 피식 웃으며 맥주캔을 홀짝였다. 감흥이 없는건, 잔잔하게 오래 담아두지 못하고 짧은 시간을 원없이 아팠기 때문이라고. 뭐, 차마 체면상 그런말을 할 수는 없잖아.



그녀는 그런사람이었다. 온순하고, 청초하고, 잔잔한. 잔물결이 일렁이는 커다란 호수처럼 때때로 그 그릇이 날 보듬어 줄 것만 같던 사람. 내게 기대라고 했지만 도리어 내가 기댈 수 있을만큼 커다래 보였던 사람. 올곧은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런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게 한 사람. 음악의 트랙은 넘어간다. 얼마나 좋을까에서, 광화문연가로, 그리고 휠릴리와 라라라, 단발머리까지.



내가 너무 작았던 탓일까, 혹은 그녀가 너무 커다랬던 탓일까.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내게 가장 강렬한 아픔으로 남았던 첫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전에 만난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첫 사랑에는 주저없이 꺼내고 싶은 이름이 생겼다. 이게 사랑일까? 하는 의심에서 시작된 그 사람이 이렇게 커질꺼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때때로 나도 모르는 이런 반전에 뒤통수를 맞는다. 그래서, 지금 또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나보다.




그럼에도 음악의 트랙은 넘어간다. 이수영의 음악이 몇 바퀴를 돌아 끝나고나면, 새로운 가수의 새로운 목소리가. 새로운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내가 보내준 음악을 여기저기서 소중히 듣고 다닌다고 했다.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다. 다음 트랙을 돌고 돌아 다시 돌아왔을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 그녀에게는 새로운 멜로디가 주변에서 지저귀고 있을테다. 그나마 몇 번 안되는, 내가 해 준 일이 지금도 소중히 여겨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음악은 다음 트랙을 지나, 다시 도도리표를 만난 듯 앞으로 돌아오니까. 그래서 그 익숙한 멜로디에 내 웃음이 선선히 떠오르면 좋겠다는 생각. 아마도 그 정도로, 그 정도로만 우리는 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음악은 또 흐른다. 한 층 가벼워진 주머니를 비집고 나온 이어폰을 타고. 어제와는 다른, 방금과는 다른트랙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저, 이 수백개의 곡들중 거의 듣지 않고 다음, 다음만을 누르는 노래처럼 그 사람의 기억에서 그렇게 여겨지지 않기를 소원해 볼 뿐이다. 재빠르게 넘어가는 음악 사이에 끼워둔 기억의 파편이 덜커덩 다음으로 넘어가버리지 않기를. 그렇게 소원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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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30 02:20
수정 아이콘
안 그래도 이수영노래중에 얼마나 좋을까를 막 다운받아 듣는데 pgr에오니 이수영 관련글이 있네요.
정확히 말하면 이수영노래에 그녀를 투영했다, 가 더 맞겠습니다만 클클...
12/05/30 20:29
수정 아이콘
그리고 사랑해 아니었나요? 크크
저도 퇴근길에 이수영씨가 얼마전에 나가수에서 불렀던 인연을 들었습니다.
참 많이.. 그리고 아직도 생각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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